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44화
한재영은 불과 몇 분 전까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시원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냥 쓴맛만 느꼈었다. 하지만 한재영은 방금 삼킨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목구멍을 시원하게 넘어간다고 느꼈다. 이건 한재영이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어가고 있다는 신호였다.
한재영은 마음이 안정되자 머릿속도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다. 한재영이 무언가 갑자기 생각난 듯 태화에게 물었다.
“근데. 태화야.”
“왜?”
“음악은 어떻게 돼가냐?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선 아무래도 음악 작업이 마무리되어야 할 텐데.”
한재영은 그동안 태화에게 영화 음악 관련해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태화가 음악 부분은 자신이 전적으로 맡아서 처리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상황은 바뀌었다.
부성 국제 영화제 출품으로 방향이 바뀐 이상 한재영도 알아야 할 건 알아야 했다.
태화가 한재영의 질문에 대답했다.
“아직 결정된 건 없어.”
“뭐? 정말이야?”
“응.”
“근데 너 너무 한가한 거 아니냐?”
“그런 건 아냐. 단지…….”
“단지, 뭐?”
“신중히 처리하고 있는 것뿐이야.”
“네 마음은 이해하지만……. 부성 국제 영화제에 출품하려면 좀 서둘러야 할 거야.”
부성 국제 영화제에 출품하려면 <내 복권 내놔!>가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영화제 경쟁 부분이라는 본선에 가기 위해서 예선을 치러야 한다. 그러려면 영화제 사무국에 <내 복권 내놔!>를 기한 내에 제출해야 한다. 실제로 부성 국제 영화제 사무국은 영화제에 출품할 작품들을 공모하고 있었다.
한재영이 태화를 보며 말했다.
“일정에 맞추려면 그렇게 해야지.”
태화는 자신의 스마트폰을 작동시켰다. 그리고 밴드 엔의 음악을 찾았다.
“재영아. 이 음악 좀 들어봐.”
“음악? 혹시 영화 음악과 관련된 거야?”
“그래. 일단 눈을 좀 감아봐.”
태화가 한재영에 눈을 감으라고 한 건 음악을 좀 더 집중해서 듣게 하려는 의도였다. 한재영도 그걸 알기에 눈을 감았다.
“그럼. 어디 한번 들어볼까?”
태화는 한재영이 눈을 감자 밴드 엔의 노래 중 한 곡을 스마트폰으로 재생시켰다. 한재영은 눈을 감은 채 밴드 엔의 노래를 감상했다.
노래는 태화도 인상 깊게 들었던 곡이었던 <영화처럼…….>이다.
한재영은 눈을 감고 <영화처럼…….>을 듣다가 어느 순간 입꼬리가 올라갔다. 태화는 한재영의 입꼬리가 왜 올라갔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한재영은 음악이 끝나고 나서도 잠시 눈을 뜨지 않았다. 음악의 여운을 느끼기 위해서였다.
한재영이 살며시 눈을 뜨며 말했다.
“태화야. 이 노래 너무 좋다. 곡명이 뭐야?”
“<영화처럼…….>”
“<영화처럼…….>이라. 가사도 좋고 분위기도 좋고.”
“우리 영화에 딱이지 않아?”
한재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딱 맞는 정도가 아니라 최고다. 와. 근데 넌 어떻게 이 음악을 찾아낸 거야?”
“친구 중에 밴드 음악에 관심이 있는 녀석이 있어서……. 그 녀석 도움을 좀 받았지.”
태화는 밴드 엔을 찾았던 과정을 간략하게 한재영에게 설명했다.
“근데 밴드 엔 있잖아. 아직 섭외되지 않은 거지?”
“그래. 아직이야.”
“태화. 네가 왜 신중히 처리하겠다고 했는지 이해가 간다.”
“…….”
“<내 복권 내놔!> 작품과 잘 어울리는 음악이다 보니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거잖아.”
“네 말이 맞아.”
태화는 한재영에게 대답하고 잠시 침묵했다. 한재영은 태화의 모습을 보자 짠한 감정이 올라왔다.
