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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118화 (116/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18화

송윤주가 피식 웃으며 정원석에게 말했다.

“우리가 대화하는 게 재밌게 보였어요?”

“네. 무척 재미있게 보이던데요? 수빈 씨는 짜증을 내는 것 같은데 분장팀장님은 그걸 은근히 즐기는 것 같고.”

“그렇게 보였나요?”

“네.”

“아니에요. 그럴 리가 있나요.”

“그럼. 제가 잘못 본 거군요. 근데 말이에요. 팀장님.”

“네?”

“전 가끔 촬영장에 올 때마다 헷갈릴 때가 있어요.”

“왜요?”

“감독님이 지나치게 인기가 많아요. 배우인 저보다.”

정원석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거 뭔가 거꾸로 된 거 아닙니까?”

송윤주가 살짝 놀란 듯 말했다.

“어머. 그렇게 생각하셨어요?”

“그런데 이상한 건. 감독님은 밉지 않아요. 제가 이상한 건가요?”

송윤주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정원석 님은 전혀 이상하지 않아요.”

“네?”

“감독님은 뭐랄까.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어요. 아마 이 작품에 참여하는 사람들……. 감독님의 매력에 끌려서 참여하게 된 게 대부분일 거예요. 저도 그렇고요. 물론 시나리오가 좋아서이기도 하지만…….”

정원석이 최수빈을 보며 말했다.

“수빈 씨도 그랬어요?”

“뭐가요?”

“수빈 씨도 감독님의 매력에 이끌려서 이 작품에 참여했냐고요.”

“글쎄요. 전 시나리오 때문인 거 같긴 한데…….”

“그렇군요. 저도 처음엔 시나리오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요?”

“지금 생각해 보면 감독님이 처음 캐스팅하러 왔을 때부터 감독님의 뭔가에 끌렸었던 것 같아요.”

“네?”

“솔직히 아무리 시나리오가 좋다고 해도 감독의 역량에 따라서 그 결과물은 천지 차이잖아요. 그런데 감독님은 작품 경험이 없는 상태였고요. 그런데도 제가 감독님을 선택한 걸 보면 분장팀장님이 말한 그 매력 때문인 거 같아요.”

“아. 네.”

최수빈은 정원석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최수빈 자신이 태화를 선택한 건 리스크가 큰 선택이었다. 최수빈은 비록 여주라는 타이틀이 걸리긴 했지만, 얼마든지 안정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럼. 나도 태화에게 이끌려서 여기까지 온 것인가? 정말 그런 걸까?’

하지만 최수빈은 더는 생각할 수 없었다. 태화가 사람들을 불렀기 때문이었다.

“자. 다들 모이겠습니다!”

#.

태화는 모든 스태프와 연기자를 불러 모았다.

“자. 이제 촬영에 들어갈 겁니다. 촬영 전 지시사항을 전달하겠습니다.”

“…….”

“우선 오늘 촬영 시간은 짧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충분히 해내리라 믿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

“자. 그럼 지시사항을 전달하겠습니다.”

태화가 창구 뒤편에 있는 은행 직원들을 향해 말했다.

“우선 은행 직원분들.”

태화가 말하자 은행 직원들이 일제히 태화를 바라보았다.

“직원분들한텐 큰 부담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냥 지금처럼 하던 일 하시면 됩니다.”

태화의 말에 은행 직원들은 소리 내어 웃었다.

“자. 다음은 연기자분들입니다.”

태화는 단역 연기자라는 말보다는 연기자분들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태화의 이 단어 선택은 꽤 잘한 선택이었다. 연기자들이라는 말에 굳이 단역이라는 말을 앞에 붙일 필요가 없었다.

“아까 제가 지정해 드린 자리에 위치해 계시면 됩니다. 그리고 오준식 님하고 이선정 님.”

태화의 부름에 오준식과 이선정이 동시에 대답했다.

“네.”

“두 분은 주연 배우들과 연기를 해야 하므로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태화는 이어서 조승미가 데려온 학생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 모인 학생분들은 대사는 없지만, 역할은 꽤 중요합니다.”

