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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119화 (117/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19화

최수빈의 연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최수빈은 은행의 정문 앞에 섰다.

최수빈은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기대감과 불안감이 동시에 표현되어야 하는 장면이다.

이 심리를 표현하는 부분은 단순히 표정만으로 표현하기 힘들다. 태화는 그래서 하나의 장치를 마련했다.

그건 바로 나레이션.

촬영이 끝나고 후반 작업에 들어갈 때 나레이션이 추가될 예정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조금만 있으면…… 난 부자가 된다.

최수빈은 은행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 자기의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최수빈이 은행 문을 열고 들어가는 부분에도 태화의 연출 포인트가 있다.

동화 은행 서구지점 문은 자동문이다. 태화가 연출하려는 화면은 최수빈이 은행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시점에 안에서 다른 고객이 문을 열고 나온다. 그리고 최수빈과 그 고객은 서로 어깨를 부딪친다. 이 장면은 소위 말하는 클리셰다.

하지만 이 장면은 함축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은행이라는 공간은 일종의 사회의 정상적인 시스템이고 최수빈이 연기한 심수영은 아웃사이더로서 그 은행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다. 하지만 심수영이 그 문을 여는 것도 자신이 아니라 또 다른 이 즉 인사이더가 연다. 그리고 심수영은 이 인사이더와 부딪친다.

심수영과 부딪친 사람이 짜증을 내지만 심수영은 그 상황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즉 심수영이 부딪친 대상은 일종의 벽이고 심수영은 그 벽을 넘어 은행 안으로 들어가려 한다. 심수영은 아웃사이더에서 인사이더로 진입하려는 것이다.

어쨌든 태화가 이 장면을 제대로 연출하기 위해서는 타이밍이 중요하다. 최수빈이 문에 들어가려고 하는 시점에 안에서 단역 연기자가 문을 열고 나와 주어야 한다.

태화는 타이밍이 되자 자기의 오른손을 들었다. 은행 안에서 태화의 신호를 본 이우섭이 단역 연기자에게 손으로 신호를 보냈다.

이우섭의 신호를 받은 단역 연기자는 바로 이선정이다. 이선정은 이우섭의 신호에 맞춰 은행의 자동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마침 안으로 들어오려는 최수빈과 자연스럽게 어깨를 부딪쳤다.

최수빈은 이선정과 어깨를 부딪치자 외마디 소리를 냈다.

-앗!

최수빈은 외마디 소리를 냄과 동시에 살짝 옆으로 몸이 밀려났다. 모니터를 보던 태화는 순간 안도의 한숨에 내쉬었다. 언뜻 보면 쉬워 보이는 장면이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 부딪치는 타이밍과 최수빈이 내뱉는 외마디 소리 그리고 동시에 최수빈의 몸이 옆으로 밀려나는 건 타이밍과 과하지 않은 연기가 필요한 부분이다.

최수빈이 만약 과도하게 옆으로 밀려났다면 이 장면을 본 관객은 분명 실소를 흘리며 보게 될 것이다. 어쨌든 최수빈과 이선정의 합이 적절하게 잘 이뤄지면서 이 장면은 무사히 지나갔다.

‘수빈이도 그렇지만 이선정 님도 상당한 집중력을 보이고 있다.’

촬영은 계속 이어졌다. 최수빈은 자신과 어깨를 부딪친 이선정을 쳐다보았다. 이한철은 최수빈의 시선을 대변하듯 이선정을 잡았다. 이때 카메라 앵글은 로우 앵글이다.

최수빈의 현재 시선이라면 카메라의 앵글은 아이 레벨이 맞는다. 태화가 카메라를 로우 앵글로 설정한 건 최수빈의 심리적 시선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로우 앵글은 피사체보다 카메라 위치를 낮게 잡는다. 화면상 카메라에 잡힌 피사체는 권위적이고 위압적으로 보이게 된다. 그건 마치 피사체가 대상을 내려다보는 효과 때문이다.