‘태화 녀석. 자기가 온전히 책임지려고 하는 거야. 도대체 난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태화는 자신을 바라보는 한재영의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에 담긴 한재영의 감정도 느낄 수 있었다.
“재영아. 나한테 미안한 감정 느낄 필요 없어.”
“…….”
“내가 선택한 방법이야.”
“알아. 난 네가 또 어려운 짐을 맡는 거 같아서 그런 거야.”
“뭐. 어쩔 수 없잖아.”
“그런데 가능성은 얼마나 되냐?”
“가능성?”
“그래. 밴드 엔. 섭외할 가능성 말이야. 높은 거지?”
“되든가 아니면 안 되든가. 둘 중 하나지 뭐.”
“뭐?”
“솔직히 가능성이라는 거. 현 상황에서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네 말을 들으니 그렇긴 하다.”
한재영은 태화에게 할 질문을 바꿨다.
“그럼. 자신 있냐?”
“자신감의 문제는 아니잖아.”
“…….”
“당위의 문제잖아.”
태화의 대답에 한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당위의 문제지. 꼭 이루어져야 할…….”
#.
다음 날.
태화는 홍일대 근처 라이브 바로 향했다. 홍일대 주변엔 인디밴드나 가수들이 라이브 공연할 수 있는 작은 바들이 제법 많이 있다.
태화가 방문한 라이브 바 템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라이브 바 템플과 밴드 엔은 특별한 관계다.
템플 바의 사장이 밴드 엔의 리더이자 보컬인 오창민의 대학 선배다. 이러한 정보는 태화가 친구인 박상우와 함께 확인한 정보다.
박상우는 템플 사장의 SNS와 오창민의 SNS를 분석해서 정보를 뽑아냈는데 그 정확도가 상당했다.
태화는 일단 밴드 엔에게 직접적으로 제안하기보다는 템플 사장 함지훈에게 접근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는 태화가 박도봉 감독과 함께 세운 전략 때문이기도 했다.
[태화 군. 밴드 엔을 섭외할 계획을 세웠는가?]
[생각해 봤는데 두 가지 방법이 있는 거 같습니다.]
[두 가지 방법?]
[네. 하나는 이런 거 저런 거 따지지 말고 그냥 제가 부딪히는 겁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직접 저돌적으로 부딪히기보다는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겁니다. 가령 밴드 엔의 멤버와 가까운 사람을 활용하는 겁니다.]
[두 가지 방법 모두 장단점을 가지고 있네. 첫 번째 방법은 시간적인 여유가 없을 때 쓰는 방법이네. 이건 자네가 최수빈을 캐스팅할 때와 비슷한 상황에서 쓸 수 있는 전략이라고 생각하면 되네. 상대의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오니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네. 그리고 두 번째 방법은 시간적인 여유가 있을 때 자네가 취할 수 있는 전략이네.]
[그렇다면 두 번째 방법을 써야겠군요.]
[그렇네. 시간적인 여유가 있으니 말일세. 하지만 여기에도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네.]
[그게 뭡니까?]
[누구에게 접근하느냐의 문제일세. 자칫 접근하는 사람이 생각했던 것보다 밴드 엔에 영향력이 없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동안의 노력이 모두 헛수고가 되겠지요.]
[그렇네. 그래서 신중하게 선택해야 하네.]
[그래야겠네요.]
태화는 신중한 선택을 위해서 꽤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리고 친구인 박상우도 끌어들였다.
태화는 이를 위해서 박상우에게 현재 자신의 데뷔작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밝힐 수밖에 없었다.
호기심이 많은 박상우가 태화에게 끈질기게 물어봤기 때문이었다.
“태화. 너 아무래도 이상하다.”
“뭐가?”
“단순히 음악적 취향으로 이러는 거 같지는 않는데?”
박상우가 태화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너. 나한테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나도 도와주지 않을 거야.”
박상우는 호기심이 많고 농담하는 걸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가볍기만 한 캐릭터는 아니었다.
“상우야. 사실 나 데뷔작 만드는 중이야.”
태화의 말에 박상우는 깜짝 놀랐다.
