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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133화 (131/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33화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이영일이 슬쩍 끼어들었다.

“오. 서태화. 아주 대범해졌는데?”

“대범?”

“그래. 전 같았으면 아마 너 화냈을걸.”

장난기 많은 정승호가 이영일의 말을 바로 받았다.

“영일아. 태화 얘가 그냥 화를 냈겠냐?”

이영일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어떻게 화를 내?”

“아주 불같이 냈겠지. 아마 이 호프집 떠나가라고 소리쳤을 거다.”

“소리만 쳤겠냐? 아마 길길이 날뛰었겠지.”

이영일이 태화를 보며 말했다.

“난 너를 보면 참 대견하다는 생각이 든다.”

“대견?”

“그래. 초등학교 때 너하고 수경이하고 좀 싸웠냐? 근데 그 수경이가 형수가 됐는데도 버티는 거 보면……. 암. 대견하지. 대견하고말고.”

그때였다. 정승호가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나 아직도 생생하다, 태훈이 형 결혼식 때. 태화, 네 표정.”

“내 표정이 어땠는데?”

“뭐랄까? 세상을 다 잃은 표정이라고 해야 하나? 하여튼 결혼식에서 나올 수 없는 표정이었어. 정말 내가 그때 태화 너 껴안아 주고 싶었다니까. 괜히 남자끼리 껴안으면 이상해서 내가 안 한 거지.”

태화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오케이. 내가 슬픈 표정 지은 거 인정.”

“오. 서태화. 오늘 대범한 모습 많이 보여주는데?”

“나도 가끔 형 결혼식 때 찍었던 가족사진 보는데 말이지. 그 사진 속의 내가 슬퍼하는 것 같더라. 그때 승호가 나 껴안았으면 정말 울었을지도 몰라. 크크크.”

“그래서 사람이 약해 보여도 또 강하다는 거 아니겠냐? 결국 적응하잖아.”

“그건 적응했다기보단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냐? 그냥 사는 거지 뭐.”

태화의 말에 성사 멤버들이 순간 빵하고 웃음이 터졌다.

“야.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해라. 흑역사는 이제 다 묻고 싶다. 그리고 이제 나 형수한테 불만 없다.”

정승호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오. 서태화. 이 정도면 대범함을 넘어선 경지인데?”

“오늘 오랜만에 시우 봤는데 너무 예쁘더라. 시우 보고 있으면 모든 감정이 눈 녹듯이 사라져.”

태화는 순간 눈앞에 시우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그러자 태화의 입엔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감돌았다.

“이거 조카 바보 탄생했구먼.”

“인정.”

그때였다. 그동안 조용히 동창들의 말을 듣던 박상우가 입을 열었다.

“태화야. 좀 늦은 감이 있지만 물어볼 게 있어.”

“뭔데?”

“너 왜 영화감독 한다고 한 거야? 나 처음에 그 이야기 들었을 때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야. 연기 안 한다고 영화계를 아예 떠나는 건 좀 아니지 않냐?”

“그래도 난 좀 이해가 안 갔어. 얘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이런 생각도 들었다고. 그래서 네 형수한테 물어봤지.”

“뭐라고?”

“너 제정신인 거 맞냐고.”

박상우의 말에 정승호와 이영일이 킥킥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정승호와 이영일의 행동에 과거 태화였으면 화를 낼 법도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태화는 여유 있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래서 형수가 뭐라고 했는데?”

“다른 말은 없었고……. 그냥 이번에는 좀 다를 것 같다고……. 그런데 오늘 너 보니까 좀 달라진 거 같기도 하다.”

“어떻게 달라졌는데?”

“뭐랄까. 좀 여유가 생겼다고 할까? 그래서 이유가 뭐야?”

“뭐. 이제 희망 고문은 끝내려고. 언제까지 다음번에는 될 거란 기대에 기대서 살 수는 없잖아.”

“…….”

“그리고 영화감독이란 직업이 멋있어 보이더라고.”

“하긴 네가 회사 다닌다고 하면 그것도 좀 이상하긴 하다. 그런데 영화감독……. 잘할 자신은 있는 거냐? 영화감독 되는 거 쉽지 않다고 하던데?”

