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40화
태화는 석무열이 설명한 공간이 궁금해졌다. 이러한 궁금증은 박도봉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태화 군. 무열이가 설명한 그 공간 직접 가 보고 싶지 않은가?]
[네. 당연히 가 봐야죠. 그래도 시사회 공간인데요. 솔직히 놀랐습니다. 혹시 영감님은 이런 장소가 있는 줄 알았습니까?]
[나도 이런 공간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네. 무열이에게 그 공간을 보고 싶다고 부탁해 보게.]
[제 청을 들어줄까요?]
[아마 그렇게 하지 않을까 하는데……. 무열이 성격상 외부인에게 이런 공간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네.]
[그 말의 의미는……. 저에게 시사회 공간을 보여줄 생각을 하고, 그 공간을 언급했다는 의미입니까?]
[그렇네. 그리고 중요한 사실 한 가지가 있네.]
[그게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무열이는 자네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네.]
[저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다고요?]
[그렇네. 난 무열이가 한 사람의 청을 이렇게 여러 번 들어주는 걸 본 적이 없네. 자네에게 흥미가 느끼지 않았다면 진즉에 자네를 끊어냈을 거네. 하지만 무열이는 이번에도 자네의 부탁을 들어주고 있네.]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생각과 어느 정도 일치했다.
“선생님. 혹시 그 공간을 좀 볼 수 있을까요?”
석무열은 태화의 청에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고맙습니다. 선생님.”
“뭐. 당연한 거 아닌가? 시사회로 쓸 공간을 궁금해하는 건.”
석무열은 말을 하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님이 직접 가십니까?”
“왜. 싫은가?”
“싫긴요. 저야 좋죠.”
“좋다? 부담스러운 게 아니고?”
“제가 부담스러울 게 뭐가 있습니까? 이곳 재단의 이사장님이 직접 소개하는 장소라면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말이겠죠.”
“하하. 그렇게 되는군.”
태화와 석무열은 이사장실을 나섰다.
#.
태화와 석무열은 독립영화재단의 건물을 나와 옆 건물로 이동했다. 시사회 공간으로 쓸 공간은 건물 지하 1층에 있었다.
이 시사회 공간은 계단으로 혹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할 수 있었다. 태화와 석무열은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계단을 이용해서 시사회 공간으로 이동했다.
시사회 공간 입구엔 중년의 관리인이 한 명 있었다. 관리인이 석무열을 보자 재빨리 인사를 건넸다.
“이사장님. 오셨습니까?”
“네. 고생 많으십니다. 소극장에 좀 들어가려고 하는데요.”
“네. 알겠습니다.”
소극장 출입문은 지문으로 열 수 있도록 설계가 되어 있었다. 석무열이 자기의 오른쪽 엄지를 지문 인식기에 갖다 대자 잠겨 있었던 소극장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철컥.
석무열이 태화를 향해 말했다.
“들어가지.”
“네. 선생님. 들어가기 전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뭔가?”
“이 공간. 이름이 아직 없습니까?”
“특별한 이름은 없어. 그냥 소극장이라고 부르네.”
“아. 그렇군요. 근데…….”
“왜. 이곳의 이름을 짓지 않았느냐고?”
“그렇습니다.”
“소극장이라고 불러도 충분하기 때문일세.”
“네? 그냥 그건 보통명사잖아요.”
“그게 뭐 어떻다는 건가?”
“네? 보통 이런 공간엔 고유한 이름을 짓잖아요.”
태화가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당연했다. 특정한 공간에 이름을 짓는다는 건 그 공간의 특징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석무열은 소극장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와 스위치를 켰다. 그러자 천장에 설치되어 있던 조명이 켜지면서 소극장의 모습이 드러났다.
소극장은 정말 150석 정도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소극장이었다.
“소극장. 이게 이곳의 이름이야. 말 그대로 작은 극장이니까. 난 굳이 이곳의 이름을 짓지 않을 생각이네.”
“알겠습니다.”
“좀 의외군.”
“뭐가 말입니까?”