이선정이 화를 내며 말했다.

-너, 뭔데 사람 꼬나보니? 왜? 억울해?

이한철은 살짝 뒤로 물러나 최수빈과 이선정을 투 샷으로 잡았다. 최수빈은 이선정의 말에 대꾸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과한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눈 똑바로 뜨고 다녀!

-네.

이선정은 최수빈을 잠깐 째려보더니 자신이 가려던 길로 걸어갔다. 최수빈은 이선정의 뒷모습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고 이한철은 카메라를 움직여 최수빈의 주먹 쥔 손을 정확히 잡았다. 최수빈은 주먹을 쥔 채 은행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한철은 카메라를 움직여 다시 최수빈의 얼굴을 잡았다. 최수빈의 표정을 잡기 위해서였다.

최수빈은 걸어가면서 시선을 좌우로 돌렸다. 혹시 박성욱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여기서 최수빈의 시선을 표현하기 위해서 카메라가 움직여야 한다. 연기자가 시선을 주면 관객은 당연히 그 연기자가 시선이 가는 곳을 궁금해하기 때문이다. 이게 소위 말하는 영상 문법이다. 하지만 태화는 계속해서 최수빈의 표정만을 잡게 연출했다.

일반적인 영상 문법을 따르지 않는다는 건 감독이 특별한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영화 속 심수영의 심리와 연관이 있다. 처음엔 불안한 심리로 은행에 들어온 심수영은 점차 은행 창구에 가까워질수록 표정이 바뀐다. 그건 바로 앞으로 펼쳐질 삶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다. 태화는 불안한 심리에서 기대감을 갖는 표정의 변화를 보여주기 위해서 일반적인 영상 문법에서 벗어난 연출을 결정했다.

최수빈은 얼굴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한철은 순간 카메라를 최수빈이 바라보는 곳으로 돌렸다. 그러자 은행 창구 직원이 웃으며 최수빈을 맞이했다.

-고객님.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은행 창구 직원 역할을 맡은 사람은 기존의 은행 직원이 아니라 태화와 같이 미니버스를 타고 온 젊은 여자 연기자로 이름은 곽지헌이다.

-저기…….

-네. 고객님.

-복권 당첨금 찾으러 왔습니다.

-복권 당첨금 말입니까?

-네.

-몇 등이십니까? 저희 본점에서는 일등 당첨금만 지급해 드리고 있습니다.

-일등이요.

-네?

순간 곽지헌의 표정이 살짝 어색해졌다. 관객에겐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표정이다. 그건 부러움일 수도 짜증일 수도 있었다. 곽지헌은 어색했던 표정을 뒤로하고 자신이 해야 할 대사를 쳤다.

-고객님.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얼마나 기다려야 하죠?

-네. 잠시면 됩니다.

곽지헌은 대사를 치고 나서 창구 뒤쪽에 직원들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상사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서다. 이한철은 카메라를 움직여 최수빈과 곽지헌의 투 샷에서 최수빈의 원 샷으로 화면을 만들었다. 최수빈은 손으로 자기의 볼을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태화는 모니터를 바라보며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컷!”

태화의 외침과 함께 은행 안의 사람들은 저마다 한숨을 내쉬었다. 촬영하는 동안 누구 하나 긴장감에 숨을 쉬는 것도 조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도 잠시.

태화는 방금 촬영한 내용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태화가 모니터를 확인하는 동안 또다시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태화는 방금 찍은 촬영분을 확인하고 나서 사운드 팀장 박지형에게 무전을 했다.

“팀장님. 오디오 어떻습니까?”

“확인 결과 문제없습니다.”

태화는 박지형에게 무전을 받고 나서 큰소리로 외쳤다.

“오케이!”

태화의 외침과 함께 은행 안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태화는 최수빈에게 다가갔다.

태화는 최수빈에게 조용히 말했다.