“그래도 전보다는 낫지 않겠어?”

“그렇다면 다행이고. 솔직히 나도 너 연기 때문에 힘들어하는 거 보기 힘들었다.”

“솔직히 나도 너희들한테 미안했다. 좋은 소식, 한 번 정도는 들려줬어야 했는데.”

“어쨌든 지금 하는 일은 잘되고 있는 거야?”

“뭐. 그럭저럭.”

박상우는 태화가 장편영화 데뷔작을 제작하고 있는 사실을 모르듯 했다.

[영감님. 형수는 제가 장편영화를 만들고 있다고 말하지 않은 듯하네요.]

[음. 아무래도 그런 것 같네. 어찌 보면 적절한 행동이기도 하네.]

[적절한 행동이요?]

[그렇네. 형수는 자네에 관해서 물어보는 친구들에게 어느 정도 정보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굳이 알려줄 필요가 없는 정보는 알려주지 않은 거지.]

[괜히 말했다가 나중에 결과가 안 좋을 수 있으니까 그런 거군요.]

[그렇다고 볼 수 있네.]

태화는 성사 멤버들에게 자신이 장편영화를 제작하고 있다고 이 자리에서 말하지 않기로 했다. 나중에 확실하게 결과로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분위기가 살짝 처지자 분위기 메이커 정승호가 나섰다.

“상우야. 쓸데없는 얘기 그만하고. 너 때문에 분위기 뭐야 인마?”

“야. 가끔 진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는 거지.”

“일단 됐고. 특종 없냐?”

박상우는 초등학교 때도 특종맨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어디서 주워듣는 게 많았다. 그래서인지 박상우는 자기의 적성에 맞게 현재 언론사에 취업 준비 중이다.

“당연히 특종이 있지. 야. 너희들 신아진 소식 들었어?”

신아진은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동창생이었다. 예쁘장한 외모에 쾌활한 성격. 게다가 성적이 우수해서 전교 회장까지 했었던 인물이다.

“상우야, 아진이 미국으로 유학 가지 않았어?”

“승호야. 너 아직 정보 업데이트가 안 됐네.”

“나야 모르지. 네가 모르는데 내가 아냐?”

“내가 최신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야. 뜸 들이지 말고 말해. 인마. 안 멋있으니까.”

박상우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박상우가 지은 표정은 마치 특종을 잡은 기자 같았다.

“얼마 전에 아진이가 귀국했다는 정보야.”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항상 생각했지만, 상우 너 참 대단하다. 넌 그걸 또 어떻게 알아낸 거야?”

“뭐. 알아보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았어. 요즘 SNS가 있으니까.”

“야, 너 뭐 스토킹 같은 거냐?”

“그건 아니고. SNS에 우연히 친구 추천으로 알림이 온 거야. 그래서 봤는데 그 알림의 인물이 바로 신아진이었다 이거지.”

이야기를 듣던 정승호가 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요즘 이상 기후잖아. 혹시 신아진이 귀국해서 그런 거 아냐?”

말을 마친 정승호가 태화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 그러자 태화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건 또 무슨 헛소리냐?”

“옛날에 여인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했잖아. 오뉴월에 서리 내리는 것도 이상 기후지. 암. 이상 기후고말고.”

“크크크.”

입담 좋은 정승호의 말에 이영일과 박영우가 웃기 시작했다. 정승호의 입담이 계속 이어졌다.

“태화야. 너 조심해야 하는 거 아니냐?”

“내가 뭘 조심하냐?”

“야. 이 자식 모른 척하는 거 보게?”

“내가 뭘 모른 척한다는 거야?

“너 기억 안 나냐? 아진이가 너한테 관심 있었잖아. 그때가 6학년 화이트데이였었나? 신아진이 너한테 와서 왜 자기한테 사탕 안 주냐고 화냈었잖아.”

태화는 어렴풋이 그때의 기억이 나는 듯했다.

“그래. 그때 그 일 기억난다. 그런데 그때 난 아무한테도 사탕 안 줬는데?”

정승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 이 자식. 사람 되려면 멀었어.”

