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45화
태화는 템플을 한번 훑어보았다. 템플은 오늘 손님이 많지 않았다. 그건 함지훈이 한가하다는 의미였다.
태화가 평일에 템플을 찾아온 이유도 바가 한가하기 때문이다. 템플이 한가해야 태화도 함지훈과 대화를 시도할 수 있다.
태화는 자신이 주문한 하이너켄을 쭉 들이켜듯 마셨다. 태화는 하이너켄 한 병을 원 샷으로 마셔버렸다. 태화가 하이너켄 한 병을 비우고 나서 함지훈을 불렀다.
“사장님.”
함지훈이 태화에게 다시 다가왔다.
“네. 손님.”
“여기 하이너켄 한 병 더 주세요.”
“알겠습니다.”
함지훈은 태화가 이미 마신 하이너켄 빈 병을 치우고 새로 꺼낸 하이너켄을 태화에게 주었다.
“술을 꽤 잘하시네요.”
“그런가요?”
“네. 손님.”
함지훈은 태화에게 맥주를 건네주고 나서 태화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태화 군. 함지훈은 자네에게 관심이 있는 듯하네.]
[아무래도 그런 듯합니다.]
[자네에게 관심이 있다는 건 일단 대화를 풀어나가는데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는 걸세.]
[알고 있습니다. 대화를 풀어가는데 저한테 관심이 있는 사람이 낫죠. 무관심한 사람보다는…….]
함지훈이 태화를 보며 말했다.
“제 눈에 손님은 그냥 평범한 인물은 아닌 것 같습니다.”
“평범하지 않다니요?”
“아. 오해하지 마십시오. 손님의 외모만 보고 판단한 건 아닙니다.”
“…….”
“그냥. 이 장사를 하면서 쌓아온 경험이라고 할까요?”
“경험이요?”
“네. 저도 이 바 장사를 몇 년째 해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손님처럼 특별한 기운을 주는 사람도 만나봤습니다.”
“특별한 기운이요?”
“네. 특별한 기운이라고 해서 오해를 살 수도 있겠네요. 그냥 사람마다 주는 느낌이라고 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사장님은 저에게서 어떤 느낌을 받으셨습니까?”
“손님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연예인 준비하는 게 아니냐고 물어봤던 겁니다.”
태화는 함지훈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현재 태화는 함지훈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 정무적인 판단을 하고 행동하고 있었다.
현재 함지훈의 발언을 묵묵히 듣는 것도 이런 정무적인 행동의 하나였다. 상대가 발언할 때 끼어들지 않고 묵묵히 들어주는 것. 이것만큼 상대에게 큰 점수를 따는 행동은 없다.
함지훈의 발언이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손님은 연예인을 준비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전 그 말을 신뢰하고 있고요. 대신 이런 생각은 들더군요.”
“무슨 생각이요?”
“연예인은 아니더라도 평범한 일을 할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태화는 함지훈이 나름대로 식견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태화는 함지훈이 소위 말하는 술장사를 몇 년간 하면서 쌓은 노하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제는 태화가 발언할 차례였다.
[태화 군. 자네는 현재 함지훈과 대화하고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되네].
[알고 있습니다.]
[태화 군. 두 사람이 대화하는데 한 사람만 주야장천 하는 게 좋은 건 아니네. 물론 간혹 상대에 대한 배려 없이 자기만 말하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한지훈은 그런 스타일은 아닌 듯하네.]
[영감님 말이 맞습니다. 저도 함지훈이 혼자만 말하는 스타일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런 바에서 손님을 대할 때 사장인 함지훈만 말한다는 건 말이 안 되죠. 정말 그랬다면 장사 그만두는 게 맞죠.]
[그렇네. 아마도 함지훈은 사람들과 대화하는 걸 좋아하는 타입으로 보는 게 맞네. 자기의 적성을 살린 거라고 할 수 있네.]
[하지만 이제는 제가 대화를 끌고 나가야 하겠죠.]
