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25화
태화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정민석이 발언했다.
“오늘 답사를 다녀왔던 장소를 구분하면 크게 두 개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을 거 같아.”
태화 일행은 정민석의 발언에 집중했다. 정민석은 이러한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태화가 정민석의 말을 받았다.
“두 개의 유형이 어떤 건지 알겠어요. 하나는 골목길이고 다른 하나는 철거 예정지를 말하는 거죠?”
정민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태화 말이 맞아. 오늘 답사해 본 결과 이 두 유형 모두 조명 설치가 필요해.”
정민석의 발언 후 이한철이 발언했다.
“민석이 말이 맞아. 오늘 현장에서 촬영해 보니까 광량이 좀 부족하긴 하더라. 그래서 화면에 노이즈도 생기고.”
태화가 발언했다.
“현재 설치되어 있는 가로등의 광량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이군요.”
“그렇지.”
정민석이 발언했다.
“예산이 충분하다면 발전차를 여러 번 부르면 되겠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힘들겠지.”
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민석이 형 말이 맞아요. 예산이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아요. 확실한 건 철거 예정지에서 촬영은 발전차를 부르는 게 맞아요. 영화의 마지막이고 중요한 장면이니까. 하지만 골목길은 달라요.”
“그럼 결국 선택과 집중인데……. 그럼 골목길 장면은 어떻게 할 거야? 그렇다고 아예 포기할 수는 없는 거잖아.”
태화는 바로 발언하지 않았다. 정민석의 말처럼 중요한 장면에 힘을 주기 위해 다른 장면을 버리듯이 갈 수는 없었다. 태화로선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영감님.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이런 건 생각의 전환을 해야 하네. 기존의 방식으로는 답을 찾을 수 없네.]
[생각의 전환이라. 영감님은 방법이 있군요.]
박도봉 감독이 누구던가? 산전수전 다 겪으며 백 개의 작품을 연출한 감독이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본 사람이 바로 박도봉 감독이다.
박도봉 감독은 특히 열악한 환경에서도 작품을 찍어낸 경험이 많았고 그에 대한 해법도 있을 수밖에 없었다.
[태화 군. 기존 방식에선 야간에서 야외에서 촬영하게 되면 무조건 발전차를 떠올리네. 조명을 설치하려면 전기를 끌어다 써야 하니까.]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하지만 전기를 꼭 발전차에서 끌어다 쓸 필요는 없네.]
[발전차가 아니라면…….]
[자네 캠핑 좋아하나?]
[캠핑이요?]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아. 그렇군요.]
[태화 군. 이제야 알겠는가?]
[네. 영감님.]
[영화에서 조명만큼 운용의 폭이 넓은 분야도 없네. 그 말은 꼭 그렇게만 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네.]
태화는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자 자기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 모습을 본 이한철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태화야. 너 좀 이상하다?”
“왜요?”
“왜 이렇게 실실거려?”
“방법이 떠올라서요.”
태화의 말에 이한철과 정민석 외에도 한재영과 이우섭, 그리고 김현석도 태화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들의 얼굴엔 호기심이 잔뜩 어려 있었다.
-도대체 무슨 방법일까?
태화가 방법을 말하기 전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 이거 목이 타네.”
태화의 장난스러운 발언에 잔뜩 집중했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풀렸다. 태화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한재영이 태화의 아이스 아메리카노 잔을 들어 태화에게 건넸다.
태화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태화는 웬일인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커피가 상쾌했다.
한재영이 태화를 보며 말했다.
“태화야. 이젠 목이 좀 시원하냐?”
“음. 그러네.”
“빨리 말해봐. 너의 그 방법에 따라서 나의 남은 피디로서의 일정이 고달파질지 아니면 순탄할지 결정 난다.”
“자, 그럼 다시 그 방법을 말하겠습니다.”
태화의 말에 다시 스태프들이 시선을 태화에게 집중했다. 이한철이 태화에게 한마디 툭 던졌다.
