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29화
태화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벌써 잊었냐? 우리 영화. 네가 결심을 해줘서 여기까지 온 거야.”
“…….”
“물론 내 애교가 큰 몫을 했지만…….”
최수빈은 태화의 입에서 애교라는 말이 나오자 손사래를 쳤다.
“아아. 그 애교라는 말 하지도 마. 네 애교.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고 싶으니까.”
최수빈의 이 발언은 장난스러웠지만,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했다. 최수빈의 반응에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애교는 네가 부리라고 한 거다.”
“솔직히 나도 네가 그렇게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어. 대충할 줄 알았지.”
“그때 대충했으면 넌 내 캐스팅 제안을 거절했겠지. 안 그래?”
“물론 그렇긴 하지만…. 그렇게 끔찍할 줄은 몰랐지.”
“끔찍? 깜찍했던 건 아니고?”
“깜찍은 무슨.”
그때였다. 태화의 시야에 우한수의 모습이 보였다. 태화는 우한수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하고 싶었다.
“수빈아. 오늘 정말 고생했다. 나 우 선생님에게 가 봐야겠다.”
“알았어.”
태화는 최수빈에게 말을 하고 나서 우한수에게 향했다.
“선생님.”
우한수가 태화를 보자 활짝 웃으며 반겼다.
“아. 감독님.”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가 고생한 게 있었나요? 고생이라면 주연 배우들이 고생했죠. NG도 여러 번 났었고.”
“…….”
“난 그냥 기다린 거밖에 없습니다.”
“아닙니다. 선생님이 집중력을 잃지 않고 계셨기 때문에 촬영이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런가요?”
“네. 만약 마지막에 등장하는 타이밍이 조금만 늦었어도 NG가 될 뻔했습니다. 그랬다면 주연 배우들의 연기가 물거품이 되었겠죠. 선생님이 집중력을 끝까지 유지하셔서 마지막 장면이 늘어지지 않고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관객들에게 반전의 재미도 주었고요.”
“감독님이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고맙네요. 그래도 이 늙은이가 작품에 보탬이 되었군요.”
“네. 아마도 관객들은 마지막 등장한 선생님의 모습을 강렬하게 기억할 겁니다.”
“허허허. 감독님한테서 이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군요.”
그때였다. 차량의 불빛이 보였다. 엔진 소리를 들으니 트럭이었다.
차량의 불빛을 본 우한수가 태화에게 말했다.
“감독님. 이제 왔군요.”
“네? 뭐가 말입니까?”
“밥차요.”
“밥차……요? 선생님.”
우한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감독님은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태화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네?”
“집사람이 음식 솜씨가 좋아요. 그래서 밥차 사업을 해볼까 하더라고요.”
“…….”
“오늘 저 밥차는 테스트입니다. 그러니까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됩니다.”
태화가 우한수가 대화를 하는 사이 밥차가 도착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는데 현장의 스태프들은 밥차 앞으로 모였다. 태화와 우한수도 밥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
태화와 우한수가 밥차 앞에 섰다. 태화가 스태프들을 향해 말했다.
“여기. 이 밥차는 여기 계신 우 선생님께서 쏘시는 겁니다.”
태화가 말을 마치자 스태프들 사이에 환호성이 터졌다. 환호성이 잦아들자 우한수가 발언했다.
“방금 감독님에게 말씀드렸지만, 집사람이 음식 솜씨가 좋아요. 여러분들이 음식 드셔보시고 평 좀 내려주세요.”
우한수의 발언이 끝나자 한재영이 발언했다.
“그러니까 저희가 테스터가 되는 셈이군요.”
“그렇죠.”
“저는. 기꺼이 테스터가 되겠습니다. 지금 배가 몹시 고프거든요.”
한재영의 발언에 사람들은 순간 빵 터졌다. 밥차를 제공해 준 우한수도 한재영의 발언에 큰소리로 웃었다.
“자. 다들 배가 고플 테니 식사합시다.”
