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22화
태화는 조승미의 표정을 보았다. 조승미의 표정은 순수했다.
태화는 이런 조승미에게 솔직하게 말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럼. 솔직하게 말할게요.”
조승미가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네. 솔직하게 말해줘요.”
태화가 조승미를 보며 말했다.
“처음엔 승미 씨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았어요.”
“아무래도 그랬겠죠. 제가 낙하산 같았을 테니까요.”
“물론 그것도 있지만 다른 이유였어요.”
“다른 이유요?”
“네.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건 다른 거니까.”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건 다르다?”
“그래요. 승미 씨가 영화에 관해서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 건 처음 만난 날 알 수 있었어요. 하지만 할 수 있는 건 그것과 달라요. 할 수 있는 건 현실이고 실력이니까. 하지만 오늘 승미 씨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알았어요. 처음에 내가 가졌던 생각이 잘못됐다는걸.”
“그 말은 제가 실력이 있다는 말인가요?”
“내가 봤을 땐 그래요. 실제로 오늘 촬영에 도움을 준 사람들을 많이 데려왔잖아요. 오늘 스크립터 역할도 나름 잘했고.”
조승미가 태화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결국 칭찬이네요?”
“그렇죠.”
“감독님. 근데 청이 하나 있어요.”
“청이요?”
“네.”
“말해봐요.”
“앞으로 감독님을 오빠라고 부르면 안 돼요?”
“오빠요?”
“네. 솔직히 감독님도 그렇게 나이가 많은 건 아니잖아요.”
태화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뭐. 그렇게 해요.”
“정말요?”
“그게 뭐가 어렵다고. 그렇게 해요.”
조승미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럼. 그렇게 부를게요. 태화 오빠. 오빠도 앞으로 편하게 이름 불러요.”
“그럼. 그렇게 할까? 승미야.”
“네. 오빠.”
한편 최수빈은 태화와 조승미의 모습을 팔짱을 낀 채 보고 있었다. 최수빈의 표정엔 왜 그런지 못마땅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정원석은 자신의 휴대폰으로 온 전화를 받기 위해 잠시 자리를 이동했다. 최수빈에게 송윤주가 슬쩍 다가왔다.
“야. 너 무슨 표정이 그래?”
“내 표정이 뭐?”
“지금 네 표정 완전히 썩었다.”
“뭐. 썩어?”
송윤주가 조승미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왜 신경 쓰여?”
최수빈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언니. 미쳤어?”
“저, 정말이야?”
“언니. 그게 말이 돼? 나하고 태화는…….”
“태화는 뭐?”
“어떤 사이였는지 알잖아.”
최수빈은 송윤주의 말을 인정할 수 없었다. 물론 태화와 작품을 함께 하면서 태화에 대한 감정이 그전보다 나아졌긴 했지만……. 자신과 태화는 어떤 사이였던가?
불과 몇 달 전까지 서로 못 잡아먹어 난리였던 게 이 두 사람의 관계였다.
송윤주가 최수빈의 표정을 살폈다. 송윤주는 최수빈의 표정을 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거 신경 쓰이는 거 맞는구먼.”
“언니!”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 아니겠니?”
“에이. 몰라. 알아서 생각해.”
최수빈은 송윤주와 함께 있는 자리를 피해서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송윤주는 최수빈의 뒷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수빈아. 사람 마음 모르는 거야. 특히 남녀 관계는 더욱더…….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게 바로 남녀 관계야.’
그때였다. 정원석이 송윤주에게 다가왔다.
“지금 뭐 하세요?”
“어머나. 깜짝이야.”
“제가 그렇게 놀라게 했나요? 제가 송 팀장님에게 몰래 다가간 것도 아닌데요?”
“하하. 그랬나요?”
“근데.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네?”
“송 팀장님 표정이 되게 흐뭇해하는 거 같아서요.”
“좋은 일은 뭐…….”
송윤주가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방금 선혜영 님하고 통화한 거 맞죠?”
정원석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정원석 님은 선혜영 님하고 통화할 때 얼굴에 다 티가 나요. 어찌나 얼굴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지.”
정원석이 멋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랬나요?”
송윤주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심각한 표정은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그거 모르셨어요? 본인만 모르시네.”
선혜영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근데 선혜영 님은 어때요?”
“지금 많이 좋아졌어요.”
“다행이네요.”
“네. 다행이죠. 혜영이……. 생각보다 잘 이겨내고 있어요. 그런데 감독님이 가끔 혜영이 하고 통화하는 거 같더라고요. 영화 촬영이 어느 정도 진행됐는지 얘기도 해주고요.”
“그래요?”
“혜영이도 감독님한테 고마워하고 있어요. 보통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소홀해지잖아요.”
“그래서 아까 감독님이 매력적이라고 한 건가요?”
송윤주가 정원석에게 이런 질문을 한 건 어쩌면 당연했다. 대부분 사람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솔직히 이것도 이유지만……. 감독님을 그걸 떠나서 매력이 있어요. 솔직하고요. 뭐. 가끔 그것 때문에 짜증이 나기도 하지만요.”
“짜증이요?”
“네. 아마 기억하실 거예요. 전에 촬영하는데 구경하던 사람들이 사인해달라고 했죠. 근데 저보다 감독님한테 사인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더 많더라고요.”
송윤주도 그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송윤주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때 많이 힘드셨구나.”
“뭐. 처음에는 이거 뭐지?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죠. 하지만 나중에 이해가 되더라고요. 확실히 감독님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요.”
송윤주는 정원석의 말을 듣고 나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태화는 스태프들과 함께 은행 밖으로 나섰다. 한재영이 태화에게 다가와 말했다.
“감독님. 이제 밥 먹으러 가야죠.”
