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138화 (136/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38화

<내 복권 내놔!> 후반 작업은 큰 무리 없이 진행되어갔다. D.I 작업과 타이틀 자막 작업은 생각보다 작업 진전이 빨랐다.

이런 이유는 태화가 중요한 의사결정을 신속하게 내려주었기 때문이었다. 중요한 사안을 빨리 결정을 해주니 실제 작업을 진행하는 유민화나 채영준으로선 시간을 끌 필요가 없었다.

D.I와 타이틀 자막이 어느 정도 완성된 후 태화는 사운드 작업을 위해서 S&I 로 향했다. 이는 사운드 앤드 이미지의 약자다.

이곳은 <내 복권 내놔!> 촬영 때 사운드 업무를 담당했던 박지형 팀장이 근무하는 곳이기도 하다.

태화와 한재영 이우섭과 김현석이 사운드 앤 이미지 사무실에 들어가자 박지형이 활짝 웃으며 반겼다.

“아이고. 이거 정말 오랜만에 뵙는군요.”

박지형의 인사에 태화도 웃으며 대꾸했다.

“네. 그렇습니다. 팀장님은 안 본 사이 머리가 더 길어지신 것 같습니다. 더 찰랑찰랑해진 것 같기도 하고요.”

“하하. 이거 고맙군요.”

“네?”

“이렇게 저의 변화된 모습을 알아채시니 말입니다. 그런데 감독님도 안 본 사이에 더 멋있어진 것 같습니다. 이거 작품보다 감독님 외모가 화제가 되는 거 아닙니까?”

“하하. 과찬이십니다.”

“그럼. 자리에 앉으시죠.”

사운드 앤 이미지엔 박지형이 작업하는 스튜디오 외에 2개가 더 있었다. 스튜디오엔 폴리(Polly) 작업과 대사를 녹음할 수 있는 사운드 녹음실과 이를 통제하는 조정실로 나뉘어 있었다.

태화 일행과 박지형은 현재 조정실에 있었고 녹음실에는 박지형의 조수인 조용우가 있었다. 조용우는 폴리 작업을 위해서 여러 가지 소품들을 세팅하고 있었다.

박지형은 태화 일행이 방문한다는 일정을 알고 이들을 위해서 의자와 음료 등을 미리 준비해 두었다.

박지형이 태화 일행을 보며 말했다.

“일단 자리에 앉으시죠.”

“네.”

태화 일행은 대답하고 나서 준비해 둔 의자에 착석했다. 태화 일행이 자리에 앉자 박지형이 입을 열었다.

“미리 보내 주신 편집본을 봤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잘 나왔더군요.”

박지형의 말에 태화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보셨다니 다행입니다.”

“감독님.”

“네.”

“제가 현장에서 잔뼈가 굵다 보니 촬영 몇 회차 나가면 대충 감이 오거든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현장 경험이 많으시니까요.”

“솔직히 현장에서도 작품이 괜찮게 나올 거로 생각은 했습니다. 그런데 편집본을 보니 제 생각보다 더 잘 나왔더군요.”

“제 생각도 박 팀장님과 같습니다. 오늘 여기 같이 온 스태프도 마찬가지고요.”

순간 태화와 박지형의 눈이 마주쳤다. 박지형의 눈빛은 순수했다.

태화도 알고 있었다. 박지형의 영화에 관한 순수함을……. 박지형은 무엇보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걸.

태화는 박지형이 이런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그의 말이 단순히 예의상 한 말이라거나 마음에도 없는 빈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박지형이 태화를 보며 말했다.

“감독님. 그럼 제가 그동안 작업한 걸 보시죠.”

“알겠습니다.”

박지형이 그동안 작업한 내용은 크게 보면 두 가지다. 하나는 연기자가 대사 치는 부분을 좀 더 명확하게 들리도록 한 부분과 영화의 배경음과 여러 가지 소리를 입히는 사운드 디자인 작업이다.

현재 작업진척도를 보면 배우들이 대사를 치는 장면은 거의 작업이 끝난 상태다.

“박 팀장님. 확실히 작업을 하니까 대사가 더 명확하게 전달이 되네요.”

