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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124화 (122/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24화

대전 촬영이 끝나고 이틀 후. 태화는 평상에 누운 채 잠시 멍 때리고 있었다. 대전 촬영을 끝으로 대부분의 촬영은 끝이 난 상태였다. 촬영 진행률로 보면 9부 능선을 넘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태화는 요 이틀간 마음의 여유가 조금 생긴 상태였다.

원래 계획이라면 태화에게 이틀간의 여유는 호사일 수 있었다. 이렇게 된 것은 생각보다 빠른 촬영 속도 때문이었다. 스태프들과 연기자들은 현장에서 태화와 호흡이 잘 맞았고 그에 따라 촬영 속도도 낼 수 있었다. 태화는 오랜만에 평상에 누워 오후의 햇살을 받았다.

[태화 군. 한가로운 오후구먼.]

[네. 영감님. 정말 오랜만에 맛보는 거 같습니다.]

[이럴 땐 멍 때리는 것도 나쁘지 않네.]

[영감님 멍 때린다는 말도 아세요?]

[허허. 나도 그 정도는 안다네.]

태화가 멍 때리는 사이 한 남자가 옥탑으로 이어진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그 남자는 이번에 새로 합류할 스태프다. 그 남자가 태화의 모습을 보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태화 녀석. 아주 팔자가 늘어졌구먼.’

그 남자는 태화의 모습에 한편으로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론 살짝 괘씸함을 느꼈다.

‘날 부를 때는 언제고 한가하게 멍이나 때리고 있어?’

그 남자는 태화를 부르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혹시라도 태화의 반응이 있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기대감은 여지없이 깨졌다.

태화는 평상에 누워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있었다. 결국 그 남자는 목소리를 내기로 했다.

“여기 아무도 없습니까?”

태화는 목소리에 이끌려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러자 새로 합류할 스태프의 모습이 보였다. 그 사람은 큰 키에 다부진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태화는 새로 합류할 스태프를 보자 활짝 웃었다. 그리고 평상을 박차고 일어섰다.

“민석이 형!”

“태화야!”

태화는 평상에서 나와 정민석에게 다가갔다. 정민석은 태화가 다가오자 힘껏 껴안았다.

“태화야. 언제쯤 연락이 오나 했더니 이제야 하냐?”

“저번 통화에서 말했듯이 사정이 있었어요.”

“짜식. 사람 애태우게 만들고….”

정민석은 그동안 애가 탔었다. 여주가 첫날 촬영에서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선 이젠 끝났다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반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났다.

그건 여주가 캐스팅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그것도 여주가 최수빈이라니…….

정민석도 태화와 최수빈의 사이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편으론 걱정이 들었다.

-과연 이 작품이 제대로 굴러가기는 할까?

하지만 태화는 이런 정민석의 염려를 뒤로하게 했다. 최수빈이 캐스팅이 되고 어쨌든 여기까지 왔다.

정민석이 태화를 껴안았던 손을 풀었다.

“그런데 재영이하고 다른 스태프는?”

“지금 장 보러 갔어요.”

“장 보러?”

“네. 저희 여기서 밥 해서 먹거든요. 이따가 저녁 먹고 가요. 맛이 꽤 괜찮아요.”

“그래. 알았다.”

태화의 학부 시절. 태화에게 가장 잘해 주었던 선배를 뽑으라면 여자는 송윤주, 남자는 정민석이었다. 정민석은 태화의 얼굴을 보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살이 좀 빠졌구나.”

“어쩌면 당연한 거죠.”

태화는 대답하고 나서 정민석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정민석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많이 달라져 있었다.

“형도 살이 좀 빠진 거 같은데요?”

“나야 운동하고 그래서 뺀 거고.”

정민석은 그동안 꾸준히 운동을 해왔다. 그 덕에 살은 빠졌고 몸은 더 탄탄해졌다.

“이야. 민석이 형. 옛날 모습 돌아왔네.”

정민석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다 네 덕분이다.”

“네?”

“네가 그때 노량진에 찾아와 준 덕분이다. 네 제안을 받고 나도 변해야겠다고 생각했으니까.”

