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42화
태화는 발언한 후 한재영을 비롯한 이우섭과 김현석의 반응을 살폈다. 태화의 발언에 한재영을 비롯한 세 명은 잠시 침묵에 빠졌다.
[영감님. 다들 말이 없군요.]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세. 자네의 발언은 어찌 보면 방법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이네.]
[맞습니다. 맨땅에 헤딩한다는 게 정말 아무런 방법도 없을 때 하는 방법이니까요.]
[하지만 맨땅에 헤딩할 때 돌파구도 생기는 법이네.]
[그렇죠. 내가 행동하지 않으면 결국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죠. 맨땅에 헤딩하는 게 처음도 아니고요.]
이우섭과 김현석은 혼란스러웠다. 이제 끝이 보인다고 생각했었는데 또 하나의 커다란 벽이 가로막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한재영은 이 두 사람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어쩌면 태화.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한재영의 발언을 들은 이우섭과 김현석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우섭과 김현석이 거의 동시에 놀람과 의문의 감탄사를 입에서 토해냈다.
“네?”
이우섭이 한재영을 향해 말했다.
“재영이 형.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왜?”
“암울하잖아요.”
“그래도 현실이잖아. 우리 눈앞에 닥친 현실.”
“그렇긴 하지만…….”
한재영이 태화를 보며 말했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음악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야. 다만 음악적인 부분을 해결하려면 근본적인 접근이 필요해.”
“재영이 네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어. 개별 음악이 아니라 원저작자를 중심으로 일을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거잖아.”
“네 말이 맞아. 개별 음악으로 접근하면 우리 제작비로는 음원 저작권 감당이 안 돼.”
“하지만 원저작자가 음원 사용을 허락하면 그 비용을 줄일 수가 있지.”
“그래.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태화 넌 맨땅에 헤딩하는 게 아니야.”
“뭐? 그게 무슨 소리야?”
한재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맨땅이 아니라 원저작자에게 헤딩하는 거라고 봐야지.”
한재영의 말에 태화는 순간 빵 터졌다.
“하하. 재영이 네 말이 맞는다.”
태화는 크게 웃고 나서 자신의 계획을 말했다.
“재영이 넌 일단 음악 쪽은 생각하지 말고 배급망을 알아봐.”
태화의 제안에 한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는 게 낫지. 그럼. 음악 쪽은 태화 네가 맡아서 할 거야?”
“음. 그렇게 해야지.”
#.
태화가 음악에 신경을 쓰게 된 건 꽤 오래전부터였다. 정확하게 시기를 말한다면 <내 복권 내놔!> 촬영에 들어가기 전부터다. 하지만 태화는 촬영에 들어가면서 음악에 관해서 제대로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하루하루 촬영을 준비해 나가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태화에게 돌파구를 마련해 준 건 성사 멤버인 박상우 때문이었다.
박상우는 주변 사람들에 관한 정보를 물어오는 것 외에 전문적인 분야가 있었다. 그 분야는 바로 인디밴드에 관한 정보다.
박상우는 현재 클럽에서 활동하고 있는 웬만한 인디밴드에 관해선 그 정보를 꿰차고 있었다. 태화는 박상우로부터 인디밴드에 관한 정보를 꽤 많이 얻을 수 있었다.
물론 태화는 박상우에게 자기가 데뷔작을 만들고 있다고 하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물었을 뿐이다.
“상우야. 좀 어두우면서 반항적인…… 그런 밴드 없냐?”
“왜? 너 요즘 우울하고 그러냐?”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니고.”
“당연히 있지.”
“있어?”
박상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태화는 박상우로부터 얻은 정보와 너튜브 검색을 통해서 <내 복권 내놔!>에 어울리는 음악을 하는 인디밴드를 찾아냈다.
태화가 찾아낸 인디밴드의 밴드명은 ‘엔(N)’이었다. ‘N’은 Noir(누아르)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밴드명이었다.
누아르는 프랑스어로 검은 혹은 어두운 이라는 뜻하고 있는 단어다. 필름 누아르는 어두운 분위기의 영화를 뜻한다.
