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30화
잠시 후 최수빈이 촬영 준비를 마치고 옥탑방 문을 열고 나왔다. 태화가 최수빈에게 다가갔다.
“어때 기분이?”
“어떤 기분?”
“네가 마지막을 장식하는 거잖아.”
“글쎄……. 그런 생각 안 해봤는데?”
“…….”
“그래도 해보라고 하면……. 음…….”
최수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좋지 뭐.”
“그래. 좋다고 말하는 것. 그것만 한 소감은 없지. 그런데 수빈아.”
“왜?”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어.”
“뭔데?”
“다치지 말아야 한다.”
최수빈은 태화의 발언에 살짝 놀랐다. 태화가 방금 한 발언은 최수빈 자기의 예상과 빗나가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이거 의외인데?”
“뭐가?”
“난 네가 이런 발언을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거든.”
“그럼. 내가 뭐라고 말할 거로 생각했는데?”
“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건 여기까지 같이 온 사람들을 위해서다.”
“나도 그런 말을 생각 안 했던 건 아닌데…….”
“그런데?”
“그런 말은 너도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잖아.”
“나도 너한테 할 말 있어.”
“뭔데?”
“이번에 내가 펼칠 연기. 선혜영 님이 했던 연기대로 하려고 해.”
“뭐?”
태화는 최수빈의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태화로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발언이었다.
“왜 그렇게 놀라?”
“놀라는 게 당연하지.”
“선혜영 님. 내가 직접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내가 그분 때문에 기회를 얻은 거니까.”
“그래서 선혜영 님이 촬영했던 부분 보여달라고 했던 거였어? 단순히 참고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그래. 내가 만약 선혜영 님이라면 어떤 생각이 들까? 이런 생각이 들었어.”
“음.”
태화는 최수빈의 제안에 바로 즉답하지 않았다.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선의가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그렇지 않게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태화 군. 최수빈이 제안한 건 나쁘지 않은 생각일세. 영화를 제작한다는 게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지만 또한 그 과정에서 현실의 이야기가 만들어지기도 하네.]
[현실의 이야기라.]
[그렇네. 자네도 이 작품을 연출하면서 자기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지 않은가? 최수빈에게도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줄 수 있는 기회네.]
[하지만 이건 내가 하겠다고 해서 될 일은 아니잖아요. 우선 정원석에게 물어봐야겠어요.]
[그렇게 하게.]
태화가 최수빈을 보며 말했다.
“방금. 네 제안 나쁘지 않아. 하지만 너하고 내가 오케이 한다고 될 일은 아닌 거 같다.”
“그럼?”
“일단 정원석 님에게 물어보고 결정하자.”
“그래. 그렇게 하는 게 낫겠다.”
태화는 몸을 돌려 정원석에게 향했다.
“정원석 님.”
“네. 감독님.”
“잠깐 할 말이 있습니다.”
“네. 하십시오.”
태화는 방금 최수빈이 제안했던 내용을 정원석에게 전했다. 정원석은 그 말을 듣자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최수빈 님이 그런 생각을 했다니 감동적이네요.”
“괜찮을까요?”
“아마 혜영이도 좋아할 겁니다.”
“정말입니까?”
“네. 항상 혜영이는 내가 영화 촬영 이야기를 해주면 좋아하면서도 아쉬워했어요. 자신의 흔적이 사라지는 것 같다고. 그런데 자신이 했던 연기를 따라서 해준다면 기뻐할 겁니다.”
“혜영 님의 흔적이 남아서?”
정원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잠깐 혜영이한테 전화 한번 해볼까요?”
“네. 그래도 선혜영 님 마음은 모르는 거니까요.”
“알겠습니다.”
정원석은 선혜영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정원석은 선혜영에게 상황을 설명했고 선혜영이 답을 주었다.
정원석이 태화에게 말했다.
“감독님.”
“네.”
“혜영이가 그렇게 해도 좋다고 하네요.”
“다행이네요.”
“그런데 잠깐 최수빈 님과 통화할 수 있을까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죠.”
태화는 바로 최수빈을 불렀다.
“최수빈 님. 잠시만 이쪽으로.”
최수빈은 태화의 부름을 받고 바로 걸어왔다. 정원석이 최수빈을 향해 말했다.