학생 중 한 명이 손을 들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그냥 배경 아닌가요?”

어딜 가든 지금 학생처럼 다소 도발적인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학생 말이 맞아요. 배경이죠. 하지만 배경이 살아야 화면도 사는 겁니다. 만약 은행이 은행 같지 않다면 관객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그야……. 어이없어하겠죠.”

“바로 그겁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미래의 영화인으로서 어이없는 작품에 참여하고 싶지는 않을 겁니다.”

“그야. 당연하죠.”

“그러니까 애써 자기의 역할을 낮출 필요는 없습니다.”

태화는 시선을 질문한 학생에서 전체로 옮겼다.

“솔직히 저 아직 영화에 관해서 잘 모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합니다.”

“…….”

“여러분의 노력이 모여서 이 작품이 완성될 거란 점입니다. 그리고 전 여러분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거고요.”

‘여러분의 노력이 모여서’라는 말은 이곳에 모인 모든 사람 가슴에 작은 울림을 주었다. 태화의 말이 끝나자 정원석이 홀로 박수를 쳤다. 처음엔 홀로 친 박수이기에 어색했지만 이내 박수는 점점 퍼져 나갔다.

짝. 짝. 짝.

태화는 박수 소리가 잦아들자 큰소리로 외쳤다.

“자. 그럼.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

태화는 자기의 연출 계획대로 연기자들을 배치했다. 그리고 이미 리허설도 한 번 끝낸 상태다.

정원석, 최수빈 남녀 주연뿐 아니라 다른 연기자들도 자기가 맡은 배역에 충실히 임했다.

[태화 군.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준비가 된 거 같구먼.]

[네. 영감님. 어느 정도 그림이 나오는 거 같습니다.]

[그럼. 이제 시작하게나. 나도 이번 촬영은 기대가 크네.]

[그건 이번 촬영이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입니까?]

[그렇네. 특히 지금껏 촬영과는 달리 자네 여러 명의 연기자를 통제하고 연출해야 하네. 게다가 짧은 시간에 촬영을 끝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지. 아마도 자네가 가지고 있는 역량을 총동원해야 할 걸세.]

[그 정도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오늘 태화가 촬영할 장면은 크게 두 개로 나뉜다. 하나는 심수영이 복권을 들고서 당첨금을 찾기 위해 은행을 방문하는 장면이다.

또 다른 장면은 박성욱이 은행에서 심수영을 발견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심수영이 도망치고 박성욱이 뒤쫓는 장면과 커트 없이 바로 이어진다.

심수영이 복권 당첨금을 찾기 위해 은행을 방문하는 장면은 동선이 까다롭지 않고 평이하다. 대신 심수영의 이중적 심리가 표현되어야 한다.

복권 당첨금에 대한 기대감과 박성욱을 마주칠지 모른다는 불안감. 이 두 가지를 표현하는 게 관건이다.

태화와 조승미 이한철과 박주성 그리고 최수빈은 촬영을 위해서 은행 밖에 있는 상태다. 태화가 최수빈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수빈아.”

“왜?”

“한 가지만 부탁할게.”

“부탁?”

“그래. 부탁.”

“무슨 부탁?”

“이번에 찍을 장면. 너무 욕심내지 마.”

최수빈이 살짝 놀란 듯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최수빈이 이런 말을 하는 건 당연했다. 보통 감독은 연기자의 모든 걸 끌어내기 위해서 노력한다. 하지만 태화는 지금 그런 일반적인 통념에서 벗어나 있었다.

“욕심내지 말라는 말 진심이야? 혹시 반어법 같은 거 아냐? 그런 거 있잖아. 편하게 하라고 해놓고 나중에 딴소리하는….......”

태화는 최수빈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면 부담 없이 연기하라는 그런 의미?”

“아니. 전혀 그렇지 않아. 내가 방금 한 말. 액면 그대로 믿어도 돼.”

“도대체 이유가 뭐야?”

“충분하니까.”

“뭐?”

“리허설 때 수빈이 네가 보여주었던 연기면 충분해.”

