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20화
잠깐의 휴식 이후 촬영장은 다시 긴장감이 감돌았다. 태화가 스태프와 연기자들을 불러 모았다.
“자. 이제 한 씬 남았습니다. 다들 마지막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태화는 유리창 너머로 하늘을 보았다. 햇빛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이제 촬영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태화는 스태프와 연기자들에게 시간이 없다고 말하지 않기로 했다.
‘굳이 그걸 말할 필요는 없겠지. 괜히 부담감을 더 가질 테니까.’
태화는 촬영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 대신 사람들이 주의할 사항을 지시하기로 했다.
“먼저. 우섭아.”
이우섭이 태화의 호명에 바로 대답했다.
“네. 감독님.”
“우섭이는 내 신호가 가면 즉시 대기하는 연기자들에게 신호를 줘.”
“알겠습니다.”
“특히 이번 촬영은 합이 잘 맞아야 해.”
“잘 알고 있습니다.”
태화가 전윤석에게 시선을 돌렸다.
“전 팀장님.”
“네. 감독님.”
“정말 이번 촬영에서 미술 소품팀의 도움을 많이 받습니다.”
“하하. 뭐. 이런 걸로….”
태화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미술 소품팀이 외부 통제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현석아.”
“네. 감독님.”
“현석이는 외부에서 통제하는 걸 도와줘. 한 피디가 인력이 부족하다고 도와달라고 하더라.”
“알겠습니다.”
외부 통제는 미술 소품팀이 어느 정도 도와주고 있었지만 그래도 인력이 부족했다. 태화는 김현석 외에도 조승미가 데려온 학생 중 두 명을 더 지명했다. 태화는 배경을 채울 인원이 두 명 정도 빠진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될 거로 판단하지 않았다. 학생들도 태화의 지시에 순순히 따랐다. 영화에서 그냥 배경으로 나오는 것보다 현장 스태프로 일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태화는 말을 마치고 나서 한재영을 슬쩍 보았다. 한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자. 그럼 스태프는 각자 위치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태화의 지시가 떨어지자 스태프는 일사불란하게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후 태화는 정원석에게 다가갔다.
“정원석 님. 준비됐습니까?”
“네. 준비됐습니다.”
“정원석 님은 리허설 때보다 좀 더 욕심을 내도 됩니다.”
정원석 근처엔 최수빈이 있었다. 최수빈은 태화의 발언에 의아함을 느꼈다.
‘뭐야? 나한테는 욕심을 버리라고 하더니 정원석 님에겐 욕심을 내라고?’
최수빈이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최수빈은 태화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정원석에게 할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태화가 발언했다.
“최수빈 님도 들어요. 못 들은 척하지 말고.”
“흠흠.”
최수빈은 순간 자기도 모르게 헛기침이 나왔다. 태화에게 자기의 속내가 들킨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제가 최수빈 님에게 욕심을 부리지 말라고 한 건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습니다. 최수빈 님이 저번 씬에서 연기했던 장면은 내면 연기가 필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자칫 욕심을 부리면 안 한만 못한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했던 결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연기하게 될 정원석 님의 연기는 그와는 다릅니다. 정원석 님의 연기는 분노가 폭발하는 장면입니다. 정원석 님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폭발시켜야 합니다.”
태화의 설명을 들은 정원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독님 말이 맞아요. 영화에서 박성욱이 분노의 대상인 심수영을 처음으로 발견하는 장면이니까요. 눈깔이 돌아가지 않으면 이상하죠.”
태화는 정원석의 말을 듣고서 피식 웃었다. 정원석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태화에게 물었다.
“감독님. 왜 그러시죠?”
“정원석 님이 시나리오를 정확하게 봤기 때문입니다.”
“하하. 그런가요?”
“정원석 님. 첫날 촬영 기억하시죠?”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정원석이 첫날 촬영을 기억 못 할 리가 없었다. 그 첫 촬영에서 태화는 정원석의 잠재된 에너지를 폭발시키게 했다.