태화는 밴드 엔의 음악을 검색해서 들어보았다. 밴드 엔은 자신의 밴드명처럼 어둡고 음습한 음악적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음악적 분위기는 <내 복권 내놔!>의 영화적 분위기와 어울렸다.
보통 인디밴드는 SNS나 자신들의 커뮤니티에 자신들의 활동을 홍보한다. 밴드 엔도 자신들의 활동을 온라인에 올린다.
태화는 밴드 엔이 SNS에 올린 내용을 보고 홍일대 앞으로 향했다. 오늘 밴드 엔은 홍일대 앞에서 버스킹이 계획되어 있었다.
버스킹이 열리는 무대 앞은 공연을 보기 위해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좀 모여있는 정도지 미어터질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태화는 비교적 편하게 앞자리로 이동할 수 있었다.
태화가 자리를 잡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관객들 사이에선 환호성이 터졌다. 그리고 몇몇 관객은 밴드 엔을 연호했다.
엔! 엔! 엔!
밴드 엔은 혼성 4인조 밴드로 리드 기타와 베이스 기타, 드럼, 그리고 여성 키보드로 구성됐다.
밴드 엔은 악기 튜닝을 끝내고 본격적인 공연에 들어갔다. 리드 기타이자 보컬인 오창민이 관객들을 향해 인사말을 건넸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창민이 관객들을 향해 인사를 건네자 객석에서도 바로 호응이 나왔다.
오창민! 오창민!
오창민은 쇼맨십이 있었다. 관객이 호응하자 자신도 모르게 신이 나서 기타로 애드리브를 날렸다.
현란한 오창민의 기타 연주에 관객들의 반응도 서서히 달궈졌다. 반응이 뜨거워지자 밴드 엔의 다른 멤버들도 오창민의 기타 연주에 맞춰 자신이 맡은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오창민은 연주하면서 밴드의 멤버들을 한 명씩 소개했다.
“베이스에 김우진.”
“드럼에 채성관.”
“키보드에 이채연.”
멤버들이 한 명씩 소개될 때마다 관객들도 호응했다.
[음. 저기 저 관객들은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이 아니구먼.]
[네. 밴드의 리더인 오창민의 행동에 맞춰 능숙하게 호응하고 있어요. 밴드 엔의 팬들이라고 봐야죠.]
[음. 자네의 분석이 맞네.]
오창민의 기타 연주는 절정을 향해서 가고 있었다. 하지만 현장의 분위기는 오히려 차분했다.
[영감님. 관객들이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렇네. 기타 연주가 절정으로 가고 있는데 오히려 차분한 분위기라는 건 관객들이 단지 분위기가 아니라 연주에 집중하고 있다는 의미지.]
기타를 연주하는 오창민의 손가락 움직임은 현란했고 관객들은 숨을 죽였다. 이윽고 오창민의 기타 연주가 끝났다. 하지만 관객들은 몇 초간 조용했다. 오창민이 했던 연주의 여운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몇 초의 시간이 흐른 뒤. 관객들 사이에서 함성과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관객이 만들어낸 박수와 함성은 짧게 끝나지 않았다.
#.
밴드 엔은 리더인 오창민의 애드리브 연주에 이어 노래 두 곡을 라이브로 공연했다. 첫 번째로 부른 노래는 <부숴 버려!>.
이 노래는 제목처럼 강한 비트를 특징으로 하는 곡이다. 후렴구에 ‘부숴. 부숴. 부숴 버려!’는 따라 부르기 쉬운 가사에 강력한 비트로 관객들에게 꽤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밴드 엔이 <부숴 버려!> 다음에 부른 노래는 <영화처럼….>이라는 곡이었다. 이 곡은 아직 음원 발표하지 않은 따끈따끈한 노래였다.
밴드의 리더인 오창민도 <영화처럼….>을 부르기 전 이 사실을 발언했다. 그러자 객석에서 또 한 번 함성과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람들의 기대 속에 <영화처럼….>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이 곡은 낭만적일 거라는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몽환적이면서 어두운 느낌의 노래다.
