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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121화 (119/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21화

태화는 최수빈이 적절한 타이밍에 고개를 돌리게 하는 연출을 고안했다. 연기를 펼치는 최수빈도 어떻게 해야 할지 궁금해했었다.

-이 장면에서 어느 타이밍에 고개를 돌려야 하는 거야? 촬영 동선을 보면 내가 감독인 너한테 시선을 돌릴 수 없는데?

-신호를 내가 주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주게 해야지.

-다른 사람?

-그래.

태화가 고안한 방법은 태화가 신호를 주는 게 아니라 같이 연기하는 연기자의 대사로 신호를 주는 방식이었다. 이때 최수빈에게 신호를 주는 인물이 바로 곽지헌이다. 곽지헌은 현재 최수빈이 잡히는 화면에 잡히지 않는다. 앞선 장면에서 곽지헌이 상사에게 물어보기 위해서 뒤로 빠진 상황이 있기 때문이다. 태화는 화면에 잡히지 않은 곽지헌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곽지헌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다시 최수빈에게 다가와 대사를 쳤다.

-고객님.

-네.

-복권 줘보시겠습니까?

-네.

최수빈은 대사를 치고 나서 복권을 꺼내기 위해서 몸을 움직였다. 최수빈은 복권을 자신이 메고 있는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최수빈은 가방에서 지갑을 빼면서 고개를 무의식적으로 정원석이 있는 곳으로 돌렸다. 최수빈은 고개를 돌리자마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대사를 쳤다.

-오…… 오빠.

최수빈은 조금씩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최수빈의 행동을 본 곽지헌이 대사를 쳤다.

-고객님. 고객님.

이한철은 카메라를 움직여 정원석의 표정을 잡았다. 정원석이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 이 어이없는 년. 너. 좀 맞아야지?

최수빈은 정원석의 대사가 끝나기 무섭게 뛰기 시작했다. 정원석도 반사적으로 최수빈을 잡기 위해 뛰었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이한철도 정원석의 속도에 맞추어 같이 뛰기 시작했다. 최수빈은 얼마 못 가 정원석에게 잡혔다. 최수빈은 정원석에게 잡히자마자 소리치기 시작했다.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정원석은 재빨리 손으로 최수빈의 손을 틀어막았다.

-이게 어디서 소리를 치고 지랄이야? 죽으려고.

정원석의 손에 입이 틀어막힌 최수빈은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으으읍…….

정원석은 최수빈의 열려 있던 가방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최수빈의 가방에서 지갑을 꺼냈다.

-너무 억울해하지 마라.

-…….

-이 복권 원래 내 것이었잖아. 기억 안 나? 넌 나한테 쓰레기 줍는다고 잔소리했잖아.

태화는 손을 들어 화면 밖에서 연기를 준비하고 있던 오준식에게 신호를 보냈다. 태화의 신호를 받은 오준식이 고개를 끄덕이며 정원석에게 다가왔다.

태화는 카메라에 달린 모니터를 보며 오준식이 다가오는 타이밍을 계산했다. 자신이 계산한 시간에 맞춰 오준식이 정원석에게 다가왔다. 오준식은 사전에 맞춘 동선에 따라 더는 다가오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화면에 오준식이 나오기 때문이다. 태화는 모니터를 보며 타이밍을 계산했다.

‘지금이다.’

태화는 오른손을 들어 오준식에게 신호를 보냈다. 오준식은 다시 이동해 정원석에게 다가갔다. 모니터 화면엔 정원석이 최수빈의 지갑을 열려는 순간이 보였다. 그때 오준식이 정원석의 목을 졸랐다. 정원석은 갑자기 목이 졸리자 입에서 단말마가 나왔다.

-컥!

이한철은 카메라를 이동했다. 그러자 정원석과 정원석의 목을 조르는 오준식이 잡혔다. 오준식이 정원석에게 대사를 쳤다.

-이 양아치 새끼. 할 짓이 없어서 은행까지 따라와서 애인 지갑이나 빼가냐?

정원석은 목이 졸리자 얼굴이 빨개지며 괴로워했다. 오준식이 정원석의 목을 조르는 장면은 사전에 철저한 조율이 있는 장면이다. 오준식은 적당한 힘으로 목을 졸랐다.

그 힘은 아주 약하지도 강하지도 않았다. 정원석이 답답함을 느낄 정도였다.

