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3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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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는 발언하고 유민화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의 표정은 순간 묘하게 변했다.
[영감님. 유민화의 표정이 살짝 바뀐 듯하군요.]
[그건 나도 느꼈네. 아무래도 유민화가 자네의 발언에 강한 인상을 받은 모양일세.]
[음. 그런가요?]
[유민화는 자네의 말에 강한 인상을 받은 게 분명하네. 누구나 자네처럼 말할 수 있네. 중요한 건 그 말에 얼마나 힘이 느껴지느냐일세.]
[그렇다는 말은 제가 한 말에 힘이 있었다는 말인데요?]
[그렇네. 같은 말이라도 그 말에 힘이 느껴지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네.]
[결국 사람이 중요하다는 말이군요.]
[맞네. 사기꾼이 사기를 칠 수 있는 것도 비슷한 원리라고 할 수 있네. 단순히 그럴듯한 말을 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사기꾼의 말에 놀아나지는 않네.]
[네. 실제 어이없는 말에 사기를 당하는 사람도 꽤 많으니까요.]
[사기꾼은 잘 알고 있는 게지. 자기가 말을 하면 사람들이 신뢰한다는 걸. 그리고 이건 후천적이라기보다는 선천적이라고 할 수 있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유민화는 제 말을 신뢰하고 있다는 말이군요. 그리고 그 바탕엔 제가 있는 거고요.]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네의 매력일세. 자네의 매력이 자네가 한 발언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거네. 그래서 나타나게 될 결과가 무엇일 거 같나?]
[아마도 이 작품을 작업하는 데 좀 더 신경을 쓰겠죠.]
[바로 그걸세. 유민화가 자네를 위해서 좀 더 신경을 쓰게 된다는 것. 그게 중요한 거네.]
[저에겐 환영할 만한 일이군요.]
유민화는 박도봉 감독의 말처럼 태화가 한 발언에 대해서 신뢰하고 있었다.
유민화는 영화 일을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봤다. 그리고 그 사람들 상당수는 이른바 ‘뻥카’를 잘 쳤다. 자신을 과장하고 뭔가 되는 듯 발언했다. 하지만 태화는 달랐다.
태화가 말한 당위의 문제는 어떻게 보면 오만한 발언이다. 반드시 그런 결과가 나온다는 말이지 않은가?
하지만 유민화는 태화의 발언이 오만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자기도 모르게 태화의 말처럼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독님.”
“네. 유민화 님.”
“저도 감독님이 방금 한 발언처럼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요. 그 근거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해주시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유민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 빈말하는 사람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알아요? 어떻게 알죠?”
“제 말을 신뢰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대화하지는 않겠죠. 아마도 유민화 님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감독님 말이 맞아요. 하도 뻥카 날리는 사람을 많이 봐서요. 그런데 왠지 내가 손해 보는 느낌이 드는군요.”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대충 작업할 수는 없잖아요.”
태화는 유민화의 말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하하. 이거 다시 한번 잘 부탁드린다는 말을 드려야겠군요.”
태화와 유민화의 대화를 듣던 이우섭과 김현석은 서로를 보며 활짝 웃었다. 어쨌든 분위기가 너무 좋게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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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와 일행들은 유민화와의 미팅을 끝내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이우섭과 김현석은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큰소리로 웃었다.
그러자 태화가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우섭이하고 현석이는 뭐가 그렇게 좋냐?”
태화의 물음에 이우섭이 대답했다.
“형. 좋은 게 당연하죠. 담당 스태프가 알아서 잘하겠다고 했는데요.”
이우섭의 옆에 있던 김현석이 맞장구를 쳤다.
“우섭이 형이 맞아요. 솔직히 유민화 님 사무실에 들어갈 때부터 얼마나 긴장이 되던지.”
태화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김현석에게 물었다.
“긴장이 됐어?”
김현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형. 유민화. 그분. 포스도 예사롭지 않잖아요.”
“하긴. 눈빛이 예사롭지 않긴 하더라.”