태화는 세상에 처음 공개되는 곡이니만큼 정신을 집중해서 노래를 들었다. 태화가 인상 깊게 들은 대목은 이 부분이다.
-영화의 주인공처럼 살고 싶지만, 현실에선 언제나 새드 엔딩.
[태화 군. 아주 가사가 <내 복권 내놔!>와 어울리는구먼.]
[그렇습니다. 영감님. <내 복권 내놔!>의 내용과 어울리는 면이 있습니다. 작품 속에서 박성욱은 복권 당첨을 확인하고 영화와 같은 삶을 꿈꾸잖아요.]
[그렇네. 이 곡의 멜로디와 <내 복권 내놔!>의 작품 분위기…. 잘 어울리네.]
[찰떡궁합이죠.]
[음. 그 이상 표현할 말은 없는 거 같구먼.]
[네.]
밴드 엔은 공연을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몇몇 팬들이 밴드 멤버들에게 다가와 사진 촬영을 요청했고 밴드 엔 멤버들은 사람들의 요구에 맞춰주었다.
태화는 이 모습을 보면서 박상우가 준 정보가 꽤 잘 들어맞았음을 느꼈다. 박상우가 준 정보에 의하면 밴드 엔은 팬에 대한 매너가 괜찮다고 했었다.
태화는 밴드 엔의 주변에 사람들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어느 정도 분위기 정돈이 되자 태화는 밴드 엔 멤버들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공연 잘 봤습니다.”
태화가 밴드 엔 멤버들을 보며 운을 뗐다. 그러자 리더인 오창민이 태화를 보며 말했다.
“사인해 드릴까요?”
“사인보다는 멤버분들하고 사진을 찍고 싶은데요.”
“그러시죠.”
오창민은 밴드 엔의 다른 멤버들을 불러 모았다. 태화가 가운데에 서고 밴드 엔의 멤버들이 태화 주변에 위치했다. 태화는 셀카로 밴드 엔과 사진을 찍었다.
태화는 사진을 찍고 나서 밴드 엔 멤버들에게 고마움의 인사를 전했다.
“고맙습니다.”
밴드 엔 멤버들도 태화에게 인사를 건넸다. 밴드 엔 멤버들은 태화에게 인사를 건네고 나서 버스킹 했던 자리를 떠났다.
[태화 군. 오늘은 그냥 넘어갈 건가?]
[네. 처음부터 덤빌 필요는 없잖아요.]
[그렇긴 하네. 오히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본론을 꺼내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네.]
[네. 저도 그런 판단 때문에 오늘 그냥 지나간 겁니다. 처지를 바꿔서 생각해 보면 저도 기분이 나쁠 건 없지만…. 좋은 것도 없거든요.]
[잘 생각했네.]
#.
얼마 후.
태화는 한재영과 카페 ‘민들레’에서 만났다. 한재영이 다소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태화야.”
“왜? 배급사 잡기가 만만치 않아?”
한재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쉽지 않네.”
“이유가 뭐야?”
“내가 접촉한 배급사는 세 군데야. 세 군데 모두 반응은 비슷해.”
“말해봐.”
“일단 작품은 괜찮게 봤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
“재미에 비해서 연기자나 감독의 네임밸류가 너무 없다는 거야.”
“야. 그럼. 오히려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니냐?”
“작품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네 말이 맞지. 그런데 그게…….”
“흥행적인 측면으로 보면 아니라는 말이지.”
“응. 일반 관객이 영화를 선택하는 기준은 주연 배우가 누구냐. 아니면 감독이 누군지가 중요하거든. 그런데 우리 영화는 감독이나 주연 배우 모두 대중들에게 알려지지가 않았잖아.”
배급사가 영화의 배급을 맡는 기준은 상업적 성공이다. 상업적으로 어느 정도 성공해야 배급사도 먹고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영화의 간판이 중요하다.
영화의 간판은 기본적으로 작품에 출연하는 배우가 된다. 그래서 대중적으로 얼굴이 많이 알려진 배우가 그 영화의 간판이 되어야 상업적으로 유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