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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135화 (133/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35화

유민화는 순간 대화의 주도권이 태화에게 넘어갔다는 걸 깨달았다.

“이거 한 피디님 말처럼 못 당하겠네요.”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한 피디님이 그랬거든요. 감독님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그건 유민화 님이 잘못 보신 겁니다.”

태화의 발언에 유민화는 당황하며 말했다.

“네? 그게 무슨…….”

태화는 당황하는 유민화의 표정을 보며 느꼈다. 유민화는 태화의 말에 감정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이는 유민화가 태화 자신의 페이스에 말려들었다는 걸 의미하고 있었다.

“사실 전 알고 보면 만만한 놈이거든요.”

태화의 말에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던 유민화가 순간 이를 드러내며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참나.”

유민화는 웃으며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태화가 유민화를 향해 발언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네. 말하세요. 감독님.”

“유민화 님도 영화를 봤으니까 어느 정도 느낌이 왔을 거로 생각합니다. 저는 영상의 색을 회색 톤으로 맞췄으면 하는데요.”

태화는 말을 돌리지 않고 바로 직진했다. 이는 태화의 전략적 판단이었다.

보통은 감독과 컬러리스트가 서로 상의를 해가면서 결정을 해나간다. 하지만 현재 태화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우선 유민화는 <내 복권 내놔!>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가 없었다. 태화가 정상적으로 D.I 비용을 지급했다면 모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한재영이 유민화에게 간절히 부탁했고 유민화가 도움을 주기로 한 게 팩트다. 그래서 최대한 유민화의 시간을 뺏지 않는 범위에서 작업을 진행해야 했다.

한재영은 이러한 사실을 태화에게 알렸다. 한재영이 태화에게 이 사실을 알려준 건 며칠 전이다. 태화는 이날 이우섭과 김현석을 부르지 않고 한재영과 단둘이 만났다. 만난 장소는 카페 ‘민들레’다.

“태화야. 컬러리스트는 섭외했다.”

“고생했다.”

“그런데 네가 알아야 할 부분이 있어.”

“아마도 네가 섭외한 컬러리스트가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다는 것이겠지. 안 그래?”

한재영이 태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 정식으로 요청이 들어간 게 아니어서 컬러리스트가 시간을 많이 낼 수 없어. 그냥 짬을 내서 작업을 도와주는 거라고 보면 돼.”

“그러니까 네 말은 나와 그 컬러리스트가 상의할 시간이 없다는 거지?”

“그래. 작업의 효율을 위해서 중요한 건 미리 결정해야 할 거야.”

“알았어.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하여튼 미안하다. 한다고 했는데 현재로선 이 정도가 한계다.”

“야. 그런 말 말아라.”

“…….”

“너 없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어. 지금까지 재영이 넌 그 누구보다 훌륭하게 프로듀서 업무를 수행했어.”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다.”

태화는 한재영에게 상황을 들은 후 중요한 결정을 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며칠 동안 태화는 <내 복권 내놔!>의 색감을 찾기 위해서 어두운 느낌의 영화를 찾아보았다.

[영감님. 영감님 생각은 어떠세요?]

[자네 생각은 어떤가?]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생각한다면 회색 톤으로 가는 게 맞는데…….]

[자네의 생각은 맞지만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네.]

[주의할 사항이요?]

[그렇네. 회색 톤으로 가는 건 좋지만, 자칫 흑백영화처럼 가면 안 되네.]

[그 이유가 뭐죠? 솔직히 전 흑백영화도 하나의 대안으로 생각했었거든요.]

[자네의 질문에 답하겠네. 영상기술이 발전하면서 흑백으로 영화를 제작하는 건 특별한 의도로 만드는 게 아니라면 피하는 게 일반적이네. 그 이유는 현재 관객들에게 흑백영화가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네.]

[관객들에게 익숙하지 않다는 영감님의 말에 공감합니다. 이미 관객은 단순한 흑백이 아닌 다양한 컬러에 익숙하니까요.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니 흑백은 화면이 지루할 거 같아요.]