“태화야. 이번엔 김빼지 마라.”
이한철에 이어 정민석이 발언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여러분 캠핑 좋아하죠?”
태화의 질문에 스태프들은 순간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한재영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태화야. 캠핑은 나중에 가자. 꼭 지금 그 이야기를 해야겠냐?”
태화의 발언에 반응은 크게 두 개로 갈렸다. 하나는 한재영과 같은 반응이었고 이우섭과 김현석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이에 반해서 이한철과 정민석은 태화의 말을 듣고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태화는 이한철과 정민석이 지은 표정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알 듯 말 듯 한 상태를 의미했다.
태화는 이한철과 정민석의 표정을 보며 역시 두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한철과 정민석은 태화가 쓸데없이 캠핑이라는 단어를 말하지 않았을 거로 생각하고 있었다.
태화가 발언했다.
“다들 집에 캠핑할 때 쓰는 소형 발전기. 하나씩 가지고 있죠?”
“…….”
“제 말은 골목길 조명을 위해서 소형 발전기를 쓰자는 말입니다.”
태화의 말에 정민석이 맞장구를 쳤다.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정민석은 태화를 보며 활짝 웃었다.
“태화. 네 아이디어 괜찮은 거 같은데?”
한재영이 정민석을 향해 물었다.
“민석이 형.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설명 좀 해줘요.”
한재영이 이런 질문을 하는 건 당연했다. 한재영도 영화 제작 경험이 있다고는 하지만 조명 쪽은 잘 모르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정민석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태화가 말한 방법은 아주 간단해. 캠핑할 때 쓰는 소형 발전기에 조명을 연결해서 쓰자는 거야.”
한재영이 정민석에게 물었다.
“하지만 소형 발전기에 조명 연결해도 몇 개 못쓰잖아요.”
“그래서 태화가 우리한테 물어본 거야. 집에 캠핑할 때 쓰는 소형 발전기 있냐고.”
“그러니까 태화 말은 소형 발전기를 여러 개 가져와서 거기에 조명을 연결해서 쓴다는 말이네요.”
“그렇지. 스태프들이 집에 가지고 있는 거 하나씩만 가져와도 되는 거 아냐.”
“집에 두고 놀고 있는 소형 발전기를 하나씩 가지고 나오면 되겠군요.”
“그런 거지. 요즘 차박이다 뭐다 해서 캠핑하는 사람들도 많으니까. 스태프들도 꽤 많이 가지고 있을 거야. 만약 발전기가 부족하면 차에서 전기를 뽑아서 쓸 수도 있고.”
“그런데 광량이 센 조명을 쓸 수는 없잖아요.”
정민석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까 보니까 골목길 폭이 좁더라고. 조명 광량이 세지 않더라도 여러 개를 설치하면 가능해.”
그때였다. 이한철이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방금 생각난 게 있어.”
“…….”
“내 조수 주성이가 해준 이야기인데. 그 녀석이 전에 단편 영화에 촬영감독으로 참여한 적이 있었어. 그게 야간에 야외에서 한 촬영이었는데……. 태화가 말한 대로 소형 발전기에 조명을 연결해서 세팅했다고 하더라고. 주성이 말로는 실제 촬영할 때 광량도 크게 부족하지 않았다고 했었어.”
정민석이 태화를 보며 말했다.
“태화야.”
“네.”
“너 혹시 천재냐?”
“그게 무슨…….”
“너 조명에 대해서 배우지는 않았을 거 아냐? 그런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
“천재는 무슨……. 그냥 그렇게 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 겁니다.”
그때였다. 박도봉 감독이 태화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태화 군. 천재로 인정받은 걸 축하하네.]
[천재는 무슨 천재입니까? 다 영감님 덕입니다. 어쨌든 한시름 놓았습니다.]
태화가 스태프들을 향해 말했다.
“그럼. 일단 결론을 짓도록 하죠.”
“…….”