밥차에도 스태프가 따라왔지만, 오히려 적극적인 건 영화 스태프였다. 영화 스태프들이 테이블을 차에서 내려서 깔고 의자를 깔았다. 그 모습을 본 태화가 우한수에게 말했다.
“스태프들의 모습을 보니 짠하네요.”
“짠해요?”
“네. 제가 너무 스태프들을 부려 먹은 것 같아서요.”
“감독님.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네?”
“스태프들의 표정을 보세요. 다들 즐거워하고 있잖아요.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저렇게 만들 수 있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태화는 우한수의 말을 신뢰했다. 그건 연륜에서 나온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가요?”
“네. 감독님. 그러니까 감독님은 스태프들에게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사람들에게 즐거운 기억을 만들어준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때였다. 스태프들이 태화와 우한수를 불렀다.
“감독님. 가서 식사하시죠.”
“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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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가 자리를 잡은 테이블엔 한재영을 비롯한 이우섭과 김현석 그리고 우한수가 함께 했다. 우한수는 노숙자 분장을 지우고 옷도 다시 원래 입고 있던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그러자 우한수는 노숙자에서 멋진 노신사로 바뀌었다.
태화가 우한수를 보며 말했다.
“선생님은 연기자가 어울리시는 거 같습니다.”
“그런가요?”
“네. 노숙자와 노신사. 뭔가 극단으로 오가는 모습인데 어느 모습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
“그러기가 쉽지 않잖아요.”
“이거 감독님한테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좋군요.”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선생님과 다른 작품에서 만나고 싶습니다.”
“뭐. 인연이 된다면 다음에 또 만날 수 있겠지요.”
“그나저나 제가 선생님께 해드린 것에 비해서 너무 많은 걸 받은 것 같습니다.”
태화의 말에 우한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감독님.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전 이미 충분한 보상을 받았습니다.”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고요?”
“그래요. 오늘 촬영을 앞두고 며칠 전부터 설렜습니다. 이 나이에 이런 설렘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저한테는 충분한 보상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태화는 이렇게 대답했지만 우한수의 발언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영감님. 영감님도 우 선생님과 같은 감정이 든 적 있습니까?]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설렘의 감정을 느낄만한 일이 없네. 그건 이미 살 만큼 살아오면서 겪을 만한 일은 다 겪었기 때문일세.]
[그런 만큼 설렘의 감정을 느낀다는 건 쉽게 오지 않는 감정이군요.]
[그렇네. 어찌 보면 서러운 일이기도 하네. 남아 있는 미래가 많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하니 말일세.]
태화는 박도봉 감독과의 대화를 통해 우한수의 감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우한수가 마련해 준 밥차에 대해서 스태프들의 반응은 폭발적일 정도로 좋았다. 반찬 가짓수도 많은 데다가 맛도 괜찮았기 때문이었다.
태화가 활짝 웃으며 우한수에게 말했다.
“사람들 반응이 아주 좋습니다.”
“허허. 다행이네요.”
“선생님. 사모님 음식 솜씨가 좋으신 거 같습니다.”
“내가 집사람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한재영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영화 현장에서 밥차 몇 번 먹어봤는데 그것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한재영의 말에 우한수가 대꾸했다.
“피디님. 그 정도입니까?”
“네. 이건 예의상 한 말이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이거 집사람이 아주 좋아하겠군요.”
우한수는 발언을 하고 나서 큰 소리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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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최수빈은 송윤주와 함께 식사하고 있었다. 송윤주가 최수빈을 향해 말했다.
“수빈아. 아까 태화 왜 껴안은 거야?”
“…….”
송윤주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최수빈에게 물었다.
“너 혹시……? 태화한테…….”
최수빈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언니.”
“왜?”
“별다른 의미 없었어.”
“별다른 의미가 없어? 에이. 그건 아니지.”
“정말이라니까. 그냥 같이 작품 활동 하는 동료로서 그렇게 한 거야. 이성적으로 한 게 아니라.”
“알았어.”