“난 좀 자네가 집요하게 물어볼 줄 알았거든. 왜 이 소극장의 이름을 짓지 않는지에 관해서 말이야.”
“그냥.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슨 생각 말인가?”
“선생님이 굳이 이곳의 이름을 짓지 않는 건……. 이곳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각자 의미를 부여하라는 의미 아닌가.”
“음. 바로 그걸세. 이곳을 소극장이라고 이름을 지어도 사람들은 나름대로 이곳의 의미를 부여하지. 그런데 내가 굳이 이곳의 이름을 지을 필요가 있을까?”
“…….”
“난 그렇지 않다고 보네.”
“선생님이 어떤 의미로 말하는지 알겠습니다. 저도 나중에 이곳의 의미를 나름대로 부여하겠지요.”
석무열은 태화의 대답에 슬며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석무열은 언젠가부터 태화가 총명한 청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태화가 했던 대답도 총명하기에 할 수 있는 답변이었다.
“선생님. 잠깐 내부를 둘러봐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게.”
“고맙습니다.”
태화는 석무열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서 소극장 내부를 둘러보았다. 소극장의 내부 구조는 깔끔했다. 소극장 앞 무대가 있는 곳엔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었고 객석의 자리는 계단식 구조로 되어 있었다.
태화가 간단하게 소극장 내부를 둘러본 후 석무열에게 다가갔다.
“구조가 깔끔해서 마음에 듭니다.”
“그런가? 여기가 원래는 연극을 위한 소극장이었지.”
“연극을 위한 공간이요?”
“그래. 그런데 그 극단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이곳도 만들다 말았지.”
“선생님이 이 공간을 인수한 건가요?”
“그렇네.”
“하지만 돈이 만만치 않게 들었을 텐데요.”
태화의 이 질문은 합리적이었다. 아무리 소극장이라도 극장용으로 만들려면 내부 공사로 제법 큰 비용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독립영화재단은 비영리재단이고 그래서 이렇게 큰 비용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
“자네 말이 맞네. 제법 큰 비용이 들었지. 누군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곳을 인수하지 못했겠지.”
태화는 석무열이 누군가의 도움의 받았다는 말에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영감님. 도움을 준 누군가는 아마도 이선영 대표겠지요.]
[내 생각도 자네와 같네. 무열이 성격에 누가 선뜻 도와준다고 나서지는 않았을걸세. 그나마 선영이가 도와주었겠지.]
[아마도 그렇겠죠.]
태화는 어쨌든 이 소극장이 맘에 들었다.
“선생님. 이 공간. 정말 맘에 듭니다. 이곳에서 시사회 진행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
태화가 기술 시사회를 할 공간을 마련하고 나서 얼마 후, 영화 <내 복권 내놔!>는 후반 작업이 마무리되었다.
D.I와 타이틀 자막, 그리고 사운드 작업이 마무리된 상태다. 태화는 기술 시사를 앞두고 한재영과 이우섭 그리고 김현석과 회의를 진행했다.
한재영이 태화에게 말했다.
“태화야. 이번 시사회에 주연 배우들 부를 거야?”
태화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이번에는 기술 시사니까 스태프만 부르자.”
“그래. 그건 내 생각이랑 같다.”
태화가 이우섭과 김현석을 향해 말했다.
“우섭이하고 현석이는 스태프들한테 빠짐없이 연락하고.”
이우섭과 김현석이 동시에 대답했다.
“네. 스태프들에게 빠짐없이 연락 돌리겠습니다. 근데 태화 형.”
“왜?”
“솔직히 이번에 기술 시사 말입니다.”
“응.”
“그렇게 좋은 장소에서 할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예상 밖이었습니다. 저는 그냥 여기 옥탑에서 할 거로 생각했었는데.”
이우섭의 말이 끝나자 김현석이 맞장구를 쳤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솔직히 스태프들한테 미안한 감정이 있었거든요.”
“미안한 감정?”
