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31화
크랭크 업 한 날 저녁.
태화와 한재영 그리고 이우섭과 김현석은 옥탑에 평상에 모여 앉았다. 크랭크 업 한 날치고는 아주 조촐한 자리다. 일반적이라면 모든 스태프가 모이는 술자리를 해야 하는 게 맞다. 소위 말하는 옥탑방 멤버만 이렇게 모인 건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그건 며칠 전 철거 예정지 촬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밥차를 준비한 우한수는 삼겹살도 준비를 해왔다.
삼겹살을 본 사람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말을 던졌다.
-야. 이거 제대로인데?
-이거 오늘 날 잡은 건가?
스태프들의 반응을 본 한재영은 이때다 싶었다.
한재영은 슬쩍 우한수에게 다가왔다.
“선생님. 이왕 이렇게 삼겹살도 있는데 술도 한잔하는 게 어떨까요?”
태화는 한재영의 제안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한재영의 이 제안은 분명 나쁘지 않았다. 영화 전체에서 가장 촬영하기 힘든 부분이 철거 예정지 촬영이었고, 그 촬영은 무사히 끝난 상황이었다. 그래서 스태프들 기분이 다들 들뜬 상황이었다. 여기에 촬영도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안도감이 더해지면서 스태프들은 그냥 밥만 먹기엔 조금 아쉬운 기분이 들었던 터였다.
한재영 처지에서도 따로 술자리를 만들기보다는 지금 이 분위기 속에서 술을 곁들이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한재영이 여기서 술자리를 제안하는 데에는 이런 이유 외에 또 있었다. 여기서 술자리까지 하게 된다면 촬영이 끝나는 날 의례로 하게 되는 회식을 굳이 할 필요가 없게 된다.
며칠 전에 자리를 가졌는데 굳이 또 회식을 가질 필요가 없지 않은가?
촬영이 끝난 것이지 아직 영화가 완성된 게 아니다. 영화가 완성되려면 후반 작업을 해야 하고 그에 따라 진행비가 나갈 수밖에 없다. 한재영으로선 제작비를 아낄 수 있을 때 아끼는 게 중요했다.
태화도 한재영의 이런 속내를 알고 있었고 한재영에게 힘을 실어주어야겠다고 판단했다. 제작비 부담이 곧 태화의 부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영감님. 아무래도 재영이의 제안이 관철되도록 하는 게 좋겠죠?]
[특정 사안을 판단할 땐 항상 명분과 실리를 따져봐야 하네. 명분이란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반드시 해야 할 거라고 한다면 실리는 이득을 따지는 것일세. 지금 상황에선 명분보다는 실리를 쫓아가는 게 좋네.]
[제 생각도 영감님과 같습니다. 제가 여기서 재영이의 제안을 반대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명분이란 게 없습니다. 하지만 재영이의 제안에 힘을 실어준다면 제작비 절감이라는 현실적인 이득이 생깁니다. 게다가 우 선생님이 삼겹살을 준비한 것도 그냥 한 것 같지는 않으니까요.]
[그렇네. 우한수는 연륜이 있는 사람일세. 그냥 삼겹살을 준비하지는 않았을 걸세.]
태화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우한수에게 말을 걸었다.
“한 피디의 제안이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스태프들도 술 생각이 있는 것 같고요.”
“음. 그런가요?”
“네. 솔직히 선생님께선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삼겹살을 준비해 주신 거 아닙니까?”
“감독님. 그렇게 생각하세요?”
“네. 우 선생님께선 며칠 전 저한테 물어보셨지요. 오늘 촬영이 막바지 촬영 아니냐고. 그때 그냥 물어본 거 같지는 않고……. 확인차 저한테 물어본 거 아닙니까?”
태화의 말에 우한수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감독님. 이거 딱 걸린 거 같은데요?”
“그럼. 한 피디에게 술 준비시키겠습니다.”
우한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그렇게 하세요.”