최수빈은 송윤주의 표정을 보았다. 송윤주는 알았어라고 대답했지만, 표정은 그 말과 달랐다.
“언니. 그 표정 뭐야? 말과 표정이 따로 노는데?”
“나도 그랬어.”
“뭘?”
“나하고 한철이 오빠. 처음엔 그냥 같이 작품 활동 하는 동료. 그런 사이였다고.”
“그래서?”
“나중에 생각해 보면 그런 생각이 호감이었더라고. 그래도 호감이 가니까 동료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겠어? 너 호감이 가지 않거나 관심이 없으면 동료라는 생각도 안 든다니까.”
“언니.”
“왜?”
“너무 앞서나가지 맙시다. 지금은 연기에 집중할 때입니다.”
“알았다.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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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촬영 당일.
한재영의 옥탑방 안에선 촬영이 진행 중이었다. 옥탑방 내부에서 촬영할 내용은 3개 장면이다.
첫 번째 박성욱이 심수영이 씻는 사이 몰래 복권이 일등에 당첨된 걸 확인하는 장면.
두 번째 박성욱이 잠든 사이 심수영이 복권이 일등에 당첨된 걸 확인하고 복권을 훔쳐서 몰래 달아나는 장면.
세 번째 깜박 잠이 든 박성욱이 복권이 사라진 걸 알고 분노하는 장면.
이 세 개의 장면은 조명을 치고 촬영을 해야 하는 장면이라 정민석도 참여한 상태다. 한재영의 옥탑방은 옥탑에 위치하고 창문이 작지 않은 편이어서 채광이 좋았다. 채광이 좋은 건 그곳에서 살기엔 좋지만, 이 작품을 찍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강한 채광은 박성욱의 암울한 분위기를 보여주는 것과 적합하지 않았다.
정민석은 이를 위해서 조명에 쓰는 필터지를 창문 바깥쪽에 붙였다. 조명에 쓰이는 필터지는 여러 가지 상황에서 쓰이는데 정민석이 쓴 필터지는 조명의 광량을 약하게 하는 데 쓰이는 필터지다. 정민석이 창문에 필터지를 붙이자 확실히 방안의 광량이 줄어들었다.
조명이 세팅되고 촬영은 어렵지 않게 진행됐다. 현재 정원석은 복권이 사라진 걸 알고 분노하는 감정을 연기하고 있었고 이 또한 어렵지 않게 촬영이 끝났다. 태화가 차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오케이!”
옥탑방 내부의 촬영을 모두 마치고 태화를 비롯한 스태프와 연기자들은 옥탑에 모여 있었다. 이제 남은 촬영은 한 씬 뿐이다. 바로 선혜영이 사고를 당했던 그 장면이다.
태화가 앞서 촬영에서 오케이를 차분하게 외친 건 옥탑방 내부여서 이기도 했지만, 마지막으로 남은 촬영을 앞두고 설레발 치는 느낌을 갖지 않기 위해서였다.
최수빈은 의상과 분장을 위해서 옥탑방 안에서 준비 중이다. 최수빈을 기다리는 스태프들의 표정은 다들 밝았다.
남주인 정원석이 태화에게 다가와 말을 붙였다.
“이런 날이 오긴 오는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이제 편안하게 보십시오.”
태화의 말에 정원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제 촬영분은 다 끝났으니까요.”
“정말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정원석은 태화와 대화를 마치고 스태프들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스태프들은 정원석이 다가오자 저마다 그동안 수고했다며 격려의 말을 전했다.
정원석은 이 순간 그동안<내 복권 내놔!>에 참여하면서 있었던 일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머릿속에서 지나갔다.
‘참.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구나.’
정원석은 스태프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최수빈의 연기를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정원석은 최수빈의 연기를 기다리면서 이중적인 감정을 느꼈다.
이제 작품이 무사히 끝난다는 안도감과 함께 아쉬운 감정이 밀려왔다.
그건 바로 선혜영 때문이었다. 선혜영과 함께 이 마지막을 함께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