“그렇죠. 어디 식당 알아봤어요?”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아주 괜찮은 식당 알아놨습니다.”
태화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역시. 한 피디님이야.”
태화로선 어려운 촬영을 성공적으로 마친 상황이라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더라도 꿀맛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그렇다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하라고 강요할 순 없었다.
“한 피디님. 무엇보다 맛있어야 합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요. 날 믿으세요.”
그때였다. 태화 앞을 막아서는 사람이 등장했다. 태화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우 비서님. 여긴 어쩐 일로?”
“다들 식사 전이시죠?”
“그렇긴 합니다만…….”
“가시죠. 대표님이 기다리십니다.”
“근데. 다른 스태프와 연기자들을 두고서 저희만 갈 순 없습니다.”
태화의 말에 우영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른 분들도 다 같이 가시죠.”
“네?”
순간 한재영이 태화의 옆구리를 툭 치며 속삭이듯 말했다.
“야. 뭘 생각해? 얼른 가야지.”
“뭐?”
“야. 제작비 굳잖아.”
“그렇긴 하지만……. 예약한 식당은?”
“거긴 걱정하지 마. 혹시 몰라서 예약까지는 하지 않았으니까.”
“뭐? 그게 무슨 소리야?”
“확답하진 않았어. 그냥 알아만 봤지. 몇 명 정도 식사를 할 수 있는지.”
이 부분에선 한재영의 경험이 한몫했다. 영화 촬영은 변수가 많다. 그건 식당을 잡는 것도 마찬가지다. 갑작스러운 이유로 식당을 바꿔야 하는 경우가 간혹 발생한다.
가령 감독과 같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갑자기 메뉴를 변경하거나 오늘처럼 갑작스럽게 스케줄이 바뀌는 경우가 그렇다.
특히 한재영은 이번 촬영의 특수성을 고려했다. 은행 지점장의 딸이 스태프로 참여하는 데다가 태화와 친분이 있는 이선영이 있기 때문이었다.
한재영은 이들이 혹시라도 식사를 대접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었다. 즉 한재영이 ‘혹시’라고 가능성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게 지금 현실화한 상황이다.
태화가 한재영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문제없는 거지?”
“당연하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알았어.”
태화는 한재영에게 대답하고 나서 우영인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어디로 가면 되죠?”
#.
우영인은 태화를 비롯한 사람들을 규모가 꽤 큰 고깃집으로 안내했다. 고깃집은 규모도 컸지만, 분위기가 고급스러웠다. 식당은 커다란 홀과 함께 몇 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태화를 뺀 나머지 사람들은 홀에서 식사했고 태화는 이선영과 함께 방에서 단둘이 식사했다.
태화와 이선영이 방에서 단둘이 식사한 건 이선영의 제안이었고 태화도 이에 동의했다. 태화는 이선영이 이렇게 한 이유를 알기 때문이었다.
태화가 이선영에게 말했다.
“대표님. 이렇게 식사까지 대접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태화 씨.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내가 좋아서 그런 거니까.”
“아. 네.”
“일단 오늘 촬영 성공한 거 축하해.”
“네. 고맙습니다.”
“아까. 태화 씨 촬영할 때 지켜봤어.”
태화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지켜보셨다고요? 촬영장에 안 오셨잖아요.”
“그래. 건너편 카페에서 봤어. 괜히 촬영장에 가면 방해될 거 같아서.”
“아. 그러셨군요.”
“아까 지켜보는데 태화 씨의 모습에서 아빠의 모습이 보이더라고.”
“네? 영감님의 모습이 보였다고요?”
“태화 씨는 잘 모르겠지만 난 아빠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어. 아빠가 가끔 날 영화 촬영장으로 데려가곤 했었거든.”
그때였다. 박도봉 감독이 태화에게 말했다.
[그래. 그랬었지. 난 선영이를 촬영장으로 가끔 데려갔었네. 선영이가 꽤 똘똘했으니까.]
[혹시 이선영 대표가 영감님 뒤를 잇기를 바랐던 겁니까?]
[그렇네. 선영이는 뭐든 잘할 것 같았으니까. 비록 난 삼류 감독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래도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이 좋았었네. 당연히 재미도 있었고….]
[그래서 이선영 대표도 영감님이 느꼈던 걸 느끼게 해주고 싶었던 거군요.]
[자네 말이 맞네. 그리고 선영이라면 나보다 더 영화감독을 잘할 것 같았네. 하지만 선영이에게 영화감독이라는 옷은 맞지 않았어. 내 욕심이었던 거지.]
태화는 잠시 이선영이 영화감독이 된 걸 상상해 보았다. 이선영은 나름대로 잘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선영이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태화 씨. 아빠가 무슨 말 안 해요?”
“네. 하셨습니다.”
“뭐라고 하던가요?”
“영감님은 대표님이 자기의 뒤를 이었으면 했었답니다. 하지만 대표님과 영화감독은 맞지 않았다고 하시네요.”
이선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맞아. 난 아빠가 영화감독으로서 일하는 모습이 좋아했었어. 촬영 현장에서 보였던 그 열정적인 모습. 너무 멋있었거든.”
“…….”
“하지만 나하고 맞지 않더라고……. 그런데 태화 씨.”
“네. 대표님.”
“사람 참 간사하더라고.”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빠 그렇게 돌아가시고 나서 후회가 되더라고. 내가 영화감독으로 성공했다면 장례식장이 그렇게 썰렁하지 않았을 거 아냐? 게다가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생긴 공허함도 덜 했을 거고.”
순간 태화가 피식 웃었다. 그러자 이선영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혹시 아빠가 무슨 말을 한 거야?”
“네. 영감님이 그러네요. 진즉에 아빠 말 들었어야 했다고.”
태화의 말에 이선영이 큰소리로 웃었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