“철거 예정지는 발전차를 부르기로 하죠. 아무래도 힘을 줘야 하니까요. 그리고 골목길은 소형 발전기를 사용해서 하기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골목길은 실제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테스트해 보기로 하죠.”
태화의 제안에 이한철이 대답했다.
“난 찬성. 난 테스트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본다.”
이한철에 이어 정민석이 대답했다.
“나도 한철이 형 의견과 같아. 조명은 내가 빌려올게.”
태화는 이한철과 정민석의 의견을 듣고 나서 결론을 내렸다.
“그럼. 빨리 일정을 잡기로 하죠. 대신 테스트하는 날 다들 준비물을 챙겨 오셔야 합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집에 소형 발전기 있죠?”
태화의 물음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소형 발전기 여섯 개는 확보가 된 셈이군요.”
#.
테스트 당일. 태화 일행은 조명을 테스트할 장소로 모였다. 태화와 일행들은 각자 손에 소형 발전기와 조명 장비를 들고서 골목길로 들어갔다.
정민석은 오늘 혼자 오지 않았다. 정민석이 같이 데려온 스태프를 소개했다.
“이 친구는 전에 나하고 같이 조명팀에서 일했던 녀석이야. 이름은 구영석이다.”
정민석의 소개를 받은 구영석이 직접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구영석입니다. 전에 민석이 형이랑 같은 조명팀에서 일했었습니다.”
“…….”
“민석이 형이 다시 조명 일 한다고 해서 한편으로 좋았고 다른 한편으론 궁금했었습니다. 민석이 형이 어떤 사람들하고 일하는지도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구영석은 정민석처럼 체구가 크지는 않았지만, 몸은 꽤 단단해 보였다.
조명 세팅은 정민석과 구영석을 중심으로 빠르게 진행됐다. 물론 이 두 사람을 뺀 나머지 사람들도 옆에서 조명 세팅에 도움을 주었다.
조명이 어느 정도 세팅이 되자 정민석이 태화에게 말했다.
“조명은 세팅 완료다.”
“고생했어요. 그럼 바로 테스트해 보기로 하죠.”
“그렇게 하자.”
태화는 이한철을 불렀다.
“한철이 형. 카메라 준비해 줘요.”
“오케이.”
이한철은 바닥에 놓아둔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이한철은 잠깐 카메라에 세팅값을 입력했다.
“태화야. 난 준비됐다.”
“알겠어요. 민석이 형. 조명 켜주세요.”
태화의 말에 정민석이 대답했다.
“오케이.”
정민석은 대답하고 나서 소형 발전기에 설치한 조명의 스위치를 켰다. 조명에 불이 들어오자 다소 어두웠던 골목길이 환해지는 게 느껴졌다. 태화는 이한철에게 다가가 카메라에 달린 모니터를 보며 말했다.
“어떤 거 같아요?”
“확실히 저번보다 훨씬 나은 거 같은데? 노출도 어느 정도 나오고.”
“아무래도 사람을 세워보는 게 더 정확하겠죠?”
“그렇지.”
태화는 이우섭과 김현석을 불렀다.
“우섭이 하고 현석이는 잠깐만 카메라 앞에 서봐.”
태화의 지시에 이우섭과 김현석이 카메라 앞에 섰다. 태화와 이한철은 두 사람을 화면에 잡은 상태로 다시 모니터를 보았다.
잠시 후 이한철이 발언했다.
“태화야. 조금 어둡기는 해도 나쁘지 않은데?”
“저도 형과 같은 생각이에요.”
어느새 이한철 옆으로 다가온 정민석이 말했다.
“한철이 형.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나중에 촬영할 때 조명을 조금 더 설치하면 되니까요.”
정민석의 말을 들은 태화의 입가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민석이 형. 조명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이 된 셈이군요.”
“그렇지.”
이제 남은 건 소형 발전기를 최대한 확보하는 일이다. 태화가 한재영에게 말했다.
“재영아!”
“무슨 말하려는지 알고 있어. 스태프들한테 연락할게.”
“오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