태화는 우한수의 대답을 듣고 나서 한재영에게 고개를 돌렸다. 한재영의 얼굴엔 미소가 감돌았다. 만약 우한수 같은 연장자 앞이 아니었다면 한재영은 과하게 기쁨을 표현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한재영은 자제하고 있었다.
태화는 한재영에게 말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한재영이 재빨리 행동에 나섰다.
한재영은 이우섭과 김현석을 불렀다.
“우섭이하고 현석이는 나하고 편의점에 가자.”
이우섭이 한재영의 말에 대꾸했다.
“혹시. 술 사러 가는 겁니까?”
이우섭의 대답에 한재영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 눈치가 제법 돌아가는데?”
“하하. 이 정도야 기본이죠. 저도 삼겹살 보니까 술 생각나더라고요. 현석이 너도 그렇지?”
“네. 저도 술 생각나더라고요. 오늘 분위기도 좋잖아요.”
김현석의 말에 한재영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좋아. 빨리 갔다 오자.”
한재영과 이우섭, 그리고 김현석은 한재영의 차에 탑승했다. 철거 예정지와 편의점은 거리가 꽤 되는 데다가 술 몇 병 사 오는 거로는 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한재영 일행과는 별개로 태화와 우한수는 대화를 이어갔다.
“선생님. 이렇게 영화에 관심을 두시고 스태프들도 챙겨주시니……. 저로선 정말 고맙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감독님.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내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요.”
“아. 네.”
“이런 말 하기 좀 뭐하지만……. 저는 감독님이 마음에 듭니다.”
“네?”
“감독님은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여기까지 왔습니다. 솔직히 저도 감독님이 여기까지 올 수 있을지 반신반의했었거든요.”
“혹시 선생님 촬영이 오지 않을까 걱정하셨습니까?”
태화의 말에 우한수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뭐. 그런 점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게다가 주연 여배우까지 교체되는 상황에서 여기까지 왔다는 게 정말 믿어지지 않더군요.”
“제가 선생님을 불안하게 했군요.”
“불안하게 했다기보다는……. 그런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어쩔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은 했습니다.”
“어쩔 수 없다라…….”
“감독님. 제가 방금 한 말에 너무 신경 쓰실 필요는 없어요. 사람은 무언가를 하고 싶지만 여건상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태화는 우한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작품을 만들면서 겪은 시련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감독님은 여기까지 왔습니다.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말이죠.”
“하지만 저 혼자의 힘으로는 힘들었을 겁니다. 여기 스태프들과 연기자들이 열성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죠.”
우한수는 태화가 방금 발언한 말을 듣고서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감독님 말이 맞아요. 하지만 좋은 리더 없이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여기까지 오기는 힘들죠.”
“과찬이십니다.”
“감독님.”
“네.”
“내 나이쯤 되면 젊은 사람이 뭔가에 도전하고 그걸 성취하는 모습을 볼 때 괜히 뿌듯하고 그래요. 그러니까 너무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요. 그리고 오늘 밥차 공짜는 아닙니다.”
“네?”
“감독님을 포함해서 여기 있는 사람들 테스터들 아닙니까?”
“아. 그게 그렇게 되는 거군요.”
태화와 우한수는 동시에 빵하고 터지고 말았다. 태화는 웃으면서도 우한수에게서 범상치 않음을 느꼈다.
[영감님. 우 선생님. 뭔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군요.]
[태화 군. 우한수라는 인물에 관해서 궁금한 모양이군.]
[분명히 저분의 선의는 느껴져요. 하지만 그것만이 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나도 자네와 비슷한 걸 느꼈네. 하지만 서두르지 말게나. 자네가 궁금해하는 것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날이 있을 테니.]
[그렇게 될까요?]
[뻔한 말이지만 만날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되어 있네.]
[그럼. 이 궁금증은 당분간 억눌려야 하겠군요. 전 제가 해야 할 일들을 할 겁니다.]
