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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134화 (132/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34화

사람은 상황에 따라 자신이 가졌던 생각이 바뀌기도 한다. 태화의 이수경에 관한 생각이 그랬다.

[그렇네. 태화 군. 사람의 인연이란 그런 것이지. 전혀 맺어지지 않을 것 같지만 맺어지기도 하고. 반대로 맺어질 거 같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도 많네.]

[그런 관점으로 본다면 저와 영감님의 관계도 마찬가지죠.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 저와 영감님은 일면식도 없었잖아요.]

[그렇네. 사람의 인연이란 그런 면에서 참 놀라운 것이기도 하지.]

[그러게, 말입니다.]

[어쨌든 자네의 초등학교 시절 연애담도 재미있었네. 자네가 어느 정도 도도했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예상 밖이었네.]

[예상 밖이요?]

[학교에서 가장 잘나가는 여학생에게 무관심했지 않은가? 전교생의 주목을 받는 여학생을 그렇게 대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네.]

[그래 봤자 어렸을 적 일입니다. 그리고 아까 말했듯이 아진이가 나한테 관심이 있었는지 전 몰랐어요.]

[그래도 자네였으니까 가능한 일이 아니었겠나? 그러고 보면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가끔 들곤 해.]

[네?]

[누구는 아무것도 안 해도 전교생이 주목하는 여학생이 좋아하고, 누구는 노력해도 안 되고.]

[그 노력해도 안 된 사람이 혹시 영감님입니까?]

태화의 말에 박도봉 감독은 정곡을 찔린 듯 잠시 말이 없었다.

[흠흠.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내가 꼭 그렇다는 건 아니네.]

[아닌 거 같은데요?]

[그래도 난 노력하면 된 케이스네.]

[크크크.]

[왜 웃나?]

[영감님 대답이 너무 재밌는…… 아니, 귀여워서요. 노력하면 된 케이스라니.]

[난 사실을 말했을 뿐이네.]

태화는 순간 길게 하품했다. 뒤늦게 졸음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뒤늦게 술기운이 올라오는 듯했다.

[영감님. 졸리네요. 저 좀 자겠습니다.]

[그러게.]

[영감님도 쉬세요.]

[알겠네.]

#.

태화와 한재영, 그리고 이우섭과 김현석은 강남의 한 사무실을 찾아가는 중이다. 태화 일행이 찾아간 곳은 D.I를 하는 곳이다. 태화가 한재영을 향해 말했다.

“재영아. 고생했다. 네가 어느 정도 작업을 해놨다고 하지만 그래도 컬러리스트 섭외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고생은 뭐.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건데. 그리고 우리 영화. 너만의 영화가 아니야. 내 영화이기도 해.”

“알고 있어.”

“그러니까. 당연히 열심히 해야지.”

태화는 한재영이 대견스러웠다. 한재영은 자기가 한 말처럼 처음부터 <내 복권 내놔!>를 위해서 헌신했다. 그건 한재영이 본인이 말한 것처럼 자기 영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태화 군.]

[네. 영감님.]

[한재영을 프로듀서로 영입한 자네의 판단은 옳았네. 지금 시점에서 생각해 봐도 이 작품에 한재영만 한 프로듀서를 찾기는 어려울 거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재영이 이렇게 본인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바탕엔 자네의 제안이 유효했네. 자네의 제안은 한재영의 욕망과 일치하지.]

[네. 재영이는 제작자가 되기를 원했으니까요.]

[한재영이 단순히 자네의 친구이기 때문에 임무를 잘 수행했다고 판단해서는 안 되네. 한재영 본인의 욕망과 자네의 우정이 합쳐져서 지금의 결과를 낳은 것이네.]

[저도 영감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재영이는 재영이입니다.]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의견에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박도봉 감독은 객관적인 관점으로 한재영을 보고 있었다.

[나도 자네의 의견에 동의하네. 한재영은 친구로 봐도 자네에겐 최고의 친구네.]

한재영은 D.I 사무실이 있는 건물 앞에 섰다.

“여기야.”