태화가 그동안 D.I와 타이틀 자막을 할 땐 사운드 작업을 하지 않은 채 작업을 진행했었다. 앞서 두 작업은 적당히 대사나 소리가 들려도 작업하는 데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 후반 작업할 땐 사운드 관련 작업을 가장 마지막에 한다. 하지만 태화는 그 순서와는 맞지 않게 D.I와 타이틀 자막 그리고 사운드 작업을 맞물리며 작업하고 있었다.

그건 현재 후반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스태프들의 스케줄 때문이다. 하지만 태화처럼 작업한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중에 최종본을 출력할 때 종합적으로 작업을 하면 되기 때문이다.

배우들이 대사를 치는 장면은 거의 작업이 마무리가 된 상태였고 꼼꼼하게 작업되어 있어 나무랄 데가 없었다. 태화가 인상 깊게 본 건 작업의 디테일이었다.

영화에서 작업의 디테일이 살아 있는 부분은 심수영이 박성욱 몰래 복권을 훔쳐서 달아나는 장면에서다. 심수영이 몰래 방문을 여는 순간 조용했던 화면에 외부의 소음이 살짝 들어왔다.

[태화 군. 박지형. 감각이 있구먼.]

[그러게, 말입니다. 공간적으로 방 안과 밖은 문이라는 것으로 차단이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문을 여는 순간 그 차단된 공간이 열리는 거죠.]

[그렇네. 차단되었던 두 개의 공간이 열리는 걸 화면만으로 관객들에게 전달하기에는 느낌이 부족할 수밖에 없네. 그럴 때 지금처럼 소리를 이용하면 적절한 방법이 될 수 있네.]

[네. 하지만 중요한 건 소리의 질입니다. 그냥 아무 소리가 아닙니다. 너무나 적절한 소리입니다. 아침이라는 시간대와도 맞고요.]

[결국 프로냐 아니냐는 이런 디테일에서 차이가 나는 것일세. 누가 더 집요하게 만들어내느냐가 중요하지.]

[동감합니다.]

태화는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태화는 바로 박지형에게 질문했다.

“박 팀장님. 이 부분. 심수영이 문을 열 때 소리 말입니다. 너무 좋은데요?”

태화의 발언에 박지형이 살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발언했다.

“감독님이 이 부분을 잡아낼 줄은 몰랐는데요?”

박지형은 순간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아. 이거 미안합니다. 감독님을 무시해서 한 소리가 아닙니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냥 사운드가 작품 속의 시간대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이 사운드를 만들었습니까?”

태화의 질문에 박지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거 나름 노하우라.”

박지형은 처음엔 이렇게 대답하고 슬쩍 넘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박지형은 태화의 표정을 보고 그렇게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태화의 호기심 어린 표정은 천진난만한 소년의 표정이었다. 박지형은 태화의 이런 표정에 자신의 결심이 녹아내리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하. 저런 표정을 지으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박지형은 태화를 처음 봤을 때부터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저런 표정까지 보니 배겨낼 수가 없었다.

“감독님 혹시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어떤 거 말입니까?”

“언제 한 번 제가 옥탑방에 이른 시간에 방문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 기억이 납니다. 그때 새벽에 오셨죠.”

태화는 머릿속이 순간 밝아지는 걸 느꼈다.

“혹시 그날 온 게 이 소리를 작업하기 위해서입니까?”

“네. 현장의 소리가 어떤지 확인해야 하니까요.”

태화는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처럼 디테일한 사운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현장 확인. 그게 비법이었군요.”

태화의 말에 박지형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사운드를 디자인하기 전에 실제로 그 공간이 어떤 사운드가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사운드 디자인은 거기서 출발합니다. 일단 현장을 확인하고 다소 부족한 부분은 보충하는 거죠.”

“이거 박 팀장님께 미안한 마음이 드는군요.”

“네?”

“박 팀장님의 노력을 기억했어야 했는데…….”

박지형은 태화의 발언에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마도 감독님은 여러 가지 생각할 게 많아서 여유가 없었을 겁니다.”