[맞네. 이제는 자네 차례일세. 준비는 됐는가?]
[네. 전 준비됐습니다.]
태화는 박도봉 감독과 대화를 마친 후 함지훈에게 말을 걸었다.
“사장님. 안목이 꽤 놀랍습니다.”
태화의 발언에 함지훈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제가 좀 맞힌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장님도 평범한 분은 아니신 듯합니다.”
“하하. 그렇습니까?”
“네.”
“어떤 측면에서 그렇습니까?”
“느낌이라고 하지만 처음 본 사람을 꿰뚫어 보는 안목이 있으신 듯합니다.”
“과찬이십니다. 전 그냥 제 느낌만 말했을 뿐입니다.”
“사전의 정보 없이 느낌만으로 말했다는 게 중요합니다.”
“…….”
“그만큼 편견이 없으니까요.”
태화의 말에 함지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건 손님 말이 맞습니다. 그 사람에 관한 느낌이라는 건 그냥 느낌으로 봐야죠.”
“…….”
“사전에 어떤 정보가 입력되는 순간 편견이 생길 수밖에 없죠.”
“저도 사장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한 가지 제안해도 될까요?”
#.
태화의 발언에 함지훈은 깜짝 놀랐다.
“네? 제안이요?”
“그렇습니다. 오늘 저와 사장님은 서로의 첫 느낌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
“전 이게 서로에 관한 첫 느낌의 수준을 넘어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첫 느낌의 수준을 넘어섰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오늘 저와 사장님이 서로에 관해 한 말은…….”
태화는 다음 말을 하기 전에 잠깐 뜸을 들였다. 태화는 잠시 함지훈을 보았다.
함지훈은 태화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만큼 함지훈은 태화에게 호감을 지니고 있었다.
“서로를 알아본 것입니다.”
“서로를 알아본 것이라고요?”
“네. 사람들 볼 때 첫 느낌만큼 사람의 선입견이 덜 개입된 판단은 없죠.”
“…….”
“그래서 어떤 측면에선 정확하기도 하고요.”
함지훈은 태화을 발언들 듣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태화가 한 말은 함지훈이 평소 생각해왔던 것과 거의 일치했다.
함지훈은 무엇보다 그 사람의 첫 느낌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첫 느낌만큼 그 사람을 날것으로 판단할 수 있는 건 없기 때문이었다.
함지훈의 이러한 첫 느낌에 관한 판단은 적중률이 꽤 높았다. 그래서 함지훈은 자기의 경험으로 첫 느낌에 관한 판단을 스스로 신뢰하고 있었다.
태화는 오늘 함지훈과 대화하면서 함지훈의 이러한 성향을 재빨리 파악했다. 그래서 태화는 과감하게 함지훈에게 한 가지 제안한다는 발언을 할 수 있었다.
함지훈도 태화의 이러한 발언에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태화는 함지훈 자기의 경험으로 볼 때 첫 느낌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제안이 뭡니까?”
“그럼. 제안하기에 앞서 간단하게 제 이름을 밝히겠습니다.”
태화의 발언에 함지훈은 상대 이름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아. 네. 아직 손님 이름을 모르는군요.”
하지만 함지훈은 모르고 있었다. 함지훈 자신이 태화의 페이스에 말려들었다는 걸.
함지훈이 태화의 이름을 모르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함지훈은 오늘 태화를 처음 봤고 이제야 태화가 이름을 밝히겠다고 말한 상황이다. 그런데 함지훈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태화의 이름을 알고 싶은 상황에 온 것이다. 태화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 서태화라고 합니다.”
“음. 이름이 멋지시군요. 전 함지훈이라고 합니다.”
“아. 함지훈 대표님이시군요.”
태화과 함지훈을 대표님이라고 부르자 함지훈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대표님은 무슨…….”
“아니죠. 대표님이 맞으시죠. 템플 바의 대표 함지훈 님이죠.”