“네. 형. 그동안 스태프들 고생 많이 했잖아요. 그런데 시사회도 옥탑 같은 데서 하면 좀 그렇잖아요.”
김현석이 말을 마치자마자 한재영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야. 옥탑이 어때서?”
“아. 물론 나쁘지는 않죠. 하지만 나쁘지 않은 게 좋은 건 아니잖아요.”
한재영은 김현석의 대답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현석이 너 제법이다.”
“제법이요?”
“그래. 말 돌릴 줄도 알고. 전 같았으면 어쩔 줄 몰라 했을 텐데.”
“뭐. 그게 다 경험이 쌓여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어쭈. 김현석이. 이제 제법이야.”
태화는 한재영과 김현석의 모습을 보며 절로 웃음이 나왔다.
‘성장한 건 현석이 너뿐만이 아냐.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지.’
#.
기술 시사회 당일.
독립영화재단 소극장으로 사람들이 입장하고 있었다. 소극장 입구에는 태화와 한재영 이우섭과 김현석이 안내하고 있었다.
소극장에 입장하는 부류는 크게 두 부류였다. 한 부류는 영화 <내 복권 내놔!> 스태프로 참석했던 사람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이곳 독립영화재단의 영화 워크숍 수강생들이었다. 이 두 부류가 자리를 채우자 1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도 어느새 꽉 찬 상황이 되었다.
시사회장에 온 사람 중 태화의 관심을 끈 사람은 이한철이었다.
“태화야. 이곳 어떻게 빌렸냐?”
“어떻게 하다 보니 됐네요.”
“시설 좋다. 깔끔하고.”
“네.”
이한철 뒤로 송윤주가 태화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머. 태화야. 축하해.”
“축하는요. 기술 시사회인데요.”
“그래도. 여기까지 온 게 대단한 거야. 계속 단계를 밟아가면 되는 거지. 안 그래?”
보통 기술 시사에서 문제점을 잡아내면 그 문제점을 수정하고 나서 시사회를 한다. 이때 시사회는 스태프가 대상이 아니라 VIP 시사회와 일반 관객 시사회를 하게 된다.
VIP 시사회는 작품의 주연 배우, 영화 제작, 배급사의 관계자, 그리고 언론사 기자들이 주 대상이다.
“하하. 그렇죠.”
송윤주가 인사하고 나서 이번에는 채영준이 태화에게 다가왔다. 채영준이 태화를 보며 활짝 웃으며 말했다.
“결국 시사회 하시는군요.”
“네. 당연히 해야죠.”
“약속을 지키셨어요. 근데 이 장소 생각했던 거 이상입니다.”
“네. 이곳 좋더라고요.”
“네. 감독님. 군더더기가 없고 깔끔하더라고요.”
채영준은 태화와 잠시 이야기하고 나서 소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채영준에 이어서 속속 스태프들이 시사회장으로 입장했다. 거의 마지막으로 도착한 스태프는 유민화다.
태화는 유민화를 반갑게 맞이했다.
“유민화 님. 오늘 오기 힘들 것 같다고 하시더니.”
“그렇긴 했는데 어떻게 오늘 스케줄 맞추게 됐습니다.”
“네?”
“남아 있던 일 그냥 후다닥 해치웠죠.”
유민화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태화는 그녀가 한 말을 실천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지 알고 있었다. 밀린 일을 한 번에 처리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이던가?
그만큼 유민화는 이번 기술 시사회에 오고 싶었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
시사회에 참석하는 인원들이 모두 도착했다. 한재영과 이우섭, 그리고 김현석은 소극장 출입문을 닫았다.
소극장 무대 앞에 태화가 섰다. 태화가 잠시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오늘 여기 참석해 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
“오늘 여기엔 <내 복권 내놔!>에 참여한 스태프 외에 다른 분들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 궁금하시죠?”
객석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네!”
큰 소리로 대답한 사람은 스태프가 아니라 교육생 중 한 명이 낸 소리였다. 이 교육생은 자기의 목소리만 크게 들린 게 머쓱했는지 자기의 얼굴을 앞 의자에 파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