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27화
강진호는 액션 팀 스태프답게 몸이 단단했고 터프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태화는 강진호의 호쾌한 웃음이 그의 외모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팀장님 웃음소리를 들으니 속까지 뻥 뚫리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가끔 사람들이 제 웃음소리를 소화제 같다고들 합니다.”
강진호는 태화에게 아재 개그를 투하했다. 하지만 태화는 당황하지 않았다.
강진호를 섭외한 한재영에게 사전에 정보를 받았던 데다가 이전에도 몇 번 미팅을 했기 때문이었다.
태화는 강진호의 코드에 맞췄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태화가 강진호에게 부탁하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액션과 관련한 스태프는 대체하기가 쉽지 않은 것도 태화가 강진호의 아재 개그 코드에 맞추는 이유다.
“아주 좋은 소화제죠. 대체 불가입니다.”
태화의 발언에 강진호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하하. 그런가요?”
“네. 강 팀장님.”
태화는 강진호와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후 두 주연 배우인 정원석과 최수빈을 소개했다.
“강 팀장님. 두 주연 배우인 정원석 님과 최수빈 님입니다.”
정원석과 최수빈은 각각 강진호에게 인사를 건넸다. 태화는 인사가 끝나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강 팀장님. 시나리오를 보셔서 알겠지만, 철거 예정지에서 촬영하게 될 씬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 작품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독님.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감독님은 어떤 액션을 그리고 있는지요?”
영화에서 액션이 있는 장면은 감독이 직접 액션 콘티를 짜지 않는다. 영화에선 보통 무술 감독이 액션 콘티를 짠다. 감독은 그 장면의 분위기와 강조할 점을 무술 감독에게 설명한다. 그러면 무술 감독이 그에 맞춰 액션 콘티를 짠다. 현재 <내 복권 내놔!> 에선 강진호 팀장이 무술 감독 역할이다.
“처절함입니다.”
태화의 말에 강진호를 비롯한 정원석과 최수빈도 고개를 끄덕였다.
“작품에서 두 주인공 박성욱과 심수영은 그야말로 사회의 하층민입니다. 그들에게 복권 당첨금은 단번에 자기들의 계급을 올려줄 기적 같은 사다리입니다. 그 사다리를 뺏기 위한 싸움입니다. 그 싸움은 당연히 처절할 수밖에 없죠.”
태화의 발언에 강진호가 대꾸했다.
“감독님의 생각. 좋습니다. 저도 최선을 다해서 합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강 팀장님. 하지만 한 가지 유의하셔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아시겠지만 이 작품은 모든 장면이 원 씬, 원 커트입니다. 그것에 맞게 합을 만드셔야 합니다.”
“이거. 머리가 좀 아프겠는데요? 특히…….”
“칼에 찔리는 부분 말하는 거죠?”
“네. 보통 이런 장면은 커트를 나눠서 가거든요.”
액션 장면 중에 뭔가 무기를 쓰는 장면은 대부분 커트를 나눠서 간다. 실제로 촬영에 쓰이는 무기는 연기자들이 다치지 않도록 안전한 걸 사용한다. 하지만 액션 장면에는 등장인물이 무기에 다치는 장면도 들어간다. 이때 쓰이는 방식이 특수 분장을 하는 것이다.
가령 등장인물이 칼에 찔렸을 때 피가 튄다거나 아니면 칼에 신체가 꽂히는 장면 등이 그 예다. 이러한 장면에선 커트를 나눠서 가는 게 촬영하기가 수월하다. 연기자가 무기에 찔리거나 베이기 전까지 촬영하고 실제 무기에 찔리거나 베이는 장면을 따로 찍어서 커트로 연결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걸 커트를 나누지 않고 롱 테이크로 가게 되면 촬영이 쉽지 않다. 그 이유는 배우들이 연기를 하면서 상대방이 특수분장한 위치를 무기로 정확하게 찌르거나 베어야 하는 데 그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태화는 강진호의 염려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태화는 강진호의 염려를 지워 버릴 해결책을 가지고 있었다.