“최수빈 님. 혜영이가 통화하고 싶어 해요.”
“아. 네.”
최수빈은 정원석에게 휴대폰을 넘겨받았다.
“여보세요. 선혜영 님. 저 최수빈입니다. 네. 네.”
태화는 선혜영과 통화하는 최수빈의 표정을 보았다. 최수빈의 표정은 시종일관 진지했다.
얼마 후 최수빈은 선혜영과 통화를 마치고 휴대폰을 정원석에게 돌려주었다.
태화가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최수빈에게 물었다.
“뭐라고 해?”
“선혜영 님이 나한테 고맙다고 하네.”
“다행이다. 네 진심이 전해져서.”
“응.”
정원석이 선혜영과의 통화를 마저 끝내고 태화와 최수빈에게 다가왔다.
“최수빈 님.”
“네.”
“다치면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것까지 따라 해서는 안 되죠.”
태화가 최수빈에게 향했다.
“수빈아.”
“…….”
“정말. 네 결정.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충분하다.”
“그거. 칭찬이지?”
“그래. 수빈아.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다치면 안 된다고?”
“그래.”
“그건 걱정하지 마. 나 스스로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일은 없을 거야.”
#.
태화는 촬영장을 훑어보았다. <내 복권 내놔!> 마지막 장면을 촬영하기 위한 준비가 완료된 상태였다. 촬영장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감독인 태화에게 쏠렸다.
[태화 군. 지금 심정이 어떤가? 감독으로서 첫 장편영화의 촬영이 이제 마무리가 되네.]
[힘든 과정이 끝나서 좋으면서도 우리 영화에 참여했던 사람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게 시원섭섭하군요.]
[그 마음 이해하네. 항상 처음은 강렬하니 말일세.]
[어쨌든 후회는 없습니다. 최선을 다했으니까요.]
[그렇네. 자네는 최선을 다했네.]
태화는 자기의 오른손을 높이 쳐들었다. 그리고 외쳤다.
“올 스탠바이!”
“레디!”
김현석이 슬레이트를 카메라에 갖다 대었다. 이후 촬영 전 구호를 외치는 팀이 순서에 따라서 외치기 시작했다.
“스피드!”
“롤!”
“구에 일에 하나!”
마지막으로 태화가 외쳤다.
“액션!”
태화의 외침이 있고 몇 초 후 최수빈이 백 팩을 어깨에 멘 채 조심스럽게 옥탑방의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최수빈은 운동화를 신었다. 그런 후 유심히 박성욱의 낡은 구두를 쳐다보다가 박성욱 구두의 좌우를 바꿔놓았다. 최수빈은 사전에 계획했던 위치에 낡은 구두를 정확하게 위치시켰다. 이후 최수빈은 조심스럽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한철은 카메라를 이동시켜 최수빈의 얼굴을 잡았다. 최수빈은 입가에 미소를 짓다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기 시작했다. 이후 최수빈은 손에 쥔 로또 복권을 잠깐 바라보다 그 복권에 가볍게 뽀뽀했다.
-넌 어디 있다가 내 손에 들어왔니?
최수빈의 대사는 선혜영이 했던 연기처럼 냉소적이었다. 태화는 최수빈의 연기를 보며 적지 않은 감동이 일어났다.
‘아무리 연기를 따라 한다고 하더라도 이건 수많은 노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최수빈은 대사를 치고 나서 고개를 돌려 옥탑방을 바라보았다. 최수빈은 옥탑을 본 채 다시 대사를 쳤다.
-박성욱이 고맙다. 너 때문에 이제 내 팔자가 피겠다.
최수빈은 대사를 치고 나서 옥탑으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향해 뛰어갔다. 이한철도 최수빈의 속도에 맞춰 뛰기 시작했다. 최수빈은 계단을 내려가기 전 잠깐 멈췄다. 그리고 들뜬 표정으로 카메라를 쳐다보았다. 이 부분도 선혜영이 즉흥적인 연기로 선보였던 장면이고 최수빈이 방금 그 장면이 완벽하게 재현해 냈다.
태화는 최수빈의 연기에 감탄할 겨를도 없이 순간 긴장했다. 선혜영도 이다음 장면에서 사고가 났기 때문이었다.