[그게 정답일세.]
얼마 후 한재영이 자기의 차에 사람들이 마실 술을 사서 돌아왔다. 한재영과 이우섭 김현석이 차에서 술을 꺼내자 현장의 사람들 사이에선 환호성이 터졌다.
#.
옥탑 평상에 모인 태화를 포함한 네 명은 즐겁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네 사람은 병맥주와 소주를 섞어서 마셨다. 태화가 이우섭과 김현석의 빈 잔을 채워주었다.
태화는 이우섭과 김현석의 잔을 채운 후 말을 꺼냈다.
“두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이우섭이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현석이도 함께 들어.”
태화의 말에 김현석이 대답했다.
“네. 형.”
태화가 이우섭과 김현석을 보며 말했다.
“내 말 오해하지 말고 들어. 알았지?”
이우섭과 김현석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이제부터 두 사람을 풀어주려고 해.”
이우섭이 태화의 말에 바로 반응했다.
“풀어주다니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야. 현재 촬영은 다 끝난 상황이잖아. 앞으로 남은 건 후반 작업이야. 그 말은 촬영할 때보다 일정이 빡세지는 않다는 의미이기도 해.”
태화의 말처럼 연출 스태프는 촬영이 끝나면 본래 수행해야 할 업무를 다 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후반 작업은 후반 작업을 하는 스태프와 감독 간 업무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편집과 C.G, 그리고 사운드 작업 등은 하나의 전문 영역이고 이들은 감독과 상의하에 후반 작업이 진행된다. 연출 스태프가 촬영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한 영역이라면 후반 작업 스태프는 그 결과물을 재가공하는 역할이다.
실제 연출 스태프가 후반 작업에서 할 수 있는 영역이 많지 않다. 후반 작업에서 연출 스태프는 업무보다는 배움의 영역이 크다. 연출 스태프는 자신이 촬영을 위해서 준비했던 것들의 결과물이 어떻게 나왔는지 차분하게 보면서 리마인드할 수 있다.
“만약 너희가 촬영 스케줄 때문에 미뤄두었던 일이 있었다면 이제부터 해도 된다는 의미야. 별 뜻은 없어.”
이우섭과 김현석은 태화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태화가 이우섭과 김현석에게 오해하지 말라고 했지만, 태화의 발언은 오해를 사기에 충분했다. 얼핏 들으면 너희가 할 일은 다 끝났으니 인제 그만 빠지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태화는 이렇게 발언하지 않고 다르게 말할 수도 있었다.
빈말이라도 두 사람은 끝까지 함께 가자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태화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우섭이하고 현석이는 나한테 특별한 사람들이야. 내가 경력도 없고 부족한 것투성이였지만 두 사람은 처음부터 나를 믿고 따라주었어. 함께 어려움도 헤쳐왔고…. 그래서 나는 그런 너희들을 억지로 잡을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나한텐 이 작품만큼 두 사람의 앞으로 계획도 중요하다고 판단했어.”
이우섭은 태화의 말을 듣자마자 맥주잔에 든 술을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이우섭은 술잔을 하나 깨끗하게 비우고 나서 말했다.
“전 끝까지 갑니다. 당분간 별다른 계획도 없고요.”
이우섭이 발언하고 나서 김현석이 말했다.
“근데 대답하기 전에 술잔을 비워야 하는 건 아니죠?”
김현석의 말에 태화를 비롯한 세 사람은 순간 웃음이 터졌다. 태화가 김현석에게 말했다.
“그래. 굳이 술잔을 비울 필요는 없어.”
김현석은 잠시 술잔을 만지작거리다가 자기의 생각을 말했다.
“제 생각도 우섭이 형과도 같아요. 항상 첫 번째가 중요한 거 아닙니까?”
태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김현석의 말을 들었다.
“이 작품은 저한테 첫 작품입니다. 그래서 아주 중요해요.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