“그러니까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 결국 이 작품을 신경 쓰겠다고 한 거잖아요. 하여튼 태화 형. 대단하십니다.”
“어쨌든 나도 기분은 좋다.”
태화가 이우섭과 김현석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우섭이하고 현석이는 오늘 고생했어.”
이우섭이 태화에게 말했다.
“그럼. 바로 퇴근해 보겠습니다.”
“그래. 조심해서 들어가고.”
“네.”
이우섭과 김현석은 태화와 한재영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 전철을 타러 갔다. 이제 태화와 한재영만 남았다.
한재영이 태화에게 말을 걸었다.
“우섭이하고 현석이가 있는 자리에서 말하지 않았지만. 오늘 정말 기대 이상이었어.”
“기대 이상?”
“그래. 오늘은 첫날이고 솔직히 간 보다가 끝날 줄 알았지.”
“…….”
“솔직히 유민화 컬러리스트는 뭐랄까. 쉽게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자기 주관도 뚜렷하고.”
“자기 주관이 뚜렷하다라……. 이야기해 보니까 그런 것 갈긴 하더라.”
“내가 유민화 컬러리스트를 섭외한 건 상업영화를 하면서도 저예산 영화나 독립영화 작업도 하기 때문이야. 하지만 성격이 좀 독특한 스타일이라.”
“네가 애를 많이 먹었겠어.”
태화가 방금 한재영에게 한 발언은 그냥 예의상 한 발언이 아니었다.
태화가 오늘 본 유민화는 확실히 개성이 뚜렷한 사람이었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설득이 잘되지 않는다.
“그렇긴 하지. 그런데 태화야. 유민화 컬러리스트가 우리 영화의 어떤 점 때문에 수락한 줄 알아?”
“작품이 좋아서?”
“아니. 제작비야.”
“뭐? 제작비?”
“그래. 나도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는데……. 어떻게 보면 이해되는 면도 있더라고. 솔직히 우리 영화 말도 안 되는 제작비로 만든 거잖아. 그래서 궁금했나 봐. 이런 제작비로 만들어진 영화는 과연 어떤 영화일까.”
“하긴. 제작비로만 본다면 호기심을 가질 만하지. 과연 그 돈으로 어떻게 만들었을까? 영화라고 할 만한 걸 만들었을까? 이런 호기심 말이야. 어떻게 보면 상업영화에선 한 회차 촬영비도 안 되는 돈인데.”
“그런데 아까 보니까 살짝 놀란 거 같더라고.”
“그랬겠지. 그랬으니까 감독인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봤겠지.”
“네 말이 맞아. 아까 너하고 유민화하고 대화하는 걸 보면서 안심이 되더라.”
“안심됐어?”
“응. 유민화가 작품에 관심이 있다는 걸 확인한 거니까. 게다가 너한테 신경 쓰겠다고 했잖아. 어느 정도 퀄리티는 보장이 되겠지.”
“하여튼 고생했다. 나도 오늘 만족스러웠다.”
“그랬으면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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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가 D.I 작업과 함께 진행한 건 자막과 타이틀이다. 자막과 타이틀을 먼저 작업하고 D.I 작업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 반대도 가능하다.
자막과 타이틀 작업은 그나마 쉽게 섭외가 된 경우다. 자막 타이틀은 한재영이, 아니, 이한철이 도움을 주었다.
이한철이 친하게 지내는 영화 후배가 자막 타이틀 작업을 하기 때문이었다.
이한철이 촬영이 막바지였던 어느 날 태화에게 제안했었다.
“태화야. 자막하고 타이틀 작업은 나한테 맡겨줘라.”
“형이요? 혹시 아는 데라도 있어요?”
“응. 아는 후배가 얼마 전 사무실을 오픈했어.”
이한철은 다음 말을 하기 전 피식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가 오픈 기념으로 봉사 좀 해달라고 했지.”
“형. 고맙긴 한데……. 그렇게 해도 돼요?”
“그건 걱정하지 마.”
“네?”