이내 최수빈이 계단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주 짧은 몇 초의 시간.
태화는 모니터를 보며 가슴을 졸였다.
‘제발……. 무사히 지나가자. 제발…….’
하지만 태화의 염려와는 달리 최수빈은 계단을 무사히 내려갔다.
‘됐어. 무사히 지나갔어!’
태화는 이 순간 환하게 웃으며 외쳤다.
“컷!”
그리고 얼마 후 촬영본을 확인한 태화가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
“오케이!”
태화의 외침과 함께 촬영장은 순간 박수와 환호가 터졌다. 태화의 옆에 있던 이한철이 태화를 꼭 껴안았다.
“태화야. 정말 고생 많았다.”
“형도요. 정말 고마워요.”
뒤이어 한재영과 이우섭, 그리고 김현석이 태화가 있는 곳으로 뛰어왔다. 그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좋아했다. 이우섭은 순간 자기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나머지 큰소리로 외쳤다.
“나도 이제 장편영화 경험자다!”
이우섭의 말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순간 빵 터졌다. 하지만 이우섭의 이 말은 한편으론 씁쓸한 말이기도 했다. 이우섭의 이 발언은 장편영화에서 연출부 스태프로 참여하는 게 감독으로 데뷔하는 것만큼 힘든 요즘 현실을 반영하고 있었다.
매년 수많은 영화가 기획되지만, 실제 제작에 들어가는 작품은 그중 몇 작품이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연출부 스태프는 희망 고문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게 현실이다.
태화는 사람들과 기쁨을 함께 나누며 좋아했다. 그러던 와중 태화는 막 계단을 올라온 최수빈과 눈이 마주쳤다. 태화가 최수빈에게 다가갔다.
“최수빈. 정말 멋졌다.”
태화는 말을 하고 나서 자기의 엄지를 최수빈에게 들어 보였다. 최수빈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감독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나쁘지 않은데?”
“어쨌든 수빈이 넌 증명했어. 우리 영화의 히로인이라는 걸.”
#.
얼마 후 태화를 비롯한 스태프와 정원석과 최수빈은 옥탑에 모였다. 바로 기념사진을 촬영하기 위해서였다.
감독인 태화가 가운데 맨 앞쪽에 있었고 양옆으로 남녀 주연 배우인 정원석과 최수빈이 위치했다. 그리고 한재영과 이우섭, 김현석이 제일 앞줄을 채웠다. 나머지 스태프도 적당하게 위치를 잡고 섰다.
기념사진 촬영은 이한철이 진행했다.
“자. 이제 찍습니다. 안 웃는 사람은 뭡니까?”
이한철의 농담에 사람들은 순간 빵 하고 터졌다. 이한철은 카메라로 구도를 잡은 후 타이머를 작동시켰다. 그리고 재빨리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이한철이 자리를 잡은 곳은 두 번째 줄 가장자리였다. 이한철의 옆엔 송윤주가 서 있었다. 타이머가 작동되고 몇 초 후 카메라가 작동했다.
찰칵.
기념사진 촬영이 끝나고 사람들은 저마다 서로에게 감사의 인사를 나눴다. 태화에게 정원석이 다가왔다.
“감독님.”
“아. 네.”
“한 가지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말씀하세요.”
“오늘 최수빈 님이 연기했던 부분. 제가 좀 가져갈 수 있을까요? 보안은 철저하게 지키겠습니다.”
태화는 정원석이 어떤 생각으로 이런 부탁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바로 선혜영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럼요.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감독님.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고마운 건 오히려 접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
이날 정원석은 선혜영에게 최수빈이 연기했던 촬영본을 보여주었다. 선혜영은 최수빈이 연기한 부분을 보면서 자신이 촬영했던 당시 감정들이 그대로 떠올랐다. 선혜영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혜영아. 어때?”
“이분. 연기 잘한다. 그런데 오빠.”
“왜?”
“이제야 내 아쉬운 감정. 정리할 수 있을 거 같아.”
신혜영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래도. 내 흔적이 남았잖아.”
정원석은 선혜영에게 다가가 그녀를 꼭 안았다.
“그래. 혜영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