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32화
태화는 김현석의 대답을 듣고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현석이 말이 맞는다. 인생에서 첫 번째는 언제나 중요하지. 내 생각이 짧았다.”
태화의 말에 김현석이 순간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닙니다.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 없어요. 아마 나라도 태화 형처럼 생각했을 거예요.”
김현석이 말을 마치가 이우섭이 바로 발언했다.
“저도 현석이 생각이랑 같아요. 저랑 현석이는 형을 믿거든요.”
“그렇게 이해해 줘서 고맙다.”
태화는 발언하고 나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화가 이런 반응을 보인 건 순간 어떤 감정이 밀물처럼 밀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아. 가슴이 벅차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일까? 우섭이하고 현석이는 나에게 신뢰를 보내고 있다. 내가 이렇게 사람들에게서 신뢰받은 적이 있었던가?’
태화는 <내 복권 내놔!> 작품을 준비하고 만들어가면서 자기의 능력이 발전해 나가는 걸 느꼈다. 하지만 태화 자신이 누군가에게 이렇게 신뢰받기는 처음이었다.
태화에게는 한재영의 존재가 있다. 하지만 태화와 한재영의 관계는 우정에 바탕을 둔 관계에 가깝다.
박도봉 감독은 태화가 순간 왜 뜸을 들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박도봉 감독 자신도 전에 느꼈던 감정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사람들에게 뭔가 믿음을 준다는 존재인 게 얼마나 가슴이 떨리는 일인가?
[태화 군. 가슴이 벅차오른 모양일세.]
[네. 영감님. 신뢰를 받는다는 게 이런 기분이군요. 솔직히 부모님도 절 신뢰하지 않았는데요.]
[누군가에게 신뢰받는다는 건 어려운 일이네. 내 기준으로 신뢰받는 사람은 최소한 두 가지를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네.]
[두 가지요?]
[그렇네. 하나는 인간적인 매력이 있어야 하네. 그 사람에게 호감이 생기지 않으면 아예 신뢰할 생각을 하지 않게 되지.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바로 능력일세. 저 사람은 뭔가를 해줄 거라는 그 생각이 저절로 생겨야 하네. 이 두 가지가 합쳐져서 신뢰라는 것이 생기게 되는 것이네. 자네는 <내 복권 내놔!> 작품을 만들면서 자네의 매력으로 사람을 모았고 자네의 능력을 사람들에게 조금씩 증명해왔어. 가장 가까이서 자네를 보아온 이우섭과 김현석이 자네에게 신뢰를 보내는 건 당연하네.]
[어쨌든 기분은 좋지만, 한편으론 마음이 무거워지는군요.]
[자네도 이제 책임감을 본격적으로 느끼기 시작했구먼.]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좋은 현상일세.]
[좋은 현상이요?]
[그렇네. 책임감을 느낀다는 건 책임을 질 위치에 있어서이기도 하네. 자네는 작품을 책임지는 감독이지 않은가?]
[맞습니다. 전 작품을 책임져야 할 감독입니다.]
태화가 한동안 말이 없자 한재영을 비롯해 이우섭과 김현석이 의아하게 태화를 바라보았다.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금 이 표정은 뭐야?”
태화의 발언에 한재영이 바로 반응했다.
“너 같으면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데 의아한 생각이 안 들겠냐? 이렇게 좋은 날 말이야.”
“그냥. 잠깐 생각 좀 했지.”
“생각? 무슨 생각?”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
“그렇긴 하지. 우리 영화가 극장에 개봉하려면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을 거야.”
태화가 한재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재영이 말이 맞아. 그래도 만들어내야겠지. 그동안 우리 영화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노력이 헛되게 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결과를 만들어내야지.”
태화의 말이 끝나자 이우섭이 맞장구를 쳤다.
“그거야 당연하죠.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요. 안 그래 현석아?”
“맞아요. 이 정도까지 왔으면 뭐라도 결과가 나와야죠.”
태화는 각자의 술잔을 살폈다. 어느새 이우섭의 잔에도 술잔이 채워져 있었다. 태화가 잠시 생각하는 사이 한재영이 이우섭의 잔을 채워주었다.