박지형의 말처럼 태화는 촬영하는 동안 정말 여유가 없었다.

“그러니 그렇게 미안해할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이해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감독님은 이미 충분히 저에게 이미 보상했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작품이 괜찮게 나왔으니까요. 그걸로 된 겁니다. 감독님이 작품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

이제 남은 작업은 폴리 작업이다. 폴리는 영화에서 필요한 사운드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소리를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가장 쉬운 예가 영화에서 등장인물이 걸을 때 나는 소리다.

실제로 사람이 걸을 때 소리가 나지만 실제 촬영 때 녹음 하더라도 잘 소리가 잘 잡히지 않는다. 이럴 땐 사운드 작업하는 스태프가 영상을 보면서 등장인물이 움직이는 걸음걸이에 맞추어 걸을 때 소리를 위인적으로 만들어낸다. 이 외에도 영화에서 폴리를 사용하는 경우는 많다.

박지형의 조수 조용우는 폴리 작업을 위해서 녹음실에서 대기했다. 조용우는 사수인 박지형의 지시에 맞춰 폴리 녹음을 진행했다.

폴리 작업은 알게 모르게 힘든 작업이다. 무엇보다 영상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영상에 보이는 장면과 싱크가 맞지 않을 경우 반복 작업을 해야 한다.

작업을 시작하고 얼마 후 조용우의 얼굴엔 힘든 표정이 역력했다. 그건 <내 복권 내놔!> 영상이 롱테이크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긴 시간 영상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조용우가 힘든 표정을 보이자 그 모습을 본 박지형이 작업을 중지했다.

박지형은 녹음실과 연결된 마이크를 켰다.

“용우야. 잠깐 쉬었다 하자.”

“네.”

조용우는 박지형의 지시 후 휴식을 위해서 녹음실 밖으로 나왔다. 태화는 조용우가 밖으로 나오자 그에게 다가갔다.

“조용우 님. 정말 고생이 많으십니다.”

“아닙니다. 하던 일인데요.”

태화는 조용우의 표정을 살폈다.

[영감님. 아무래도 작업은 여기까지 하는 게 나을 듯합니다.]

[그렇네. 조용우가 많이 힘들어하는구먼. 안색이 안 좋아 보여.]

[네. 사람 있고 영화 있지, 영화 있고 사람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자네 말이 맞네.]

태화가 박지형에게 다가와 말했다.

“박 팀장님.”

“네. 감독님.”

“오늘은 여기까지 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네. 아무래도 조용우 님. 컨디션이 좋아 보이지 않아서요.”

“제대로 보셨습니다. 오늘 감기 기운이 좀 있다고 했었는데.”

“그랬었군요.”

“그런데 괜찮으시겠어요? 향후 스케줄이 있을 텐데요?”

“저는 괜찮습니다. 아직 후반 작업이 마무리되지 않아서 조금 시간이 있습니다.”

“이해해 주신다니 다행입니다.”

“당연하죠. 같이 고생한 사람들인데 이해해야죠.”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박지형이 조용우를 향해 말했다.

“용우야. 오늘 일찍 들어가서 쉬어라.”

“팀장님. 전 괜찮습니다.”

“용우야. 말 들어. 감독님도 괜찮다고 했으니까.”

순간 조용우와 태화의 눈이 마주쳤다. 조용우의 표정엔 한 가지 표정이 아니라 두 개의 표정이 합쳐 있었다.

하나는 미안함이고 다른 하나는 고마움이었다. 조용우가 태화를 향해 말했다.

“감독님.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몸조리 잘하세요. 그냥 집으로 가지 마시고 꼭 병원에 들르세요.”

“알겠습니다.”

태화는 말을 마치고 한재영에게 다가갔다.

“재영아.”

“왜?”

“조용우 님. 네 차로 좀 데려다줄 수 있지?”

한재영은 태화의 의도를 알아챘다. 한재영이 보기에 태화의 의도는 순수했다.

그냥 순수하게 조용우라는 스태프를 챙기려는 의도 외에는 없었다. 하지만 이 의도로 나타날 수 있는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