[그렇게 말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아무래도 화면에 보이는 색의 조합이 단조롭잖아요. 그 단조로움이 관객에게 지루함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네 생각이 맞네. 게다가 이 작품은 롱테이크로 처음부터 끝까지 촬영된 작품일세. 거기에 화면에 보이는 색이 단조롭다면 관객들이 시각적으로 흥미를 잃게 될 가능성이 있지.]

[단순하게 판단할 문제가 아니군요.]

[그렇네. 색은 조합하기에 따라서 무궁무진한 색감을 표현할 수 있네.]

#.

유민화는 태화의 말을 듣고서 영화 한편이 생각났다.

“회색 톤이라면 <씬 시티, 2005년.> 정도를 말하는 건가요?”

“아뇨. 씬 시티는 느낌이 좀 과해요.”

태화는 영상의 색감을 결정하기 위해서 여러 영화를 보았고 <씬 시티>도 그 영화 중 하나다.

태화가 자기의 생각을 유민화에게 말했다.

“제 생각은 영상의 색을 좀 빼고 회색을 가미했으면 하는데요.”

태화의 제안은 며칠간 고민한 결과다. 태화의 제안에 유민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요. 전체가 회색으로 간다면 흑백영화 느낌일 테니 말이죠.”

“제대로 보셨습니다. 이 작품은 흑백영화로 가면 느낌이 살지 않아요.”

“그럼. 감독님이 생각하고 있는 건 뭐죠?”

“제가 생각하고 있는 건 전반적으로 색을 약간 빼고 회색 톤을 섞는 겁니다.”

유민화는 태화가 말한 내용을 곧바로 이해했다.

“알겠어요. 일단 결정이 시원시원해서 좋네요.”

“부탁하는 처지에선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태화의 대답에 유민화는 피식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럼. 일단 샘플로 한 장면 만들어 보죠.”

“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유민화는 바로 컬러 작업에 들어갔다. 그녀는 <내 복권 내놔!>의 일부 영역을 선택한 후에 효과를 걸었다. 유민화는 태화가 말한 대로 영상의 색을 조금씩 빼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색이 빠지자 태화가 유민화에게 말했다.

“잠깐만요.”

태화의 말에 유민화는 잠깐 하던 일을 멈추며 말했다.

“감독님. 지금 이 정도의 색감이 마음에 드나요?”

“네. 전 지금이 딱 좋은데요. 색도 적당히 빠진 거 같고요.”

“그럼. 여기에 회색 톤을 입히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세요.”

태화는 회색 톤을 조금씩 섞어달라고 주문하려고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유민화는 태화가 말하지 않았는데도 태화의 의도대로 작업을 진행해 나갔다.

유민화가 작업하는 동안 이우섭과 김현석은 신기한 듯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모니터를 보았다. 이우섭이 김현석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현석아. 신기하지 않냐?”

“네. 영화의 느낌이 원본으로 봤을 때보다 확실히 달라졌어요.”

“그렇지? 와. 나도 색 보정 작업을 말로만 들어보고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인데 정말 신기하기는 하다.”

그때였다. 한재영이 슬쩍 이우섭과 김현석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얘들아. 중요한 게 뭔지 아냐?”

한재영의 옆에 앉은 이우섭이 물었다.

“뭔데요?”

“중요한 건 원본이야. 원본이 후지면 아무리 색 보정 해도 답이 없다.”

D.I는 후반 작업이다. 다시 말해 촬영 원본을 가공하는 공정이다. 그래서 원본이 후지면 한재영의 말처럼 아무리 후반 작업에서 애를 써도 결과물이 좋을 수 없다.

이우섭이 한재영에게 말했다.

“그럼. 우리 작품은 원본이 좋은 거네요?”

한재영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좋지.”