“강 팀장님은 다른 거 생각하지 마시고 액션 합에만 신경 써주시기 바랍니다.”
“감독님은 무슨 방법이 있는 겁니까?”
“네. 있습니다.”
태화의 대답에 강진호의 얼굴에 호기심이 어렸다.
“아. 그래요? 그게 뭡니까?”
“그건 좀 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태화는 발언하고 나서 슬쩍 미소를 지었다. 강진호는 태화의 미소에서 자신감을 읽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강진호는 태화에게 대답하고 나서 바로 액션 합을 맞추는 작업에 착수했다.
#.
철거 예정지 촬영 당일.
태화를 비롯한 연출 제작 스태프를 비롯한 현장 스태프들이 촬영을 위해 철거 예정지로 속속 도착했다. 태화를 비롯한 스태프들의 표정은 저마다 밝았다. 스태프들은 현장에 도착하자 서로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이러한 모습을 본 한재영이 활짝 웃으며 태화에게 말했다.
“스태프들 표정이 좋네.”
“당연한 거 아니냐? 오늘 촬영만 끝나면 사실상 힘든 촬영은 없으니까.”
“하지만 단지 그것만이 이유가 아니야.”
“뭔 소리야?”
“촬영이 잘 진행되어왔잖아. 거기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그래.”
“기대감?”
“그래. 넌 작품 자체에 몰두하느라 잘 몰랐겠지만, 우리 영화에 참여하는 스태프들 이 작품에 대한 기대감이 꽤 있어.”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뭐. 내가 분위기 좀 알아봤지. 스태프들 작품에 관한 만족감이 높아.”
“뭐. 그렇다면 다행이지.”
태화와 한재영이 대화하는 사이 멀리서 트럭이 오는 소리가 들렸다. 태화는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발전차 도착한 거 같은데?”
“응. 그런 것 같다.”
태화와 한재영은 발전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발전차가 도착하자 정민석이 능숙하게 발전차를 유도했다. 정민석은 태화를 보자 활짝 웃으며 반겼다.
“감독님. 어서 오십시오.”
“정 팀장님. 고생이 많으세요.”
“고생이라고 할 게 있나요? 오늘 발전차 보니까 감회가 새롭긴 하네요.”
정민석이 이렇게 말한 건 조명팀과 발전차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제가 좀 고생을 시켰지요.”
지난 몇 번의 촬영에서 소형 발전기는 큰 역할을 했었다. 하지만 여러 개의 소형 발전기를 다루는 건 꽤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
“뭐. 좀 손이 많이 가긴 했지만 나름대로 괜찮은 경험이었습니다. 현장에서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는 아무도 모르니까요.”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습니다.”
정민석은 태화와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후 자신이 데려온 팀원들을 불렀다. 본격적으로 조명을 세팅하기 위해서다.
태화는 정민석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 정민석은 흥이 나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힘이 넘쳤고 그의 몸은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정민석의 모습을 같이 지켜보던 한재영이 태화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정말. 민석이 형. 섭외한 건 잘한 거 같다. 사람이 신이 나 있잖아.”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너무 보기 좋아. 이제야 민석이 형이 나한테 잘해줬던 거 조금이라도 갚는 거 같기도 하고.”
#.
태화는 현장을 돌아다니며 스태프들에게 인사와 함께 격려의 말을 전했다.
“아이고. 고생이 많으십니다.”
현장의 스태프들은 태화의 격려에 환하게 웃으며 보답했다. 스태프들은 무엇보다 태화의 진정성을 알기 때문이었다.
“고생은요. 감독님이 제일 고생이 많죠.”
“오늘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태화가 현장을 다니며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와중에 누군가 태화에게 다가왔다. 태화가 그 사람을 보자 활짝 웃으며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우한수 님.”
“반갑습니다. 감독님. 어떻게 절 잊지 않고 기억하셨네요?”