태화가 한재영, 이우섭 그리고 김현석을 보며 말했다.
“다들 잔에 술이 찬 거 같은데 한잔하자.”
태화가 잔을 들자 다른 세 사람도 각자의 잔을 들었다. 한재영이 태화를 향해 말했다.
“태화야. 한마디 해야지.”
“그래. 다 필요 없고 우리 영화 극장 개봉 간다!”
#.
얼마 후.
촬영이 끝난 후 태화의 일상에도 변화가 있었다. 우선 태화는 한재영의 옥탑방을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후반 작업을 할 땐 굳이 합숙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태화는 한재영의 옥탑방에서 기본적인 컷 편집 작업을 했다. 컷 편집 작업을 할 땐 이우섭과 김현석도 참여했다.
이우섭과 김현석은 컷 편집에 참여하면서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자신들이 준비했던 것들이 어떻게 영상으로 구현되었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태화는 컷 편집이 끝내고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를 보았다. 태화가 한재영을 비롯한 스태프들에게 물었다.
“다들 본 소감이 어때?”
이우섭이 먼저 대답했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잘 나온 느낌입니다. 재미도 있고요.”
이우섭에 이어 김현석이 자신의 감상평을 말했다.
“저도 우섭이 형하고 비슷해요. 스토리도 재밌고요. 특히 컷을 나누지 않고 가서 어떻게 나올까 궁금했는데 괜찮게 나온 거 같아요.”
태화가 마지막으로 한재영에게 물었다.
“재영이는?”
“내 의견도 두 사람의 의견과 비슷해. 그럼 D.I로 들어가자.”
한재영의 의견에 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김현석이 궁금한 표정으로 태화에게 물었다.
“근데 D.I가 뭐예요?”
“D.I가 뭐냐면.”
D.I(Digital Intermediate)는 영화 후반 작업에서 디지털 색 보정 작업을 의미한다. 보통 영화 촬영을 하고서 결과물을 보면 일관된 색감으로 영상이 찍히지 않는다. 그건 촬영 때마다 여러 변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관된 색상 톤으로 맞춰주는 작업이 필요한데 이런 작업을 D.I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D.I를 전문으로 하는 스태프를 컬러리스트라고 부른다.
태화의 설명에 김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런 의미였군요.”
한재영이 태화를 보며 말했다.
“태화야. 일단 이 편집본 내가 좀 쓸게.”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한 피디는 이미 작업을 시작했구먼.”
“당연한 거 아니냐? 얼마 전부터 컬러리스트 한 명 섭외해 놨지. 그 컬러리스트도 우리 영화에 관해서 관심이 좀 있는 거 같더라고.”
한재영은 자신의 직책인 프로듀서의 업무에 충실하게 임하고 있었다. 프로듀서 임무 중 주요한 임무인 주요 스태프 섭외는 후반 작업에도 중요하다.
태화가 한재영을 보며 말했다.
“그런 일 때문이라면 언제라도 환영이지.”
#.
태화는 요 며칠 오랜만에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태화는 여유롭게 동네 산책을 하고 자기가 좋아하던 한강 공원에서 여유도 만끽했다. 그리고 조카 지우와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지우는 오랜만에 삼촌을 봐서 그런지 태화를 보자마자 꺄르르 웃으며 태화를 반겼다. 태화는 지우를 두 손으로 번쩍 들어서 자기의 품에 안았다.
태화의 품에 안긴 지우에게선 기분 좋은 아기 냄새가 났다.
“삼촌도 지우 많이 보고 싶었어요. 지우도 그랬어요?”
지우는 삼촌인 태화의 귀에 대고 웃었다.
“헤헤.”
태화는 지우의 이 웃음소리가 ‘나도요’로 들렸다. 이 때문일까?
태화는 지우가 미칠 듯이 귀여웠다. 그래서 태화는 자신의 볼을 지우의 볼에 가볍게 비볐다. 그러자 지우가 꺄르르 웃었다.
지우의 모습을 본 태화의 형수 이수경이 태화를 향해 말했다.