태화는 한재영과 이우섭 그리고 김현석이 대화하는 내용을 들으며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태화는 세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도 모니터를 집중해서 바라보았다.

태화가 모니터를 보다가 짧고 굵게 외쳤다.

“스톱!”

태화의 말에 맞춰 유민화가 작업을 멈췄다. 태화가 ‘스톱’이라고 외친 건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던 색감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태화 군. 아주 좋구먼.]

[네. 색감이 살아 있으면서도 회색 톤이 영상에 스며들어 있어요. 바로 제가 원하던 그 색감입니다.]

[음. 확실히 분위기가 묘하구먼.]

유민화는 자기가 앉아있던 의자를 돌렸다. 그리고 태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감독님.”

“네.”

“느낌이 묘하네요.”

“어떤 의미죠?”

“무엇보다 화면이 지루하지 않아요. 색감이 흥미롭거든요.”

“저도 유민화 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관객들에게 시각적으로 흥미를 유발하면서도 어두운 분위기가 느껴져요. 지금 이 색감 너무 좋습니다.”

“감독님. 그럼 이대로 작업할까요?”

“네. 그렇게 하셔도 될 거 같습니다.”

“알겠어요. 그런데 너무 결정을 빨리하는 거 아닌가요?”

“네?”

“제가 이렇게 말한 건 그동안의 경험 때문입니다. 처음엔 괜찮다고 했다가 나중에 그 결정을 뒤집는 경우가 많아서요.”

“그런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전 제가 지금 한 판단을 뒤집지 않을 겁니다.”

“정말이죠?”

“그렇게 결과를 뒤집는 사람들도 대부분 처음 했던 결정으로 돌아가지 않던가요?”

태화의 말에 유민화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뭐. 대부분 그렇죠. 근데 감독님.”

“네. 말씀하세요.”

“정말 이번이 첫 작품 맞는 거예요?”

“맞습니다.”

“너무 결정이 신속한 거 같아서요. 물론 방금 결정한 사안이 나쁜 것 같지는 않지만요.”

“뭐. 그냥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방금 결정한 색감은 그냥 눈으로 보자마자 ‘바로 이거구나!’라고 느낌이 왔습니다. 그래서 굳이 시간을 끌 필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다행이군요. 감독님의 생각이 이렇게 확고하니 지금 내린 결정을 뒤집지는 않을 것 같군요. 그럼. 이 색감으로 작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작업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보통은 색감을 잡는 데 많은 시간을 잡아먹는데 감독님은 빨리 결정을 했잖아요. 실제 작업하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저기 감독님.”

“네. 말씀하시죠.”

“근데 이 작품. 자신 있으세요?”

“네?”

“한 피디님의 부탁으로 이 작품에 참여하게 되었지만,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어서는 안 되잖아요.”

“극장 개봉을 말하는 건가요?”

“맞아요.”

태화는 유민화의 심리를 이해했다. 유민화는 프로다. 그런데 자신이 참여한 작품이 극장에 걸리지도 못한다면 그 기분이 어떻겠는가?

“저한테 이 작품의 극장 개봉은 자신감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감의 문제가 아니다? 그럼 뭔가요?”

“꼭 해내야 하는 당위의 문제입니다.”

“당위의 문제라……. 감독님의 방금 대답은 제 예상을 벗어나는 대답이군요.”

“예상을 벗어나요?”

“당위의 문제라는 그 말. 그 말은 자신감을 넘어선 말이잖아요. 자신감은 어찌 됐건 가능성의 영역입니다. 자신감은 잘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 말은 확률의 문제라는 말이기도 하죠. 하지만 당위는 가능성의 범위를 넘어서는 영역입니다. 반드시 그 결과가 나와야 하니까요.”

“네. 이 작품을 하면서 도움을 준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제가 그 사람들에게 보답하는 방법은 이 작품을 극장에 거는 겁니다. 그래서 이 작품을 극장에 개봉하는 게 저에겐 가능성의 영역이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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