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39화
박지형은 조수 조용우를 친동생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이는 촬영 현장에서 박지형이 조용우를 챙기는 모습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었다. 박지형은 조용우를 살뜰하게 챙겼다.
‘태화도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물론 태화가 이걸 계산하고 나한테 부탁한 건 아니다. 하지만 오늘 이것으로 인해서 박지형 팀장은 태화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될 것이고 마음의 빚을 졌다고 생각하게 될 거야. 박지형 팀장에게 조용우는 친동생 같은 존재니까. 결국 박지형 팀장은 우리 작품을 좀 더 신경 쓸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결과는 전혀 나쁘지 않지.’
한재영은 태화의 제안이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다.
“당연하지.”
한재영이 조용우에게 다가와 말했다.
“퇴근할 때 저랑 함께 가시죠.”
“네?”
“여기 올 때 차를 가지고 왔습니다. 같이 타고 가시죠.”
“아니요. 괜찮습니다. 다른 분들도 타고 가셔야 하잖아요.”
함께 온 이우섭과 김현석 중 이우섭은 눈치가 빨랐다. 이우섭이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저하고 현석이는 이따 약속이 있어서 한 피디님과 같이 이동 못 합니다.”
이우섭은 발언이 끝나고 태화와 눈이 마주쳤다. 태화는 이우섭을 보며 티 나지 않게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는 의미였다.
조용우가 태화를 보며 말했다.
“그럼. 감독님은 어떻게…….”
“네. 저는 한 피디랑 같이 갑니다. 저는 저기 두 사람처럼 특별한 약속이 잡히지는 않았거든요. 저랑 한 피디는 가는 방향도 같고요.”
“아. 네.”
“제가 차에 타도 자리는 충분합니다.”
태화가 박지형을 보며 말했다.
“박 팀장님. 제가 조용우 님 꼭 병원에 들렀다 가게 하겠습니다. 저하고 한 피디가 같이 가니까 어떻게 못 할 겁니다.”
태화의 말에 박지형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거 감독님하고 피디님. 두 분이 동행해 주신다니 안심이 됩니다. 용우. 저 녀석 병원에 잘 안 가려고 하거든요. 아마 두 분이 동행을 안 해주시면 대충 약 사 먹고 버틸 녀석입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남자 둘이 같이 가니 이번에는 그렇게 못 할 겁니다.”
“꼭 좀 그렇게 해주십시오.”
#.
태화와 한재영은 조용우를 병원에 데려다주고 나서 귀가하는 중이었다. 조용우는 박지형의 말과 달리 병원에 순순히 들렀다. 이런 데에는 조용우도 분위기를 대충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감독인 태화가 자신을 손수 챙기고 있었다. 거기에 자기의 사수 박지형도 특별하게 부탁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용우는 본인이 병원에 들르지 않고 집에 가는 건 적절한 행동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조용우가 들른 병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조용우의 집이 있었다. 조용우는 원룸에서 자취하고 있었다. 조용우가 자취하는 원룸 건물은 오래된 건물이 아니어서 다행히 한재영이 차를 대기에 편했다.
조용우는 한재영의 차에서 내리면서 고마움의 인사를 잊지 않았다.
“피디님 고맙습니다.”
한재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네. 어서 들어가서 쉬세요.”
조용우는 이번에 감독인 태화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감독님. 고맙습니다.”
“푹 쉬고 빨리 회복하세요.”
“알겠습니다.”
“조용우 님.”
태화는 순간 다음 말을 하려다가 하지 않았다.
-빨리 회복하셔서. 우리 작품 신경 좀 써주셔야죠.
태화는 이 발언을 가볍게 농담처럼 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과거의 태화였다면 이 발언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태화는 순간적으로 이 발언이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받아들이기에 따라 조용우가 태화의 발언을 부담스럽게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저기. 감독님.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네. 조용우 님. 약 꼭 챙겨 드시라고요.”
