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23화
이선영의 웃음은 매우 유쾌했다. 그래서인지 이선영의 웃음을 지켜본 태화도 덩달아 유쾌함을 느꼈다.
“태화 씨. 혹시 내 도움 필요하지 않아?”
“네?”
“지금 만들고 있는 영화. 아주 적은 예산으로 만들고 있잖아.”
“…….”
“제작비 쪼들리지 않아?”
태화는 순간 이선영의 물음이 달콤한 악마의 속삭임처럼 느껴졌다. 그런 말이 있다.
사람을 길들이려면 그 사람이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에 가장 필요로 하는 걸 주면 된다. 태화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건 제작비였다. 실제로 태화는 ‘제작비가 조금만 더 있다면’이라고 생각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제작비가 조금만 더 확보되었다면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촬영을 진행할 수 있다. 하다못해 식사 메뉴라도 달라지니까.
[태화 군. 선영이의 저 제안 순수한 걸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 받을 수 없습니다. 솔직히 영감님도 이선영 대표의 제안. 제가 받기를 원하지 않으시죠?]
[그렇네. 이 작품은 자네의 온전한 힘으로 만들어져야 하네. 한 번이라도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 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많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기 때문일세.]
[영감님 말씀도 일리가 있어요. 하지만 제가 이선영 대표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건 이 작품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또한 투자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동의 없이 이선영 대표의 도움을 받을 순 없습니다.]
[자네 생각은 알겠네. 선영이한테는 어떻게 이야기할 건가?]
[그냥 제힘으로 완주하겠다는 의사만 밝힐 겁니다. 굳이 투자자 이야기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요.]
[자네 말처럼 굳이 밝히 필요는 없겠지.]
태화가 이선영의 제안에 대답했다.
“대표님의 뜻은 알겠지만 전 그 마음만 받겠습니다.”
“마음만 받겠다?”
“네. 어차피 제작비 때문에 힘들 건 처음부터 예상했던 문제입니다. 그리고 지금껏 잘해왔고요.”
“…….”
“여기까지 온 거…. 끝까지 제힘으로 완주하겠습니다.”
태화의 대답에 이선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태화 씨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방금 태화 씨 모습. 아빠의 모습과 닮아 있어.”
“네?”
“아빠도 내가 도움을 드린다고 했을 때 끝까지 거절했거든.”
“하지만 전 영감님과는 다릅니다.”
“다르다?”
“네. 전 지금 도움을 안 받겠다고 했지 아예 받지 않겠다고 한 건 아니거든요.”
“…….”
“그냥 감이지만 나중에 이 대표님한테 제대로 도움을 받을 때가 오지 않을까요?”
“좋아. 하지만 태화 씨도 증명해야 해.”
“증명이요?”
“그래. 내가 나중에 베팅해도 좋을 거라는 판단이 설 정도로 능력을 증명해야지.”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태화와 이선영은 대화를 나눈 후 계속해서 식사를 이어갔다.
[선영이가 자네에게 증명해 보이라고 했던 말. 전에는 내가 선영이에게 증명해 보이겠다고 했었던 말이네.]
[이선영 대표가 도움을 드린다고 했을 때 말입니까?]
[그렇네. 참으로 재밌구먼. 증명해 보인다는 말이 이렇게 돌고 돈다는 게.]
[그렇군요.]
#.
태화와 이선영은 식사를 마치고 방 밖으로 나왔다. 두 사람이 방에서 나오자 홀에 있었던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스태프와 연기자들은 예의를 차린 행동이었지만 표정엔 저마다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이선영의 얼굴을 처음 보기 때문이었다. 이선영은 식당에 먼저 와서 방에서 기다렸기 때문에 태화 이외에 다른 사람은 이선영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이선영이 이렇게 한 건 처음부터 생색을 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선영이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식사는 맛있게 했는지 모르겠네요.”
사람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네.”