“그 녀석 외국에서 공부하고 와서 국내 인맥이 별로 없어. 그래서 내가 살살 꼬셨지. 이번 기회에 가능성 있는 감독이랑 안면 트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이거 한시름 놓았습니다. 요즘 재영이가 약간 과부하가 걸린 상태였거든요.”
“그럴 만도 하지. 지금까지 촬영을 진행해야 했고 후반 작업 스태프도 섭외해야 하니까.”
그때였다. 태화의 등 뒤에서 한재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거 아주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태화는 등 뒤에서 한재영의 목소리가 들리자 깜짝 놀랐다.
“야. 놀랐잖아.”
“누군가 내 말을 하는 것 같아서 말이지.”
“뭐?”
“아까부터 귀가 계속 가렵더라고. 그래서 누가 내 욕을 하나 해서 둘러보던 중이었지.”
“여기서 네 욕을 할 사람이 누가 있냐? 칭찬했으면 했지.”
“뭐. 그거야 모르는 거잖아.”
한재영은 태화와 대화를 마치고 이한철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한철이 형. 고마워요.”
“…….”
“형 때문에 짐을 좀 내려놓을 수 있겠어요.”
한재영은 이한철에게 다가가 자기의 머리를 이한철의 어깨에 기대었다. 이한철이 한재영의 행동에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야. 너 왜 이래?”
“오늘 와서 말인데 형한테 좀 미안하네요.”
“뭐가?”
“태화가 형 섭외한다고 했을 때 내가 엄청나게 반대했었거든요. 그때 일 반성합니다.”
한재영의 말에 이한철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래. 넌 반성 좀 해야 해. 이 녀석아.”
“아주 깊이 반성하겠습니다.”
태화는 이한철과 한재영의 모습을 보며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처음의 염려와는 달리 스태프들이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철이 형. 그럼. 그 후배분한테 자료를 좀 보내줘야겠군요.”
“그렇지.”
“그럼. 제가 타이틀 작업할 수 있게 영화 앞부분하고 몇 개 씬 가편집해서 보내겠습니다.”
태화가 단순히 타이틀이 들어가는 부분만이 아닌 다른 장편도 가편집해서 보내는 건 개략적인 영화 분위기를 전달하기 위해서다. 타이틀도 영화의 중요한 부분이고 영화의 전반적인 느낌을 따라가야 한다.
태화의 말에 이한철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역시. 서 감독. 감각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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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와 한재영은 타이틀 작업을 의뢰한 사무실을 찾아갔다. 오늘 이우섭과 김현석은 개인적인 일로 함께 오지 못했다.
이한철의 후배가 운영하는 사무실은 그리 크지 않았다. 작은 오피스텔 하나를 사무실로 쓰고 있었다.
태화와 한재영이 사무실에 방문하자 이한철의 후배가 두 사람을 반겼다.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이한철의 후배가 명함을 태화와 한재영에게 건넸다. 명함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영상 디자이너 채영준.
태화와 한재영도 채영준의 명함을 받아 들고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서태화 감독입니다.”
“반갑습니다. 한재영 피디입니다.”
채영준은 심한 곱슬머리에 턱수염을 길렀다. 여기에 트레이닝복을 상하 세트로 입고 있었다. 첫인상으로 보자면 쉽게 잊힐 인상은 아니다.
“안으로 들어오시죠.”
“네.”
태화와 한재영은 채영준의 안내를 받아 사무실로 들어왔다. 사무실은 오픈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티가 났다. 사무실 여기저기엔 아직 풀지 못한 짐들이 보였다.
채영준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감독님. 이거 죄송하네요. 아직 짐 정리가 덜 돼서요.”
“아뇨. 괜찮습니다.”
채영준은 태화와 한재영이 앉을 수 있도록 소파에 놓여 있던 짐을 치웠다. 채영준이 짐을 치운 덕에 소파에 태화와 한재영이 앉을 자리가 생겼다.
태화가 자리에 앉으며 채영준에게 말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저희는 괜찮습니다.”
“하하. 이거 혼자 사무실을 쓰니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