“잊다뇨.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태화는 우한수에게 마음속으로 적지 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노년의 나이에 열정을 가지고 산다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오시는 데 불편하지 않았습니까?”
“네.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어요. 스태프님이 안내를 잘해줘서요.”
“그랬다면 다행입니다. 혹시 필요한 거 있으세요?”
“아뇨. 괜찮습니다. 그런데 현장에 도착해서 느낀 건데 분위기가 참 좋습니다.”
“그렇게 보셨습니까?”
“네. 그동안 내가 연기할 날을 기다리면서 그런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어떤 생각이요?”
“촬영장의 분위기는 어떨까? 이런 생각이요. 그런데 예상보다 훨씬 분위기가 좋네요. 아마도 이런 결과는 감독님의 역할이 컸겠죠?”
“아닙니다. 저뿐 아니라 스태프와 연기자들이 열심히 한 덕이죠.”
태화의 대답에 우한수가 잠시 큰소리로 웃었다.
“감독님도 참 겸손하십니다.”
“별말씀을요. 근데 오늘 분장을 좀 하셔야 할 텐데요.”
“다 각오하고 왔습니다.”
우한수가 맡은 역은 노숙자로 영화 속 박성욱과 심수영의 처절한 싸움을 목격하는 목격자다. 노숙자 분장이다 보니 당연히 다른 캐릭터들보다 분장에 손이 많이 갈 수밖에 없다.
“우한수 님. 오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감독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태화는 직접 우한수를 분장팀이 있는 곳까지 안내했다. 이우섭이나 김현석에게 지시할 수도 있었지만, 태화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태화가 분장팀이 있는 곳으로 가자 마침 정원석이 분장을 막 마친 후였다. 정원석도 우한수를 알아보았다. 정원석은 리허설 때 자신과 선혜영이 연인 사이인 걸 알아봤던 우한수가 기억에 강하게 남아 있었다. 정원석이 우한수에게 바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아이고. 남주님. 반갑습니다.”
태화는 정원석과 우한수가 인사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 이한철에게 다가갔다.
“촬영 감독님. 준비는 잘되어 갑니까?”
이한철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 카메라 세팅. 다 됐습니다. 언제라도 찍을 수 있습니다.”
“몸 컨디션은 좀 어때요?”
태화가 이런 질문을 하는 건 촬영이 핸드헬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핸드헬드는 특성상 촬영감독의 몸이 지지대다. 그런 점에서 촬영감독의 신체 컨디션이 아주 중요하다.
“지금 아주 최상입니다.”
“그럼. 오늘 기대해도 되겠군요.”
#.
현재 촬영장은 촬영을 위한 준비가 완료된 상태다. 태화는 실제 촬영에 들어가기 전 몇 번의 리허설을 했다. 그동안 정원석과 최수빈이 합을 맞추기 위해서 열심히 훈련했지만, 현장 상황은 그와 다르기 때문이다.
원석과 최수빈은 리허설에서 꽤 괜찮은 합을 보여주었고 태화도 이에 만족했다.
[태화 군. 이제 촬영해도 되겠구먼.]
[네.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두 사람 잘하네요.]
[방금 리허설로 정원석과 최수빈은 어느 정도 몸도 풀렸을 거네.]
[워밍 업이 됐으니 바로 시작하는 게 좋겠군요.]
[그렇네. 오늘 같은 연기는 타이밍이 아주 중요하네. 정원석과 최수빈은 방금 리허설을 끝냈고 그 타이밍에 대한 감이 살아 있는 상태네.]
[저도 영감님의 생각과 같습니다.]
태화는 정원석과 최수빈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정원석 님. 그리고 최수빈 님. 휴식 없이 지금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정원석이 먼저 태화의 물음에 대답했다.
“저는 좋습니다. 안 그래도 감독님한테 제안하려고 했었는데요.”
정원석이 대답한 후 최수빈이 대답했다.
“저도 좋아요.”
두 사람의 대답을 들은 태화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한번 달려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