“어쨌든 형 모습 보니까 좋네요. 저리로 가서 앉죠.”

“그래.”

태화와 정민석은 나란히 평상으로 걸어가 앉았다. 정민석이 자리 앉자마자 바로 입을 열었다.

“태화야.”

“나 지금 무척 설렌다.”

“…….”

“처음 작품 할 때보다 더 설레.”

“이해해요. 형한텐 이 작품이 재기작 같은 거잖아요.”

“맞아. 하지만 그 이유만은 아니야.”

“그럼. 다른 이유가 또 있어요?”

“그래. 이 작품의 감독이 태화 너 이기 때문이야.”

“내가 이 작품의 감독이라서 그렇다고요?”

“그래. 너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여기저기서 들리는 말들이 있었어.”

“…….”

“태화 네가 처음 작품을 만드는 사람답지 않게 감독을 잘 해내고 있다는 말이었어.”

태화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사람들이 말이야. 내가 다른 데 가서는 영화 관련해서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누굽니까? 그 정보 유출자가?”

태화의 말에 정민석이 소리를 내며 웃었다.

“크크크. 그런다고 내가 말해줄 거 같냐?”

“뭐. 말해주지 않겠죠. 형의 성격을 아니까.”

정민석은 체구만큼 입이 무거운 편이었다.

“태화야.”

“네. 형.”

“네가 잘 해내고 있다는 걸 보여줘.”

“그래야죠.”

“네가 잘 해내는 모습을 보면 나도 자극을 받을 거 같다.”

정민석은 힘든 시간을 지나왔다. 그리고 그건 태화도 마찬가지다.

태화도 한동안 오디션만 보면 떨어지는 그런 존재였다. 그런 점에서 태화 자신과 정민석은 공통점이 있었다. 둘 다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 점이다.

태화는 현재 과거 흑역사를 극복하고 있었다. 정민석도 태화처럼 자기의 흑역사를 극복하고 싶었다. 태화는 이러한 정민석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민석이 형. 애들 올 때까지 같이 멍 때릴까요?”

태화의 제안에 정민석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좋지.”

태화와 정민석은 평상에 나란히 누웠다.

“태화야. 평상이 꽤 넓다?”

“그렇죠.”

태화와 정민석은 평상엔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정말 파란 하늘이었다.

그저 바라만 봐도 좋을 하늘이었다. 이런 걸 멍 때리기 좋은 하늘이라고 해야 할 정도였다.

[태화 군. 정민석의 의지가 대단하구먼.]

[네. 저도 그렇게 느꼈어요. 변화된 모습을 보니 그 의지가 느껴졌어요.]

[그렇네. 사람이 자기의 몸을 바꾼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네. 다이어트나 운동으로 근육을 만드는 건 보통 의지 없이는 불가능하네.]

[그러니까요. 사람들 대부분이 실패하잖아요.]

태화와 정민석이 멍 때리기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장 보러 갔던 한재영과 이우섭 김현석이 옥탑에 도착했다.

옥탑에 가장 먼저 올라온 한재영은 평상에 두 사람이 있는 걸 발견했다. 그리고 태화가 아닌 다른 한 사람이 정민석이라는 걸 곧바로 알아챘다.

한재영이 큰소리로 외쳤다.

“민석이 형!”

한재영이 부르자 정민석은 평상에서 일어섰다.

“재영이 넌 타이밍 못 맞추는 건 여전하다?”

한재영이 평상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왜요? 제가 뭘 방해한 겁니까?”

“그래 인마. 멍 좀 때리려고 했더니.”

한재영은 정민석의 모습을 보고서 살짝 놀랐다.

“와아. 민석이 형. 전에 봤을 때보다 많이 변했네요.”

“그래. 좋아 보이냐?”

“네. 정말 좋아 보여요.”

“장 보러 다녀온 거야?”

“네. 잘됐네요. 저녁 먹고 헌팅 장소로 가 보죠. 한철이 형도 헌팅 장소로 바로 올 거예요.”

“오케이.”

태화는 평상에서 일어났다.

“우섭이 하고 현석이. 인사드려라.”

이우섭과 김현석이 평상으로 걸어왔다. 태화가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아마. 저번에 봤을 거야.”