한재영이 가리킨 건물은 7층짜리 건물로 2층을 D.I 업체가 사용하고 있었다. 한 건물의 2층을 사용할 정도라면 규모가 영세한 업체는 아니라는 말이다.

이우섭과 김현석은 다소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한재영이 이우섭과 한재영에게 물었다.

“두 사람. 그 표정은 뭐지?”

이우섭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그냥 놀라서 그런 겁니다.”

“놀라?”

“네. 이 정도면 규모가 작은 업체는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어떻게 이런 업체를 섭외했나 놀랐냐?”

“뭐. 꼭 그렇다기보다는…….”

“놀란 거 맞는구먼.”

이우섭이 잠시 망설이듯 대답했다.

“네. 놀란 거 맞습니다.”

이우섭에 이어 김현석이 발언했다.

“정말 끝까지 하기를 잘 결정한 거 같습니다. 이렇게 좋은 구경도 하고요.”

김현석으로선 좋은 구경이라고 말할 만했다. 지금껏 열악한 환경에서 촬영을 해왔기 때문이다.

#.

태화 일행은 사무실 앞에 멈춰 섰다. 사무실로 들어가는 문은 보안 때문에 잠겨 있었다. 한재영이 한쪽 벽에 설치되어 있는 인터폰을 눌렀다.

-누구시죠?

“네. 저는 한재영 프로듀서라고 합니다. 유민화 컬러리스트 만나러 왔습니다.”

한재영이 대답하자마자 열려 있던 사무실 출입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고 태화 일행이 안으로 들어갔다.

사무실의 구조는 다른 사무실과 달랐다. 보통 사무실은 책상이 배치되고 각자의 자리에 파티션이 설치되는 구조로 되어 있지만, 이곳은 컬러리스트마다 각각 하나의 방이 배치되는 구조로 되어있다. 그래서 사무실의 가운데 공간은 아주 협소했다. 테이블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는데 외부에서 손님이 왔을 때 대기하는 장소로 태화 일행은 한재영의 안내에 따라 유민화의 방으로 이동했다.

한재영이 유민화의 방을 노크하자 방문이 열렸다. 유민화는 밤샘 작업을 했는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고 얼굴은 피곤함에 절어 있었다. 여기에 옷도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거기에 검정색 뿔테 안경을 썼는데 이 때문에 더 피곤해 보였다.

그냥 한눈에 봐도 밤샌 모습이었다.

한재영이 유민화를 보자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많이 피곤해 보이세요.”

“아. 미안해요. 좀 급하게 작업하는 게 있어서요.”

“작업은 마무리 지으셨나요?”

“아. 네.”

“그럼. 들어가도 될까요?”

“네. 뭐 들어와요. 약속했는데 들어와야죠.”

“아. 참. 오늘 전에 말씀드린 대로 감독님하고 스태프하고 같이 왔습니다.”

“네. 괜찮아요. 들어오세요.”

한재영이 태화를 보며 말했다.

“들어가자.”

한재영이 가장 먼저 들어가고 그 뒤를 태화가 들어갔다. 태화를 보자 유민화가 태화를 향해 말했다.

“혹시 감독님?”

“네. 맞습니다.”

“한 피디님이 구라친 건 아니네요.”

“네? 그게 무슨?”

“한 피디님이 그랬거든요. 감독님 잘생겼다고.”

“근데 그게 무슨 문제가 됩니까?”

“아뇨. 제가 바랐던 거라.”

“네? 바랐던 거요?”

유민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요즘 사무실에만 처박혀서 일하다 보니 실물을 볼 일이 별로 없었거든요.”

“그래서 만족하십니까?”

“네. 그럭저럭.”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그럭저럭은 되는 거 같아서.”

태화의 대답에 유민화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유민화의 방에는 작업을 하는 장비와 긴 소파가 마련되어 있었다. 소파는 작업을 하러 온 사람들이 편안하게 작업하는 걸 보기 위해서 준비한 물품이었다. 한재영과 이우섭 그리고 김현석이 먼저 자리에 착석했다.