“정원석 님은 첫날 촬영으로 증명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욕심을 부려도 된다고 한 겁니다.”
“알겠습니다.”
태화는 시선을 돌려 최수빈을 보았다. 태화가 보기에 최수빈은 입을 삐죽거렸다.
뭔가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연기자들은 개성이 강한 존재들이다. 이러한 특징은 주연급으로 갈수록 더하다.
자기가 맡은 캐릭터나 연기가 다른 연기자에게 밀린다는 생각이 들면 시기나 질투를 하는 경향이 있다. 한마디로 시야가 좁다.
이럴 때 필요한 게 감독의 역할이다. 감독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이렇게 개성이 강한 연기자들이 조화롭게 가게 해야 한다.
가끔 영화를 보면 출연 배우들의 연기가 균형감을 잃은 채 진행되는 경우가 있다. 이건 바로 감독이 연기자들의 조화를 뽑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태화 군. 최수빈이 좀 삐친 것 같구먼.]
[그러게, 말입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아는가?]
[글쎄요.]
[바로 약속이네.]
[약속이요?]
[그렇네. 최수빈이 자신이 뭔가 손해 본 것 같은 감정을 가지는 건 어쩌면 당연하네. 연기자들의 시야가 좁은 건 어쩔 수 없으니 말일세.]
[그래서 그 감정을 상쇄시킬 수 있는 게 필요하다는 말이군요.]
[그렇네. 앞으로 최수빈 너에게 너의 매력을 어필할 수 있는 장면을 만들어 주겠다고 하는 것이네.]
[음.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현재의 불만을 미래의 가능성으로 상쇄시킨다는 말이군요.]
[그렇네.]
태화가 최수빈을 향해 말했다.
“최수빈 님은 조금만 기다려요.”
“네?”
“곧 에너지를 폭발할 시기가 올 테니까요. 그때 맘껏 욕심내셔도 됩니다.”
“맘껏 욕심내도 된다고요……?”
“그렇습니다.”
태화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최수빈으로서도 더는 뭐라고 할 수 없었다.
“알겠어요. 기대하죠.”
#.
태화는 촬영을 위해 연기자들의 배치를 끝냈다. 태화가 다시 한번 연기자들을 향해 말했다.
“리허설했던 대로 하면 됩니다. 다만 정원석 님과 연기하는 배우님들은 정원석 님의 연기에 당황하지 말고 응해주면 됩니다. 오준식 님.”
태화의 부름에 오준식이 대답했다.
“네. 감독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오준식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감독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그래도 연기 경력이 좀 됩니다.”
“그럼. 오준식 님 믿습니다.”
“네. 감독님.”
오준식은 이 순간 가슴이 뿌듯했다. 비록 단역 전문이지만 오준식은 연기 경력 15년의 베테랑이다. 그 긴 연기 경력에서 감독이 직접 자신에게 믿는다고 말하기는 기억에 손꼽을 정도다.
태화는 연기자들에게 지시사항을 마저 전달하고 은행 밖으로 나왔다. 이번에 찍을 씬은 정원석이 차를 몰고 와서 내리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정원석이 연기하면서 몰게 될 차량은 한재영의 차이다. 차량을 대여할 수도 있지만, 한재영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자신의 차를 기꺼이 소품으로 사용하도록 허락했다. 물론 그 이유엔 제작비 절감이 가장 큰 이유다. 하지만 이 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었다. 한재영의 차는 연식이 좀 있는 편이어서 영화 속 박성욱의 상황과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태화와 조승미 그리고 이한철과 박주성은 정원석이 차를 몰고 와서 정지할 위치로 이동했다. 태화가 무전기를 켰다.
“정원석 님.”
이번 촬영엔 정원석에게도 무전기가 지급됐다. 차를 몰고서 들어와야 해서 태화의 촬영 시작을 알리는 소리를 못 들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네. 감독님. 잘 들립니다.”
“무전기는 제가 액션을 외칠 때까지 켜 놓으세요.”
