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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143화 (141/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43화

태화는 한재영의 말을 듣자 현실의 벽을 느꼈다.

[재영이 말처럼 우섭이나 현석이를 부르지 않기를 잘한 것 같습니다.]

한재영은 태화와 오늘 미팅을 잡기 전 이우섭과 김현석을 부르지 말 것을 제안했다. 태화는 한재영의 제안을 듣고서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다. 한재영이 배급사를 섭외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는걸.

한재영은 이우섭과 김현석 있는 자리에서 자신이 진행해온 일들이 성과가 없었음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한마디로 자신의 면이 서지 않기 때문이었다.

태화도 한재영의 이런 심정을 알았기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재영이도 재영이지만 우섭이나 현석이도 재영이의 말을 들었다면 멘탈이 나갔을 겁니다.]

[아마도 그랬을 거네. 그래도 나름 괜찮은 작품에 참여했다고 생각했는데 배급사에서 퇴짜를 맞은 거나 다름없으니…….]

[영감님. 극장 개봉. 역시 만만치 않네요.]

[극장 개봉이라는 거. 영화계의 약자에게는 너무나 힘든 일이네.]

[이유가 뭡니까?]

[극장 개봉 자체가 기득권이라 그렇네. 누군가는 시스템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말일세.]

[기득권과 시스템. 그 차이가 뭡니까?]

[쉽게 설명하면 이렇네. 자네가 만약 그 체제 범주 안에 있으면 시스템이라 부를 것이고 그 범주에서 벗어나 있다면 기득권이라고 지칭하게 될 걸세.]

[결국 그 기준은 내가 혜택을 받느냐 못 받느냐이군요.]

[그렇네. 어쨌든 대중적인 인지도를 가진 배우를 쓴다는 건 그만큼 제작비가 많이 들 수밖에 없네.]

[제작비를 많이 쓸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기득권이긴 하죠. 솔직히 많은 기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역시나 이런 결과가 나오는군요.]

[태화 군. 자네는 이제 극장 개봉을 위해서 다른 방법을 선택해야 하네.]

[다른 방법이요?]

[그렇네. 현재처럼 배급사가 <내 복권 내놔!> 작품의 가치를 알아주기를 기대하는 건 복불복에 가까운 행위일세.]

[그럼. 배급사를 통하지 않는 방법을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렇다기보다는 배급사가 <내 복권 내놔!> 작품에 흥미를 갖도록 하는 것이라는 게 맞는 표현일세. 어차피 다른 배급사도 사정은 비슷할 테니.]

[뭡니까? 그 방법이란 게….]

[태화 군.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듣게나.]

[네. 영감님.]

박도봉 감독은 태화에게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방법을 설명했다. 박도봉 감독이 태화에게 제시한 방법이 뭔가 신선하거나 특별한 방법은 아니었다. 하지만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제안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영감님이 방금 제시한 방법이 현재로선 가장 나은 방안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무엇보다 현실적입니다.]

[아마도 그럴 걸세.]

태화는 한재영의 표정을 살폈다. 태화는 한재영과 함께 작업하면서 지금처럼 어두운 표정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

어떤 일이든 마무리가 중요하다. 한재영은 <내 복권 내놔!>를 극장에서 개봉하도록 하는 게 이 작품의 프로듀서로서 마지막 임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의 흐름은 한재영이 생각한 것과 다르게 흐르고 있었다. 자칫하면 마지막 임무가 어그러질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재영의 표정은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재영아. 네가 접촉한 배급사 중 우리 영화를 배급할 곳은 없는 거야?”

“그렇다고 봐야지.”

한재영은 태화를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미안하다. 뭔가 성과를 냈어야 했는데….”

“너무 자책하지 마라. 네 잘못 아니다.”

태화의 말에 한재영은 그저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이해해 줘서 고맙다. 근데 이제 어떻게 하냐?”

“…….”

“다른 배급사를 좀 더 알아볼까?”

태화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태화의 대답에 한재영은 순간 놀랐다. 태화의 말투가 너무 자신감이 넘쳤기 때문이었다.

“뭐?”

“어차피 다른 배급사와 접촉한다고 해도 그 결과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아.”

“그럼. 넌 다른 방법이 있는 거야?”

한재영의 질문에 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한재영의 얼굴에 순간 기대 어린 표정이 서렸다. 한재영의 이런 반응은 어쩌면 당연했다.

태화의 대답은 어두운 터널을 벗어나는 데 한 줄기 빛이었다.

“뭐야? 그 방법이.”

“성과를 내는 거야.”

한재영은 태화의 발언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뭐? 성과?”

“그래.”

“태화야. 그게 무슨 소리야? 당장 배급사가 붙지 않아서 개봉이 불확실한 상황이야. 어떻게 성과를 내냐고.”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배급사를 통하지 않고서 성과를 내면 되잖아.”

“배급사를 통하지 않고서 성과를 낸다?”

한재영은 태화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태화는 이런 상황에서 시답잖은 농담이나 할 사람이 아니다. 뭔가 방법이 있는 거야. 그런데 그 방법이 뭐지? 감이 전혀 안 잡히는데.’

한재영은 태화가 가지고 있는 방법이 무척 궁금해졌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지 방법을 말해봐.”

“내가 생각한 방법은 작품 <내 복권 내놔!>를 배급사를 통해서 관객에게 공개하는 게 아나.”

“뭐? 배급사를 통하지 않으면 극장에서 작품을 개봉할 수 없어. 극장에서 작품을 개봉하지 않고 어떻게 관객에게 우리 영화를 공개할 건데? 혹시 네가 직접 배급사를 만들기라도 할 거야?”

“…….”

“배급사를 만드는 건 영화제작사를 만드는 것과 완전히 달라.”