정승호의 말에 이영일과 박영우가 다시 킥킥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야. 솔직히 아진이가 나한테 관심 있다고 직접적으로 말한 적 없었다고.”

“참. 이 자식 자기중심적이네. 그때 너 빼고 다른 애들은 알고 있었을걸. 아진이가 너한테 관심 있었다는걸.”

“정말 그랬어?”

태화는 성사 멤버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성사 멤버들은 태화를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난 몰랐지.”

정승호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태화 네가 배가 불러서 그래. 그때 네가 얼굴 믿고 좀 도도했냐?”

“오케이. 인정.”

“물론 지금은 많이 찌그러져 있지만. 크크.”

“그래. 그것도 인정.”

“태화. 너 내가 아는 그 서태화 맞냐?”

“뭐가?”

“무슨 인정을 그렇게 잘해? 예전과 너무 다른데? 오늘 너무 쿨해서 놀랐어.”

정승호의 입장에선 태화의 변화가 느껴질 만했다. 태화에게 지난 몇 개월은 파란만장 그 자체이지 않았는가.

태화는 성사 멤버들이 자기를 놀려먹기 위해서 하는 말들이 오히려 귀엽게 느껴졌다. 예전의 태화는 오늘처럼 쉽게 인정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때론 말싸움이 나기도 했었다.

물론 화해는 바로 했지만…….

“승호야. 설마 아진이가 그때 그 일 복수하겠다고 날 찾아오겠냐? 언제의 일인데.”

“모르지. 인마. 혹시 알아? 그때 일이 마음속 깊은 곳에 상처로 남았을지. 어릴 적 상처 아니냐? 그거 의외로 오래 갈 수 있다고.”

“야. 쓸데없는 얘기 그만해. 복수하러 올 거면 까짓거 오라 그래.”

“오. 서태화. 상남잔데? 근데 무슨 대책은 있고?”

“솔직히 나하고 아진이하고 만날 일이 있겠냐?”

“혹시 모르는 일이잖아.”

태화는 별다른 고민 없이 툭 던지듯 말했다.

“사탕 사주지 뭐.”

정승호는 태화의 대답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야. 졸라 멋진 방법인데? 네 대답에 빈틈이 없어.”

“어렵게 생각할 거 없잖아. 크크.”

“그래, 네 말대로 사탕 사주면 되지. 크크.”

“그럼. 인마.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냐?”

태화는 오랜만에 친구들과 함께한 자리라서 그런지 맥주가 맛있었다. 이런 기분이라면 밤새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을 것 같았다.

태화가 테이블에 놓여있던 자신의 맥주잔을 들었다.

“자, 우리 오랜만에 만났잖아. 맥주나 마시자.”

#.

태화는 성사 모임을 마치고 귀가했다. 태화는 잠들기 전 자신의 침대에 누워 가만히 천장을 응시했다.

태화는 오랜만에 가진 술자리에 술도 많이 마신 편이었다. 그래서 침대에 누우면 곧바로 잠에 곯아떨어질 걸로 예상했다. 하지만 현재 태화의 정신은 잠이 들기는커녕 오히려 또렷했다.

[태화 군. 졸린가?]

[아뇨.]

[역시. 젊다는 게 좋네그려.]

[요 몇 개월 항상 긴장감 속에 살았잖아요.]

[그랬지. 자네의 지난 몇 개월은 다른 사람의 인생에서 몇 년을 산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네. 오늘처럼 그 긴장감을 푸는 것도 나쁘지 않네.]

[영감님 말이 맞아요. 나사를 조이기만 하면 결국 부러지잖아요.]

[오늘 만났던 그 성사 멤버들. 참 재밌는 친구들이더군.]

[네. 좋은 녀석들입니다.]

[나도 자네가 즐거워하는 걸 보니 기분이 좋았네. 내 젊은 시절 친구들도 생각나고……. 그런데 자네가 친형 결혼식 때 그렇게 슬퍼했는지 몰랐었군. 자네가 형수와 좀 불편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뭐 지난 일이죠. 저도 그때 왜 그랬나 생각하면 웃긴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그땐 좀 유치했죠. 내가 그렇게 한다고 달라질 것도 아니었는데. 지우 보면 형하고 형수가 잘 만난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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