여기에 정원석은 잠시 숨을 참았다. 숨을 참으면 그 반응으로 얼굴이 빨개진다. 정원석은 자기의 목을 조르고 있는 오준식의 팔을 풀기 위해 안간힘을 섰다. 손으로 오준식의 팔을 풀려고 했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오준식이 웃으며 말했다.

-잘 안 풀리지? 응? 내가 말이야. 그래도 군 생활 빡세게 한 사람이거든.

정원석의 입에서는 계속 컥컥거리는 소리가 나왔다. 이윽고 정원석은 손에 쥐고 있던 최수빈의 지갑을 놓쳤다. 이한철은 바닥에 떨어진 지갑을 비추고 나서 바로 최수빈을 향해 카메라를 돌렸다. 최수빈에겐 카메라가 돌아가는 순간이 신호다.

최수빈은 연기의 집중력을 놓치지 않았다. 최수빈은 신호가 떨어지자 재빨리 바닥에 떨어진 지갑을 손으로 집었다. 아직 가방은 지퍼만 열려 있을 뿐 최수빈의 어깨에 메여 있는 상태다. 최수빈은 바닥에서 주운 지갑을 재빨리 가방에 넣고 뛰기 시작했다.

이 부분은 촬영하기 며칠 전 수정이 된 부분이다. 원래는 최수빈이 은행 건물 주변에 숨고 최수빈을 정원석이 찾으러 다니는 장면이었지만 태화는 이 부분을 과감하게 날렸다. 현실적으로 이 장면을 찍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최수빈은 태화의 이러한 결정이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힘들게 연기 준비했는데…….

-미안하다. 많이 준비해 왔는데.

하지만 어쩌겠는가? 감독인 태화가 결정하면 최수빈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태화는 최수빈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하듯 말하지 않았다. 태화는 원래 계획했던 촬영이 힘든 이유를 최수빈에게 차분하게 설명했다. 그래서 최수빈도 아쉬우면서도 그 결정을 받아들였다.

정원석은 최수빈이 도망가는 모습을 보고서 더욱 발악했다. 정원석의 표정은 기절하기 직전의 표정이었다. 그 연기가 얼마나 리얼했는지 모니터를 보던 태화도 순간 정원석이 정말로 기절할 것만 같았다.

정원석은 기절할 것만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한편으론 감정을 폭발하고 있었다. 정원석의 얼굴엔 핏발이 서 있었고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정원석은 마지막 힘을 내 자기의 목을 조르고 있는 오준식의 팔을 깨물었다. 그러자 오준식은 비명을 질렀다.

-악!

오준식은 비명을 지르며 정원석의 목을 조르고 있던 손을 풀 수밖에 없었다. 정원석은 자기의 목을 조르던 손이 풀리자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카메라는 정원석의 시선으로 은행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순간 정지했다.

카메라에 최수빈이 도망가는 모습이 보였다. 정원석이 그 모습을 보며 외쳤다.

-이런 십팔.

정원석은 최수빈을 잡기 위해 뛰기 시작했다. 처음에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지만, 정원석은 금방 최수빈을 따라잡았다.

정원석이 도망가는 최수빈을 향해 소리쳤다.

-너! 거기 안 서!

하지만 최수빈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뛰었다. 그리고 손님을 기다리던 택시에 재빨리 올라탔다. 최수빈이 올라탄 택시는 촬영을 위해서 몇 시간 전세를 낸 택시다.

최수빈이 택시에 탄 후 몇 초 차이로 정원석이 도착했다. 하지만 정원석은 허탈할 수밖에 없었다. 최수빈이 탄 택시가 이미 출발했기 때문이었다.

정원석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최수빈이 탄 택시를 쳐다보며 외쳤다.

-아호! 씨팔!

모니터를 보던 태화가 큰소리로 외쳤다.

“컷!”

태화의 외침과 함께 정원석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만큼 에너지가 심하게 소모되었기 때문이다.

태화가 조승미에게 지시했다.

“승미 씨. 마실 것 좀 가져와요.”

“알겠습니다. 감독님.”

조승미가 마실 것을 구하러 간 걸 본 태화가 정원석에게 다가왔다.

“정원석 님. 잠깐 쉬고 계세요.”

“감독님. 제 연기 어땠어요?”

태화는 자기의 연기를 물어보는 정원석을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아주 잘했습니다.”