“아. 네. 알겠습니다.”
조용우는 태화와 한재영에게 고마움의 인사말을 건네고 나서 본인이 자취하는 원룸 건물로 들어갔다. 한재영은 조용우를 바래다주고 나서 차를 출발시켰다.
한재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오늘 뭐 대단한 걸 한 건 아닌데.”
“왜? 좀 뿌듯해?”
“응. 그런 생각이 드네. 그런데 태화야.”
“왜?”
“정말 끝나가긴 끝나간다. 처음엔 어떻게 이 돈으로 제작하나 싶었는데.”
“그러게, 말이다.”
“근데. 태화 너. 조용우 씨한테 하려고 했던 말 있잖아.”
“그거 왜?”
“건강 회복하고 우리 작품 좀 더 신경 써달라고 하려고 했었지?”
“어떻게 알았냐?”
“어떻게 알긴. 나도 그 말 하려고 했었는데……. 네가 말 다시 집어넣는 거 보고 안 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 안 했다.”
“잘 생각했다. 솔직히 당장 아픈 사람한테 할 말은 아니잖아. 그리고 조용우 씨. 성격에 우리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신경 쓸 테고.”
“하긴.”
#.
며칠 후.
태화는 혼자 독립영화재단으로 향했다. 태화가 독립영화재단을 방문한 건 시사회 장소 협조 때문이었다.
태화는 원래 기술 시사 장소로 카페 ‘민들레’를 생각했었다.
[영감님. 카페 ‘민들레’는 요즘 일요일에 영업하지 않습니다. 그날 빌리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태화 군. 카페 ‘민들레’를 시사회 공간으로 쓰는 거 나쁘지 않은 생각이네. 하지만 그 계획은 일단 플랜 B로 하게.]
[영감님은 다른 생각이 있으신 겁니까?]
[무열이를 찾아가게.]
[석무열 선생님 말입니까?]
[그렇네. 독립영화재단. 그곳은 작게나마 시사회를 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이 되어 있네.]
독립영화재단이 시사회 공간이 준비된 건 그곳의 교육생들을 위에서다. 교육생들은 독립영화재단에서 단편 작품을 만들고 완성된 작품을 본다. 석무열은 이 시사회 공간에 많은 공을 들였다. 영화는 작품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완성된 작품을 보고 즐기는 것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시사회는 가능하면 극장과 비슷한 환경에서 하는 게 좋네. 특히 기술 시사라면 더 그렇게 해야 하네.]
[기술 시사에서 오류를 잡아낼 수도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렇네.]
태화는 독립영화재단 이사장실로 향했다. 태화가 문 앞에서 노크했다.
똑. 똑.
이사장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와요.”
태화는 목소리를 들은 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석무열은 태화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게. 누구신가?”
“잘 지내셨는지요.”
“나야. 그럭저럭 잘 지냈지.”
석무열은 태화에게 손을 내밀었다. 태화는 석무열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태화와 석무열은 간단하게 악수했다. 석무열은 태화와 간단한 악수를 마치고 태화에게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자리에 앉지.”
“고맙습니다.”
“그래. 시사회를 할 공간이 필요하다고?”
“네. 선생님. 일반 시사는 아니고 기술 시사할 공간이 필요합니다.”
석무열은 대답 대신 태화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자 태화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왜 그렇게 쳐다보십니까?”
“너무 예상 밖이라 말일세.”
“예상 밖이요?”
“그래. 난 자네가 작품을 완성할 거란 생각은 못 했네.”
“그래서 더 많이 놀라셨겠죠.”
“그렇네.”
태화는 어제 석무열과 통화했었다. 태화가 작품이 완성단계에 있다는 말에 석무열은 깜짝 놀랐었다.
-정말인가?
“네. 선생님. 제가 무슨 배짱으로 선생님께 농을 던지겠습니까?”