“뭐? 데뷔작?”
“그래. 내 감독 데뷔작.”
“정말이야?”
“왜? 안 믿어지냐?”
“당연한 거 아니냐? 너 감독한다고 선언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데뷔작이야? 설마 너 단편 영화 만들면서 데뷔작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을 거 아냐?”
“맞아. 단편영화 아니야. 장편영화 데뷔작이야.”
“그러니까 내가 놀란 거 아니겠냐? 어떻게 이렇게 빨리 장편영화 감독으로 데뷔할 수 있냐고? 내가 알기로는…….”
“네가 알기로는 뭐?”
“보통 너처럼 포트폴리오가 없으면 현장 가서 막내로 일하잖아.”
“그렇지. 그런데 한번 데뷔작 만들려고 달려드니까 되더라고.”
태화의 말에 박상우가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태화 네 말대로라면 넌 확실히 연기보다는 감독에 재능이 있는 거 같은데?”
“뭐? 그걸 어떻게 장담하냐? 사람마다 꼬일 수도 있는 건데.”
“물론 네 말도 맞아. 대기만성이라는 말도 있으니까. 하지만 대기만성이라는 말은 예외적인 걸 표현하는 거야.”
박상우의 지적은 정확했다. 어떤 분야든 늦게 빛을 보는 게 일반적인 예는 아니다. 보통 재능이 있다면 남들보다 빨리 두각을 내고 치고 나가는 게 일반적이다.
“어떻게 데뷔작을 만들고는 있지만 결과적으로 극장에서 반드시 개봉해야 해. 그래야 감독으로 정식 인정받아.”
“아마 그렇겠지. 극장에서 개봉도 못 하는 영화를 만든 사람을 정식으로 감독으로 인정하지 않겠지.”
“그래. 정식으로 데뷔 무대를 밟지 못한 거니까.”
“인정.”
“현재 데뷔작에서 부족한 부분이 바로 음악이야. 저작권 문제로 아예 손을 못 대고 있는 상황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러니까 상우 네가 날 좀 도와줬으면 좋겠어.”
박상우는 태화의 청을 받은 후 바로 수락했다.
“좋아.”
“고맙다.”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이럴 때 도와야지.”
#.
박상우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SNS에 공개적으로 드러난 사실을 추려서 밴드 엔에 관한 정보를 꽤 많이 파악했다. 그래서 밴드 엔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 함지훈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태화는 함지훈이 밴드 엔을 섭외하는데 중요한 인물인 걸 파악한 후 바로 행동에 나섰다. 태화는 평일 템플을 방문했다.
템플은 두 가지 방식으로 운영된다. 평일은 일반 바로 운영한다. 그리고 금요일과 토요일은 가수들이 직접 라이브 공연을 하는 방식으로 바를 운영한다, 태화는 사전에 이런 사실을 파악하고 평일 저녁 템플을 방문했다.
태화는 바의 기다란 테이블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자 함지훈이 태화에게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하이너켄 한 병 주시죠.”
“알겠습니다.”
함지훈은 냉장고에서 하이너켄 한 병을 꺼내 태화에게 갖다주었다.
“근데 손님?”
“네.”
“오늘 저희 가게 처음이세요?”
“아. 네. ”
함지훈이 태화를 보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손님처럼 외모가 출중하신 분은 한 번 보면 잊기가 힘들거든요.”
“하하. 과찬이십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혹시 연예인 준비하시는 분이십니까?”
“아뇨.”
“아. 그렇군요. 전 당연히 연예인 준비하시는 분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봐주시니 고맙습니다.”
함지훈이 태화의 외모에 관해서 칭찬할 수밖에 없는 건 바의 조명 때문이기도 했다. 함지훈은 바의 분위기를 위해서 조명의 밝기와 색을 부드럽게 꾸몄다.
이 결과 부수적인 효과 생겼다. 소위 말하는 ‘조명빨’이 제대로 먹히는 공간이 된 것이다. 하지만 ‘조명빨’이 제대로 먹히는 공간이라는 걸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태화의 외모는 당연히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