태화는 소파에 앉기 전 책상 위에 놓인 모니터를 보았다. 모니터에는 <내 복권 내놔!> 작업 창에 떠 있었다.

유민화가 작업을 하기 위해서 책상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유민화는 자리에 앉은 상태에서 소파로 방향을 돌렸다.

“작품은 아직 다 보지는 못했어요. 보시다시피 급한 작업이 생기는 바람에…….”

태화가 유민화를 향해 말했다.

“뭐. 괜찮습니다. 급한 거 먼저 하셔야죠. 그래도 절반 이상은 보신 것 같은데요?”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영상을 보니 커트로 나눠서 촬영하지는 않으셨더라고요.”

“네. 혹시 지루하셨습니까?”

태화의 질문에 유민화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요. 흥미롭게 봤습니다.”

“그렇게 봐주셨다니 고맙습니다.”

“확실히 독특하긴 하더라고요. 요즘은 커트를 세밀하게 나누는 게 일반적인데 그렇게 하지 않아서 더욱 인상이 깊었습니다. 감독님 전에 작품을 만들었던 경험이 없다는 게 사실입니까?”

태화는 유민화를 잠시 쳐다보았다. 뿔테 안경 너머로 유민화의 눈빛이 빛났다.

태화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유민화가 단지 예의상 멘트로 말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태화 군. 상대가 간을 보고 있구먼.]

[네. 저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아마도 저에 대해서 잘 모를 테니까요.]

[그렇네. 이럴 때는 정공법으로 나가는 게 좋네.]

[정공법이요?]

[그렇네. 그냥 자네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네. 유민화는 <내 복권 내놔!>를 흥미롭게 본 게 확실하네. 그래서 자네에 관해서 궁금해하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하네.]

[영감님 말이 맞습니다. 작품을 흥미롭게 보지 않았다면 저에 관해서 궁금해하지도 않겠죠.]

[이런 상황에선 자네의 솔직함이 유민화에게 통할 수 있네.]

[한마디로 잔기술을 부릴 타이밍이 아니라는 말이군요.]

[그렇네. 여기서 잔기술은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네.]

#.

태화는 잔기술을 부리지 않고 정공법으로 나가는 게 편했다. 태화가 유민화에게 말했다.

“네. 이번 작품이 저한테는 처음입니다.”

“첫 작품인데 장편이라. 전에 단편을 한 번도 찍어보지 않았고요.”

“그건 사실입니다. 한 피디가 말하지 않던가요?”

“당연히 들었죠. 처음에 한 피디님한테 감독님 이야기를 들었을 땐 망설였습니다.”

“이해합니다. 작품 경험이 없는 사람이 연출한 작품인데 괜히 시간 낭비한다고 생각했겠죠.”

“감독님 말이 맞아요.”

유민화는 말을 마치고 나서 갑자기 태화에게 다가왔다. 그러자 태화가 몸을 살짝 빼며 말했다.

“왜 그러시죠?”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전에 영화를 연출한 어떤 경력도 없는데 이런 작품이 나왔다는 건…….”

“…….”

“천재란 말인데…….”

“아무리 봐도 그렇게 보이지는 않죠?”

유민화가 태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 네.”

“유민화 님이 그렇게 보신 게 맞습니다.”

“네?”

“저. 천재 아닙니다. 좋은 스태프하고 연기자 만나서 작품이 잘 나온 거죠.”

태화의 대답에 유민화가 살짝 당황했다. 유민화가 생각했던 대화의 흐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천재라는 단어는 묘한 단어다. 누구든 ‘당신은 천재야.’라는 말을 듣게 되면 붕 뜨게 된다. 하지만 태화는 유민화가 예상했던 것처럼 붕 뜨는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너무 겸손하신 거…… 아닌가?”

“겸손한 게 아니라 사실입니다. 다들 각자 노력해 준 덕분에 작품이 잘 나온 거죠. 그런 의미에서…….”

태화는 다음 발언을 하기 전 잠깐 뜸을 들였다.

“유민화 님이 잘 해주실 거로 믿습니다.”

“그거야. 당연한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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