-이거 놀랍구먼……. 자네가 작품을 완성했다니?
“완성이 아니라 완성단계입니다.”
석무열이 태화를 보며 말했다.
“자네의 전화를 받고서 많은 생각이 들었네.”
“무슨 생각 말입니까?”
“내가 자네에게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니었는지 말일세.”
“선입관이요?”
“그렇네. 자네와의 첫 만남. 강렬했지만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거든.”
석무열의 말에 태화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렇긴 하죠.”
“난 자네가 중도 포기할 거로 판단했었네. 아. 오해하지 말게.”
“네?”
“자네의 제작 여건이 너무 열악했기 때문이었으니까.”
“이해합니다.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렇네.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현실의 벽이 눈 앞에 펼쳐지게 되면 대부분 사람은 그 벽 앞에 좌절하게 되지.”
“…….”
“그 현실의 벽이라는 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견고하고 높거든.”
“선생님은 저도 그 벽 앞에서 좌절하는 사람으로 본 거겠죠.”
“그렇네. 하지만 이 판단에 개인적인 감정은 없었네.”
“잘 알고 있습니다.”
“자네. 많이 변했구먼.”
“변해요?”
“그래. 처음엔 공격적이고 나하고 붙자는 그런 모습이었네. 하지만 지금은 여유가 있어 보이는군. 가진 자의 여유 같은 건가?”
“선생님 말씀이 맞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제가 부탁하는 처지입니다. 당연히 선생님께 한판 붙자고 달려들어서는 안 되죠.”
태화의 말에 석무열은 순간 빵 터졌다.
“하하하. 어쨌든 축하하네. 자네의 입봉작이 완성된 걸.”
“아직 완성된 건 아닙니다.”
“그렇게 겸손해할 필요 없네. 시사회 공간을 알아보고 있다는 건 거의 완성된 거나 다름이 없다는 거니까.”
“그럼. 시사회 장소. 빌려주시는 겁니까?”
석무열은 본능적으로 태화와 엮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태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녀석이다. 그런데 난 저 녀석을 거부하기가 싫다.’
석무열이 태화를 거부하려면 얼마든지 거부할 수 있다. 지금도 태화의 부탁에 안 된다고 한마디만 하면 된다.
물론 석무열은 오늘 태화의 청을 거절한다고 해서 태화가 쉽게 물러날 인물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태화는 당분간 석무열을 귀찮게 할 수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석무열이 마음만 먹는다면 태화를 얼마든지 거부할 수 있다. 하지만 석무열은 이상하게도 태화의 요청을 거부하기가 싫었다. 석무열은 오히려 태화가 어떤 작품을 만들었는지 궁금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고맙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있네.”
“네. 말씀하십시오.”
“시사할 때 우리 쪽 교육생도 참관했으면 하는데. 어떤가?”
“뭐. 하는 건 좋은데 그만한 공간이 있습니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독립영화재단은 일 년에 두 번 그동안 교육을 수료한 교육생들이 만든 작품을 한데 모아 시사회를 하기도 한다. 이때는 교육생뿐만 아니라 외부의 사람들도 초대해서 행사를 개최한다. 그래서 그런지 시사회 공간이 작지만, 꽤 알차게 설계되어 있다.
“그래도 소극장 규모는 되니까. 인원수용에 큰 문제는 없을 거야.”
“선생님. 그런 공간이 있었습니까? 저번에 오디션과 리허설 때문에 왔을 땐 그런 공간을 못 봤는데요?”
“이 건물에는 없네.”
태화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네? 그럼 어디에 그런 건물이 있다는 말입니까?”
“옆 건물에 있네.”
“옆 건물이요?”
“그렇네. 이 건물에 그런 공간을 만들기에는 적합하지 않지.”
“어쨌든 그런 공간이 있는 게 다행이긴 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놀랐습니다.”
“그런 공간이 있다는 사실 말인가?”
“네. 그런 공간을 만든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