“알겠습니다.”
“자. 그럼.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네. 감독님.”
정원석은 대답하고 나서 자동차의 시동을 걸었다. 차의 시동 거는 소리는 무전기를 타고 태화에게도 그리고 무전기를 들고 있는 스태프에게도 들렸다.
태화는 자동차의 시동 거는 소리를 듣고서 외쳤다.
“올 스탠바이!”
“레디!”
태화의 외침 이후 박지형과 이한철이 각각 ‘스피드’와 ‘롤’을 외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승미가 촬영 순서를 외치며 슬레이트를 쳤다.
“씬 26에 일에 하나.”
“딱!”
태화가 마지막으로 외쳤다.
“액션!”
태화의 외침 이후 정원석이 차를 몰고 태화와 이한철이 있는 곳으로 차를 몰아왔다. 여기서 중요한 건 정원석이 몰아온 차는 급정거를 해야 한다.
급박한 상황에서 점잖게 차를 멈추는 건 말이 안 된다.
“끼이익!”
정원석이 탄 차가 거칠게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그런 후 정원석이 차에서 내려 카메라가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이한철은 카메라를 움직여 정원석의 표정을 잡았다.
정원석의 얼굴엔 분노의 표정이 역력했다. 정원석의 분노하는 연기를 탁월했다.
정원석은 분노의 표정을 연기하기 위해서 입술이 부르르 떨리는 걸 준비했는데 이 장면과 맞아떨어졌다. 정원석은 별다른 대사를 치지 않았음에도 그 표정만으로 자신의 심리를 잘 표현하고 있었다.
정원석은 은행 정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태화는 잠시 시선을 정원석이 차를 세웠던 곳을 바라보았다. 한재영이 재빨리 차에 올라탔다.
만약 이번 촬영에서 NG가 났을 때 다시 촬영할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다. 미리 촬영 시작 위치에 차량을 갖다 놓으면 그만큼 시간을 아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화면에 이러한 장면이 잡히면 안 된다.
태화도 이걸 계산하고 화면을 잡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태화는 상황을 보면서 적절한 시점에 이한철의 등을 살짝 쳤다. 태화가 이한철의 팔이 아닌 등을 친 건 간단한 이유다.
아무리 작은 힘이라도 이한철의 팔을 치게 되면 자칫 화면이 흔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태화가 이한철의 등을 살짝 치자 이한철도 바로 카메라를 움직였다.
이한철의 적절한 움직임에 한재영이 화면에 잡히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일단 문제없어.’
태화는 계속해서 촬영을 진행했다. 정원석은 잠시 멈춰서 은행 문을 바라본 후 이를 갈았다.
정원석의 이 연기는 분노의 감정을 한층 더 끌어올렸다.
-수영아. 제발. 여기 있어라. 나 그만 고생시키고.
정원석은 대사를 치고 나서 은행 안으로 들어갔다. 정원석은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카메라가 앞서 최수빈이 연기할 때와 달리 정원석의 시선으로 은행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카메라는 정원석이 시선을 돌리는 방향으로 카메라를 돌렸다.
정원석은 좌우로 시선을 돌리다 더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정원석이 대사를 쳤다.
-빙고.
정원석이 대사를 치고 나서 카메라가 정원석의 등 뒤로 이동했다. 그러자 오버 더 숄더 샷으로 화면이 바뀌었다.
화면에는 정원석의 어깨가 살짝 걸린 상태에서 은행 창구 앞에서 기다리는 최수빈의 모습이 잡혔다. 이때까지 최수빈은 정원석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 상태다.
최수빈은 현재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최수빈은 타이밍에 맞게 정원석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야 한다. 만약 롱테이크가 아니라 커트를 끊어서 촬영하는 방식이라면 이 지점에서 커트를 하고 나서 최수빈이 고개를 돌리는 장면을 찍으면 된다. 하지만 현재 이 촬영은 롱테이크다. 일반적인 방식과 다른 연출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