배급사는 영화판에서 유통을 담당한다. 그래서 작품을 제작하는 영화제작사하고는 그 시작부터가 다르다.

영화 제작은 태화처럼 아주 적은 예산으로 만들 수 있지만 배급은 다르다. 기본적으로 작품을 홍보해야 하고 전국의 극장 망도 꿰고 있어야 한다. 여기에 각종 마케팅도 해야 하기에 마케팅에 관한 감각도 있어야 한다. 이는 특정 중소 벤처 기업이 좋은 제품을 개발했다고 해서 다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중소 벤처 기업이 개발한 훌륭한 제품이 제대로 빛을 보려면 이를 유통할 수 있는 유통망이 움직여야 한다.

기본적으로 유통망은 거대한 자본이 필요하다. 그래서 유통을 담당하는 기업이 이 제품의 유통을 거부하면 그 제품은 빛을 보지 못하고 사장될 수밖에 없다.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재영아. 걱정하지 마라. 내가 배급사를 만드는 건 아니니까.”

“뭐?”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그래. 알았어.”

태화가 앞으로 발언하는 내용은 박도봉 감독이 태화에게 제안했던 방법이다.

“부성이다.”

“뭐? 부성?”

“그래. 부성 국제 영화제.”

부성 국제 영화제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주목하는 국제 영화제로 올해 30주년을 맞는 국제 영화제다.

한재영이 태화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부성 국제 영화제에 우리 작품을 출품하자는 말이야?”

“그래.”

“당연히 영화제 경쟁 부문에 출품하는 거겠고?”

“응. 맞아. 특히 올해 부성 국제 영화제는 30주년을 맞이해. 그만큼 사람들의 주목도도 높을 수밖에 없어.”

“음. 듣고 보니. 태화. 네 전략이 나쁘지 않은 거 같은데…. 아니지.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에선 제일 나은 방법 같다.”

보통 국제 영화제는 경쟁 부분과 비경쟁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영화인 아무개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영화제에서 작품상이 감독상을 받았다고 언론에서 가끔 대서특필하곤 한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남녀 주연상 등은 모두 영화제 경쟁 부분에 출품한 작품을 대상으로 한다.

태화가 한재영을 향해 말했다.

“어쨌든 우리 작품이 경쟁 부분에 출품되고 영화제에서 성과가 난다면…. 배급사도 우리 영화를 다시 보게 될 거야.”

한재영은 태화의 설명을 듣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다. 배급사도 뭐라도 홍보 문구를 넣을 수가 있잖아. 부성 영화제 경쟁 부분 작품상 수상. 이런 거 말이야.”

태화가 한재영의 발언에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작품상이라…. 너무 나간 거 아니냐?”

태화가 한재영의 표정을 살폈다. 한재영의 표정엔 어두운 기색이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럼. 감독상은 어때?”

한재영의 발언에 태화가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감독상이면 뭐. 나쁘지 않네.”

“작품상은 너무 나갔다더니 감독상은 아니냐? 왜, 네가 감독이라 그런 거냐?”

태화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응. 나도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네가 감독상이라고 언급하니까. 그 상. 받고 싶어지네.”

“상을 받을 수 있다면 뭐든 받았으면 좋겠다. 그래야 나중에 배급사도 우리 작품에 붙을 테니까.”

한재영은 시간이 지나면서 본연의 활기찬 모습을 찾아갔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어쨌든 희망이 생겼으니까.

한재영은 그동안 접촉했던 배급사로부터 계속 거절당했고 그에 따른 스트레스가 상당했었다.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된 지금. 한재영이 활기찬 모습을 찾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그리고 태화는 현재 한재영의 활기찬 모습이 너무 좋았다.

“그런데 넌 이 생각을 어떻게 한 거야?”

“왜?”

“솔직히 영화제 출품까지 난 생각 못했거든.”

한재영이 영화제 출품을 생각 못한 건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영화제에 출품한다는 건 극장 개봉을 향해 가는 직행노선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극장 개봉 직행노선은 배급사를 바로 확보하는 것이고 한재영은 여기에 집중했었다.

“재영아. 난 그냥. 관점을 좀 바꿨을 뿐이야.”

“관점을 바꾼다?”

“그래. 우리 영화가 배급사 몇 명의 사람들에게 평가받고 극장에 걸리지 못한다는 게 솔직히 억울하잖아.”

“그렇긴 하지.”

“결국 영화는 관객이 평가하는 건데.”

“네 말이 맞아. 물론 <내 복권 내놔!>를 영화제에 출품한다고 해서 부성 국제 영화제 경쟁 부분에 출품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이 길도 꽤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인정하기 싫지만, 현재<내 복권 내놔!>는 극장 개봉을 위해서 뭐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야. 일단 일차적인 목표는 부성 국제 영화제 경쟁 부분에 진출하는 거야. 그리고 이 작품이 관객들에게 어필할 수만 있다면…. 극장 개봉 가능성도 올라갈 수밖에 없어.”

“나는 태화, 네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관객의 반응을 배급사가 무시할 수는 없지.”

영화판에서 관객의 반응은 정치판에서 대중의 여론과 비슷하다. 관객의 좋은 반응은 배급사 측에 긍정적인 신호를 줄 수밖에 없다.

“좋아. 한번 진행해 보자.”

“재영이. 너 완전히 살아났어.”

“내가 살아나?”

“그래. 너 오늘 나랑 미팅 시작부터 얼굴이 완전히 죽상이었어.”

한재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솔직히 표정이 밝을 수가 없잖아. 일 진행이 잘 안 되는데……. 태화 너도 잘 알겠지만 난 얼굴이 그렇게 두꺼운 편은 아니야.”

“아주. 내가 잘 알지.”

한재영은 말을 하고 나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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