“서 감독. 많이 도와주세요.”
“네.”
사람들은 간략하게 대답만 했다. 아무래도 스태프나 연기자들에게 이선영의 존재는 부담스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냥 심심하게 끝나려는 순간 단역 연기자 중 오준식이 나섰다. 오준식은 본래 붙임성이 좋고 활달한 성격이다.
“대표님. 오늘 정말 식사 맛있게 했습니다. 여기 올 때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잘 먹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여기 올 때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는 오준식의 말에 사람들은 순간 웃음이 빵 터졌다. 그도 그럴 것이 저예산으로 먹을 수 있는 메뉴는 뻔하기 때문이다.
웃음이 잦아들자 이선영이 살짝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아. 그러셨나요?”
“네. 그리고 서 감독은 분명 잘될 겁니다.”
“…….”
“제가 비록 단역이지만 그래도 많은 감독님을 대해봤습니다. 근데 서 감독은 좀 특별합니다.”
이선영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특별해요?”
“네. 이번 작품이 처음이라고 들었는데 연출 솜씨가 꽤 뛰어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스태프와 연기자들을 존중해 주고요. 처음엔 밑져도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이 작품에 참여했는데 오늘 촬영해 보니까 좋은 결과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이래 봬도 촉이 꽤 좋은 편이거든요.”
이선영은 알고 있었다. 태화의 경력보다 뛰어난 연출 솜씨는 바로 박도봉 감독의 조언이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걸.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선영은 태화의 실력을 애써 낮춰볼 생각은 없었다. 박도봉 감독이 아무리 조언하더라도 결국 결정하는 건 태화라는 걸 꿰뚫어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선영은 잠깐 식당 안에 있는 스태프와 연기자들을 훑어보았다. 이들은 오준식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아. 그렇군요. 저도 이 작품의 결과 기대해 보겠습니다.”
이선영은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고 식당 밖으로 나갔다. 이선영의 뒤를 태화와 우영인이 바로 따라나섰다.
이선영과 우영인은 대기하고 있던 차량에 올라탔다. 태화가 이선영과 우영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대표님. 신경 써주셔서 고마웠습니다.”
“태화 씨. 꼭 성과가 있어야 해.”
“꼭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그럼. 조심해서 서울 올라가고.”
“네.”
태화는 이선영에게 대답하고 나서 우영인에게 말했다.
“우 비서님. 신경 써주셔서 고마웠습니다.”
“제가 한 일이 있나요. 저야 대표님이 시키신 일만 했을 뿐입니다.”
“네.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감독님도요.”
이선영과 우영인이 탄 차는 이내 바로 출발했다. 잠시 후 식당 문을 열고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한재영이 태화에게 다가와 물었다.
“태화야. 저분 어떻게 아는 사이야?”
“말했잖아. 지인이라고.”
“그래도 그냥 지인은 아닌 거 같은데?”
“뭐?”
“여기 나온 음식값 제법 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도 여기 음식값 계산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그냥. 전에 내가 도움을 준 적이 있어.”
“도움?”
“그래. 나도 거기까지만 말할 수 있어.”
한재영은 태화의 성격을 알고 있었다. 태화는 함부로 말을 하고 다니는 성격이 아니다.
한재영도 태화의 이런 성격을 알기에 더는 묻지 않았다.
“알았다. 이제 서울 올라가야지.”
태화는 더는 묻지 않는 한재영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꼈다.
“재영아. 고맙다.”
“뭐가?”
“더 묻지 않아서.”
“때가 되면 네가 알아서 얘기해 주겠지. 안 그래?”
“맞아.”
태화는 시선을 스태프와 연기자들에게 돌렸다.
“오늘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차량을 가져오신 분들은 운전 조심해서 가시고 저와 함께 버스 타고 오신 분들은 차량으로 이동하겠습니다.”