“정말이야?”

“그렇다니까. 어떤 것이든 넘치는 건 좋지 않잖아.”

“넘치는 건 좋지 않다?”

“그래. 지금도 충분한데 거기서 더 욕심을 내면 부작용이 나타날 수밖에 없어.”

“그럼. 다시 한번 물어볼게. 지금 한 말 진심인 거지?”

“그래. 못 믿겠으면 녹음이라도 할래?”

태화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최수빈은 태화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감독인 네가 원한다면야…….”

최수빈은 태화의 말에 수긍했다. 감독이 방향을 설정하면 연기자는 따라갈 수밖에 없다.

사실 최수빈도 마음속으로 갈등하고 있었다. 실제 촬영에서 좀 더 욕심을 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어떻게 보면 태화가 최수빈이 가지고 있었던 고민을 해결해 준 셈이 되었다.

[태화 군. 방금 자네가 최수빈에게 한 지시 말일세. 현실을 고려한 것인가?]

[그렇습니다. 영감님. 실제 리허설 때 보여준 수빈이의 연기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실제 촬영에서 수빈이의 잠재된 것까지 뽑아내기엔 리스크가 있습니다.]

[하긴. 한정된 시간 안에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하는 현 상황에선 나쁘지 않은 결정이네. 최수빈이 좋은 연기력을 가진 배우라고는 하지만 잠재력이 어느 정도까지인지는 아직 모르니.]

[그렇습니다. 게다가 오늘 만약 촬영을 끝내지 못한다면 다시 은행 장면을 촬영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니까요.]

태화의 말처럼 만약 오늘 은행에서 촬영을 끝내지 못하면 재촬영은 물 건너간다고 할 수 있다. 다시 은행을 촬영 장소로 섭외하는 것도 힘든 데다가 스태프들의 스케줄이 더는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감독은 때로 자신의 욕심을 절제해야 할 순간을 직면하게 되네. 그때 어떤 판단을 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물은 많은 차이를 가져오게 되지. 난 자네의 판단을 존중하네.]

[이럴 때 영감님의 존재가 참으로 위로가 되는군요. 감독이 외로운 자리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네. 감독은 홀로 결단하고 책임져야 하는 외로운 자리지. 하지만 그만큼 보람도 큰 직업이기도 하네.]

[그렇습니다.]

태화는 유리로 된 창을 통해 은행 안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모든 스태프와 연기자가 태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태화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태화는 은행 안에서도 상황을 알 수 있도록 무전기를 켰다.

“자. 그럼 촬영 시작합니다. 이번에 촬영할 장면은 심수영이 복권 당첨금을 찾으러 은행으로 들어가는 장면입니다. 아까 리허설 때 맞춰본 대로 해주기를 바랍니다.”

태화는 발언을 마치고 나서 사람들에게 곧바로 촬영 시작을 알렸다. 태화의 목소리는 기운이 넘쳤다.

“올 스탠바이!”

“레디!”

태화가 외치자 사운드 팀장 박지형이 오디오 녹음 버튼을 누르며 외쳤다.

“스피드.”

이어서 이한철이 카메라의 녹화 버튼을 누르며 외쳤다.

“롤.”

이어서 조승미가 슬레이트를 든 상태로 촬영 순서를 외쳤다.

“씬 25에 일에 하나.”

“딱!”

마지막으로 태화가 외쳤다.

“액션!”

태화가 ‘액션’을 외치고 나서 몇 초 후 최수빈의 연기가 시작됐다. 최수빈은 빠른 걸음으로 은행 문 앞으로 걸어갔고 이한철은 최수빈을 따라가며 촬영했다.

최수빈은 걸어가면서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펴보며 걸어갔다.

이한철은 카메라를 적절한 타이밍에 움직여 최수빈의 불안한 표정을 잡아냈다. 이 순간 이한철의 카메라 워크는 거의 완벽했다. 태화는 카메라에 달린 모니터를 통해 최수빈의 표정 연기를 보았다. 최수빈의 시선 처리와 표정은 심수영의 심리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오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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