“그랬나요?”

“네. 연기는 나무랄 데가 없었습니다.”

“그랬다니 다행이군요.”

“아까 얼굴에 핏발이 선 연기는 압권이었습니다.”

“제때 감정이 폭발한 것 같군요.”

“그렇습니다.”

태화와 정원석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조승미가 생수를 들고 돌아왔다. 조승미가 생수를 정원석에게 건네며 말했다.

“정말 연기 훌륭했어요.”

“고맙습니다.”

태화는 조승미가 정원석에게 생수를 건네는 사이 카메라가 있는 곳으로 왔다. 이한철은 이미 촬영 시작점을 맞춰놓고 있었다. 태화가 이한철을 향해 말했다.

“한번 보죠.”

“오케이.”

이한철이 카메라의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태화는 방금 촬영한 장면을 모니터링하기 시작했다. 태화는 모니터링을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만큼 정원석의 연기는 괜찮았다.

태화는 모니터링을 마치고 박지형에게 무전을 쳤다.

“사운드 팀장님. 어떻습니까?”

-네. 별문제 없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감독님도요.

태화는 사운드 팀장과 무전을 마치고 나서 정원석에게 시선을 돌렸다. 태화가 정원석을 보며 말했다.

“오케이.”

태화의 말을 듣자 정원석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감독님. 고생하셨습니다.”

“정원석 님도요.”

그때였다. 택시에 내린 최수빈이 태화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최수빈은 택시를 타고 근처를 한 바퀴 돌고 온 상태다.

최수빈이 태화를 보며 말했다.

“감독님. 어떻게 됐어요?”

“오케이.”

최수빈은 태화의 대답을 듣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

태화와 조승미 이한철과 박주성 그리고 정원석과 최수빈은 은행 안으로 들어왔다. 은행 안으로 들어오자 기다리고 있던 스태프와 연기자들 태화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하기 시작했다.

-서태화! 서태화!

사람들은 태화를 연호하고 나서 정원석과 최수빈을 연호했다. 하지만 그 임팩트는 태화를 연호할 때보다 강하지 않았다. 태화는 왜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연호하는지 알고 있었다. 힘든 촬영을 성공적으로 마쳤고 그 중심에 감독인 태화가 있기 때문이었다.

[태화 군. 기분이 어떤가?]

[영감님.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하네요. 영감님도 이런 경험이 있습니까?]

[당연히 있었네. 자네처럼 구름 위를 걷는 듯했지. 하지만 이럴 때 사람은 겸손해야 하네.]

[단순한 조언 같지는 않습니다. 무슨 경험이 있었나요?]

[그렇네. 나도 한때 내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줄 알았네.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지. 사람은 교만해지기 쉬운 존재일세. 그리고 교만해지는 순간 자네에게 환호했던 사람들은 반대로 자네에게 등을 돌리게 될걸세.]

[영감님.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전 아직 교만해질 수준도 아니니까요. 그냥 저한테 저렇게 환호를 보내는 사람들이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다행이구먼.]

태화가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사람들의 연호도 잦아들었다.

태화는 스태프와 연기자들을 향해 깍듯하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오늘 촬영은 무척 어려운 과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공적으로 촬영을 마쳤습니다.”

“…….”

“그 성공엔 여러분들이 힘을 내주었기 때문입니다. 열악한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준 여러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촬영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태화는 시선을 은행 직원들이 있는 창구로 돌렸다.

“직원분들 오늘 힘들었을 텐데 촬영에 협조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태화는 말을 마치고 나서 은행 직원들을 향해 깍듯하게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태화가 인사하자 은행 직원들도 태화에게 박수를 치며 화답했다.

태화의 말이 끝나자 한재영이 소리쳤다.

“자. 이제 스태프와 연기자들 철수합시다.”

스태프와 연기자들은 한재영의 말에 따라 철수를 하기 시작했다. 태화가 자기 옆에 서 있는 조승미에게 시선을 돌렸다.

“승미 씨. 고생 많았어요.”

“네. 감독님.”

“승미 씨. 예상했던 것보다 잘했어요.”

“정말인가요? 혹시 뭐 예의상 멘트……. 그런 거 아니죠?”

태화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 전혀 그렇지 않아요. 물론 처음엔…….”

태화는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조승미가 궁금한 듯 태화에게 물었다.

“처음엔 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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