“지우가 정말 삼촌을 오랜만에 봐서 기분이 좋은 모양이네요.”
태화는 이수경의 말을 듣고 자기의 품에 안긴 지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우야. 정말 삼촌 오랜만에 만나서 기분이 좋은 거야? 그런 거야?”
“헤헤헤.”
“삼촌도 지우 오랜만에 만나서 너무 기분이 좋지요. 하하하.”
몇 시간 후.
태화는 조카 지우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형인 서태훈의 집을 나섰다. 서태훈은 태화에게 저녁을 먹고 가라고 말했지만, 태화는 사양하고 서태훈의 집을 나섰다.
“형. 나 저녁에 약속이 있어. 밥은 다음에 먹고 가지 뭐.”
“그래. 알았다. 태화야.”
“왜?”
“오늘 얼굴 좋아 보인다.”
“얼굴이 좋아 보인다고? 나 요즘 피부가 좀 거칠어진 거 같은데?”
서태훈의 태화의 말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의미가 아니고 표정이 좋아 보인다고.”
“아. 표정.”
“보기 좋다. 태화야. 하는 일은 잘 돼가냐?”
“잘 돼간다는 보다는 결과를 만들어내야지.”
“결과를 만들어낼 자신은 있고? 표정을 보니 어느 정도 자신은 있는 거 같은데?”
“아직 뭘 말하기는 일러.”
“그래. 넌 잘해낼 거야.”
“알았어. 나, 가 볼게.”
“그래. 조심해서 가.”
“응.”
#.
태화는 오늘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초등학교 동창 친구들을 호프집에서 치맥을 하기로 했다. 이 만남은 정식 동창회의 형식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태화와 가까운 동네에 사는 동창의 모임이다.
태화를 포함한 이들 동창생은 스스로 성사라고 불렀다. 성사는 성원초등학교 사인조의 약자다. 이 성사의 멤버는 태화를 포함해 정승호, 이영일, 박상우다.
예전에 성사의 멤버들이 자주 만났지만, 현재는 그렇지 않다. 각자 미래에 대한 준비 때문이다.
성사의 멤버 중 한 명인 정승호가 태화에게 말을 걸었다. 정승호는 성사 멤버 중 입담이 좋아서 이렇게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선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했다. 재밌는 입담 때문인지 정승호는 여자들도 꽤 따르는 편이었다.
“태화야. 너 연기 관뒀냐?”
태화는 정승호의 말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나 너한테 말한 적 없는데?”
“어떻게 알았겠냐?”
태화는 대충 어떻게 돌아간 상황인지 감이 왔다.
“형수가 말했냐?”
“응.”
“그럼. 내가 뭘 하고 하는지도 알겠네?”
“그렇지.”
“당연히 승호 너 말고 영일이하고 상우도 알 거고?”
“그렇다고 봐야지. 우린 또 이런 정보 공유하잖아. 근데 너 삭발도 했었다며?”
“참 정보 한번 빠르다.”
“우리가 예전처럼 정보가 빠르지 않아. 왜 그런지 알잖아. 정보가 좀 느려도 네가 이해해라.”
“그래. 했었다.”
“아깝다. 삭발한 네 모습 봤어야 했는데.”
태화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이랑 큰 차이 없으니까 신경 꺼라.”
“오. 자신감 쩌는데?”
“자신감이 아니라 사실 아니냐?”
“아주 그냥 잘났지.”
순간 정승호가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태화 너, 네 형수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마라. 우연히 길에서 만나서 네 소식을 살짝 물어본 거뿐이니까.”
태화는 언제부턴가 동창들에게 연기와 관련된 일을 말하지 않았었다. 동창들도 굳이 태화에게 연기 관련해선 묻지 않았다. 하지만 태화에게 직접 묻지 않는 거지 다른 사람을 통해서 소식을 듣는 것까지 하지 않겠다는 건 아니었다. 친한 동창의 소식에 관해서 궁금해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야. 됐다. 나 그걸로 뭐라고 할 정도로 좀생이 아니다.”
“그럼. 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