이우섭이 먼저 정민석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우섭입니다.”

정민석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이우섭에게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정민석입니다.”

“이번에 개퍼로 참여하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번에 뵀을 때보다 겉모습이 많이 달라지셔서 놀랐습니다.”

“그런가요? 그동안 운동을 좀 했습니다.”

“아. 네.”

이우섭에 이어 김현석이 정민석에게 인사를 건넸다.

“김현석입니다. 저도 그때 모습과 달라서 놀랐습니다.”

“놀랐다면 성공인데요?”

“네?”

“오랜만에 보는데 그대로면 재미없잖아요.”

김현석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듣고 보니 그러네요.”

태화는 정민석과 이우섭, 김현석의 인사를 마치자 박수를 쳤다.

“그럼. 우리 커피나 한잔할까?”

#.

태화를 비롯한 연출 제작 스태프와 정민석은 옥탑방에서 같이 저녁 식사를 마치고, 촬영이 계획된 헌팅 장소로 이동했다. 태화 일행과 이한철은 거의 동시에 현장에 도착했다.

이한철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정민석을 알아봤다. 이한철이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정민석을 불렀다.

“민석아.”

“한철이 형.”

이한철은 앞서 다른 사람들처럼 정민석의 바뀐 모습에 꽤 놀랐다.

“민석이. 너…….”

“왜요?”

“그새 운동 좀 했구나. 저번에 봤을 때보다 단단해 보여.”

“형은 여전하네요.”

“나야 뭐. 운동은 항상 하던 일이니까. 어쨌든 건강해 보이니까 좋다.”

이한철은 정민석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민석이 이한철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이한철과 정민석은 잠시 악수했다.

“윤주는 잘 지내죠?”

“그럼. 아주 잘 지내지. 근데 나중에 사람들이 놀라지 않을까 싶다.”

“사람들이 놀라요?”

“그래. 네가 개퍼로 참여한다는 거 자체가 놀라운 일 아니냐? 조명에 관해선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했던 게 넌데.”

“그래도 형이면 DP 시스템으로 가도 된다고 판단했어요.”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다.”

태화는 이한철과 정민석의 만남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본 이한철이 태화에게 물었다.

“넌 왜 그런 표정을 짓냐?”

“보면 모릅니까?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

“한철이 형하고 민석이 형이 이렇게 한 작품에서 만나다니요. 저로서는 이보다 더 흐뭇한 일은 없을 겁니다.”

이한철과 정민석은 학부 시절 각각 촬영과 조명으로 나름 실력으로는 최고라는 평판이 있었다. 태화로선 이 두 사람이 자기가 연출하는 작품에 함께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좋았었다. 이한철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네가 나하고 민석이 꼬셔서 이렇게 된 거잖아.”

“꼬신다고 넘어온 게 문제 아닙니까?”

“뭐?”

태화의 뻔뻔한 농담에 사람들은 순간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

영화에서 촬영할 장소에 답사하는 건 매우 중요하다. 특히 조명이 필요한 사안이면 더더욱 그렇다. 실제 촬영이 진행될 시간에 맞추어 현장답사를 해야 더 나은 촬영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태화 일행은 꼼꼼하게 촬영하게 될 장소를 살펴보았다.

태화 일행은 매우 진지하게 임했고 여러 가지 의견이 오고 갔다. 촬영 장소를 다 답사하고 나서 태화 일행은 카페로 향했다. 태화는 오랜만에 카페 ‘민들레’로 향했다.

태화 일행이 카페를 방문하자 사장 정소영이 크게 반겼다.

“어머. 태화야. 오랜만이야.”

“그동안 잘 지내셨죠?”

“나야 항상 그렇지. 그런데 영화는 잘 진행되고?”

“네. 지금 촬영 막바지에 있어요.”

“정말 다행이다. 어디에 앉을래?”

마침 테라스 자리가 비어 있었다.

“테라스에 앉을게요.”

“그래. 그렇게 해.”

태화 일행은 정소영에게 음료를 주문하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태화가 발언했다.

“오늘 현장 답사 갔던 내용을 정리해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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