“수고했다. 연기 아주 좋았어.”

최수빈은 태화의 칭찬에 기분이 좋았지만, 입에선 다른 말이 나왔다.

“뭐. 그 정도야 기본 아냐?”

“뭐?”

“그냥 부담 없이 한 거야.”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부담을 좀 줄 걸 그랬나?”

“이미 늦었어. 지나가면 끝난 거 아냐? 낙장불입.”

“인정.”

태화는 최수빈과 대화를 나눈 후 같이 연기했던 곽지헌과 이선정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로 했다. 태화는 먼저 가까운 위치에 있던 곽지헌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곽지헌 님. 고맙습니다.”

“뭘요.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태화는 곽지헌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 후 이선정에게 다가갔다. 이선정은 곽지헌의 반응과 달랐다. 이선정은 태화에게 붙임성 있게 대했다. 이선정은 태화와 함께 자기의 스마트폰으로 셀카를 찍었다.

“감독님. 이 사진 나중에 가보가 될지도 모르겠어요.”

“네?”

“감독님이 성공하면 이 사진의 가치가 올라가지 않겠어요?”

“과찬이십니다.”

#.

동화 은행 서구지점 건너편엔 규모가 큰 프랜차이즈 카페가 있다. 그 카페는 2층짜리다.

카페 2층 창가 자리에 이선영과 우영인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선영은 작은 망원경으로 태화가 촬영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영인이 이선영에게 말했다.

“대표님. 차라리 촬영장으로 직접 가보시는 게.”

“그러면 부담될 거 아냐. 나중에 촬영이 끝나면 그때 가보지 뭐.”

이선영은 태화의 오늘 촬영에 관심이 많았다. 그건 이선영이 태화의 모습에서 언 듯 박도봉 감독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선영은 확인하고 싶었다. 촬영장에서 태화의 모습은 어떤지……. 그리고 이선영은 확인했다.

태화의 모습에서 젊은 시절의 박도봉 감독의 모습이 보인다는 걸.

박도봉 감독은 실제 촬영 현장에선 무섭게 집중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면서도 박도봉 감독은 스태프와 연기자들을 깍듯하게 대했다.

이선영은 비록 망원경으로 촬영 현장을 봤지만,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이선영도 한때는 박도봉 감독처럼 영화감독이 되는 게 어떨까 고민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선영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이선영은 영화감독으로서 자질이 부족했고 스스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박도봉 감독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선영에게 억지로 영화감독이 되라고 강요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선영은 박도봉 감독이 사망하고 나서 한동안 공허한 시간을 보냈었다. 그리고 이선영은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만약, 내가 아빠처럼 영화감독의 길을 걸었었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느닷없이 등장한 태화는 이선영의 이런 공허함을 날려버리기에 충분했다. 이선영이 망원경을 잠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런 후 이선영이 건너편에 앉아 있는 우영인에게 물었다.

“우비서. 궁금하지 않아?”

“뭐가 말입니까?”

“내가 서태화 감독한테 관심을 보이는 이유.”

우영인은 비서로서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비서는 대표의 측근으로서 필요할 때 조언을 하는 위치이면서 동시에 과도한 호기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이선영의 질문에 대한 우영인의 대답은 그런 비서의 자격에 합당했다.

“그건 대표님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결과로 말하겠죠.”

이선영은 가끔 주변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하곤 했다. 그 결정을 내리는 시점에선 주변 사람들은 그 결정을 말렸다. 하지만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그 결정이 옳은 것으로 증명이 되어왔다.

이선영이 우영인의 대답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날 믿어줘서.”

“별말씀을요.”

이선영은 시선을 다시 촬영장으로 돌렸다. 이선영이 테이블에 놓여있던 망원경을 다시 집었다.

“어머. 촬영 시작한다.”

이선영의 모습은 촬영장을 구경하며 신기해하는 소녀와도 닮아 있었다. 그 모습에 우영인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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