태화의 말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가장 먼저 움직인 건 조승미와 그녀가 데려온 학생들이었다. 조승미가 해맑게 웃으며 태화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오빠. 저 가요.”
“그래. 오늘 수고했다.”
“다음에 만날 일 있겠죠?”
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그럼. 다음에 봐요.”
“그래.”
조승미와 학생들이 가고 나서 정원석이 태화에게 다가와 말을 붙였다.
“감독님. 오늘 고생하셨어요.”
“고생은요. 고생은 정원석 님이 하셨죠.”
“그럼. 저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네. 운전 조심해서 올라가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정원석은 태화와 인사를 나눈 후 자기 차량으로 이동했다. 정원석의 인사가 끝나고 이번엔 이한철이 태화에게 왔다. 이한철은 아까 고기를 먹으면서 술을 마셔서 그런지 술 냄새가 확 풍겼다. 이한철은 겉으로는 멀쩡했지만, 혀는 살짝 꼬인 상태였다.
“한철이 형. 술 마셨어요? 아까는 형이 서울까지 운전해서 간다면서요.”
“뭐. 오늘 같은 날 안 마실 수 없지. 촬영도 잘 끝났는데……. 안 그래?”
“그렇긴 한데.”
이한철이 옆에 서 있던 박주성을 보며 말했다.
“주성아. 운전해 줄 거지?”
박주성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알았으니까. 빨리 가요.”
이한철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짜식. 보채긴.”
이한철이 태화에게 말했다.
“태화야.”
“네. 한철이 형.”
“아니지. 이건 지금 할 말이 아니다. 나중에 얘기하마.”
태화는 이한철이 하려고 했던 말이 궁금했지만 일단 접기로 했다.
“알았어요. 조심해서 가요.”
“알았어.”
태화는 박주성을 보았다. 박주성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감독님. 걱정하지 마세요.”
“알아요. 그래도 조심하라는 말은 하고 싶네요.”
박주성은 이한철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사람들은 모두 자리를 떠났다. 이제 태화와 한재영 이우섭과 김현석만 남았다.
태화가 한재영에게 말했다.
“우리도 가자.”
“그래.”
태화 일행이 자리를 뜨려는 순간 식당에서 최수빈과 송윤주가 나왔다. 태화가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두 사람 아직 안 갔네.”
송윤주가 태화를 보자 웃으며 대답했다.
“아. 잠깐 볼일 보느라고.”
“조심해서 가요.”
“응.”
태화가 이번엔 최수빈에게 말을 걸었다.
“수빈아. 오늘 고생했다.”
태화의 말에 최수빈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응. 뭐…….”
최수빈의 대답은 이 상황에서 기대할 수 있는 대답이 아니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선 너도 고생했다든가 아니면 자의식 과잉으로 나 때문에 오늘 촬영이 잘됐다든가 이런 대답이 나오는 게 자연스럽다. 그런데 ‘응. 뭐…….’라니.
태화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왜? 무슨 문제 있었어?”
“아니, 뭐…….”
그때였다. 최수빈의 분위기를 눈치챈 송윤주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오늘 수빈이가 좀 피곤해서 그래. 신경 쓰지 마.”
“하긴. 오늘 일정이 피곤할 만하죠. 누나가 신경 좀 써줘요.”
“그래. 알았어.”
송윤주가 재빨리 최수빈을 데리고 이동했다. 한재영이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말했다.
“근데 좀 이상하단 말이야.”
“뭐가?”
“수빈이. 분위기가 너무 다운된 거 같지 않아?”
“피곤해서 그런 모양이지. 우리도 빨리 가자. 사람들 기다리겠다.”
“오케이.”
#.
태화 일행은 차량이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태화 일행은 서울에서 대전으로 올 때처럼 차량을 각각 나누어 탔다. 태화와 이우섭 그리고 김현석은 버스에 올라타고 얼마 되지 않아 바로 곯아떨어졌다. 그건 함께 버스에 탄 연기자들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