“하하. 그렇네요. 그런데 서태화 님은 뭐 하는 분인가요?”
“네. 전 영화 일을 합니다.”
“영화 일이요?”
“네. 정확하게 말하면 영화감독입니다.”
태화의 발언에 함지훈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영화감독이요?”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많이 놀라신 듯합니다.”
“네. 영화감독이라고 하기엔 너무…… 젊잖아요.”
“부끄럽습니다. 데뷔작을 만들었지만, 아직 갈 길이 멉니다.”
“데뷔작을 만드셨어요?”
“네. 현재 후반 작업 중입니다.”
“아. 그러세요? 이거 기대가 되는데요. 언제쯤 개봉합니까?”
“그게 좀 애매합니다.”
“애매해요?”
“네.”
태화는 다음 말을 하기 전 템플 바를 훑어보았다. 태화의 행동을 본 함지훈이 태화에게 말했다.
“왜 그러시죠?”
“설명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 같아서요.”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네?”
“오늘 손님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런가요?”
“네.”
“그럼. 좀 편하게 말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태화는 함지훈에게 <내 복권 내놔!> 제작 과정을 설명했다. 함지훈은 태화의 설명을 경청해서 들었다.
함지훈의 경청하는 태도. 이건 상대인 태화에게 보여주기식 태도가 아니었다. 솔직히 함지훈이 태화에게 보여주기식의 태도를 보일 필요가 없었다. 태화가 나름대로 유명한 감독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까 현재 감독님은 배급사를 잡지 못한 상황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영화 개봉을 위한 돌파구를 위해서 부성 국제 영화제에 <내 복권 내놔!>를 출품한다는 전략이고요.”
“네.”
“그런데 <내 복권 내놔!>를 부성 국제 영화제에 출품하는 거랑 감독님이 저에게 제안할 내용이 무슨 연관이 있나요?”
“네. 있습니다.”
“설명이 더 필요할 거 같군요.”
#.
함지훈의 방금 한 발언은 어쩌면 당연했다. 태화가 데뷔작을 부성 국제 영화제에 출품하는 것과 함지훈은 어떤 접점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함 대표님. 제 데뷔작엔 아직 음악이라는 옷이 입혀지지 않은 상황입니다.”
“…….”
“저작권 문제로 음악은 제대로 손도 못 대고 있습니다. 함 대표님.”
“네.”
“밴드 엔. 잘 아시죠?”
태화의 입에서 밴드 엔의 이름이 나오자 함지훈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밴드 엔이요?”
“네. 밴드 엔의 음악을 들으니 제가 만든 데뷔작과 분위기가 잘 맞더군요. 이번에 새롭게 낸 곡 <영화처럼…….>도 제 데뷔작의 메인 테마 곡으로 써도 되겠더라고요.”
“아. 그러셨군요.”
함지훈은 말을 하고 나서 피식 웃었다.
“감독님이 밴드 엔의 섭외 때문에 저를 찾아왔다면 잘 찾아온 게 맞습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저한테는 한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원칙이요?”
“네. 제가 밴드 엔을 관리하지만, 저 혼자 독단적으로 사안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밴드 엔에게 어느 정도 자율권을 준다는 의미인가요?”
“맞습니다. 제가 감독님의 제안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밴드 엔의 멤버들이 감독님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저도 도리가 없습니다.”
함지훈의 발언은 당연한 말이면서도 동시에 약간 거리감을 두는 듯한 발언이었다.
[태화 군. 여기서 함지훈의 발언에 실망할 필요는 없네.]
[알고 있습니다. 아마 저라도 저런 발언을 했을 겁니다. 당장 여기서 결정하기에 쉽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자네는 함지훈의 저 발언이 거절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지금까지 서로 대화를 잘하다가 갑자기 똑 부러지게 거절이라고 말하는 게 쉽지 않으니 말일세.]
[영감님 말이 맞습니다. 만약 함지훈의 저 발언이 거절의 의미라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좀 난감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