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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117화 (115/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17화

박지형과의 유쾌한 만남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차장 밖으로 이한철이 나왔다. 그 옆엔 조수인 박주성도 함께 있었다. 태화가 이한철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요. 이렇게 가끔 지방에 내려오는 것도 나쁘지 않죠.”

이한철이 옆에 있던 박주성에게 물었다.

“그렇지 않냐?”

“그렇긴 하죠. 운전만 하지 않으면요.”

태화가 피식 웃으며 박주성에게 말했다.

“주성 씨가 대전으로 내려올 때 운전을 한 모양이네요. 촬영 감독님이 잔소리하지 않던가요? 가령. 조심스럽게 차를 운전하라던가.”

“감독님.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아주 그냥 잔소리가…….”

이한철은 보기와는 달리 자기 밑에 있는 조수들에겐 격의 없이 대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조수인 박주성도 지금처럼 발언할 수 있었다.

이한철이 박주성에게 말했다.

“알았어. 올라갈 땐 내가 운전하마.”

“그럼. 안 하려고 했어요?”

“뭐? 이 자식이…….”

이한철은 박주성은 티격태격했다. 태화는 이 두 사람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두 사람의 모습에선 몇 년간 같은 일을 해온 사람들 간의 동료애가 보였기 때문이다.

이한철과 박주성이 서로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태화의 눈에 익숙한 차량이 보였다. 바로 송윤주의 차량이다.

송윤주가 태화 앞에 차를 세웠다. 송윤주가 차창을 열었다. 송윤주의 옆엔 조수인 나윤희가 앉았고 뒷좌석에 최수빈이 타고 있었다. 송윤주가 태화를 보며 말했다.

“사람들 많이 도착했네?”

“거의 다 도착했어요.”

태화는 보조석에 앉은 나윤희에게 인사를 건넸다.

“윤희 씨. 반가워요.”

“안녕하세요.”

“오늘도 잘 부탁해요.”

송윤주가 태화의 얼굴을 잠깐 살피며 말했다.

“근데. 얼굴이 아주 피곤해 보인다. 어쩜 좋아.”

송윤주는 학부 시절에도 태화에게 마치 친누나처럼 자상한 면이 있었다.

“전 괜찮아요. 이제 조금만 버티면 되잖아요. 근데 수빈이는요?”

“지금 잔다. 깨울까?”

태화는 뒷좌석에 있는 최수빈의 모습을 보았다. 최수빈은 말 그대로 곯아떨어져 있었다.

“아니. 그러지 마요. 자다 깨어난 모습 보이고 싶지 않을 거예요.”

“알았어. 차 주차시키고 깨우지 뭐.”

태화와 송윤주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이한철이 다가왔다.

“윤주야. 차 주차시키고 나와.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면 돼.”

“알았어.”

송윤주 일행이 도착하고 나서 얼마 후.

마지막으로 정원석이 도착했다. 이로써 모든 스태프와 연기자가 촬영장으로 무사히 도착했다.

#.

태화는 촬영에 들어가기 전 스태프, 연기자들과 함께 가까운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 식당은 한재영이 예약을 한 식당이다. 한재영이 대전에 먼저 내려온 것도 점심 점검을 하기 위해서였다. 적지 않은 인원이 점심을 먹기 때문에 미리 확인하고 점검해야 나중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태화는 점심을 먹고 나서 앞으로 있을 촬영에 관한 사항을 점검했다. 주연 배우인 정원석, 최수빈과 최종적으로 동선을 맞춰보았고 단역 연기자들에게도 은행에 들어가기 전 개략적인 연기 동선을 설명해 주었다.

태화가 깊은 인상을 받은 건 단역 연기자들의 태도였다. 단역 연기자들의 집중도는 주연 배우에 못지않았다.

[영감님. 정말 저 연기자분들 인상적입니다.]

[어떻게 보면 단역 연기자가 연기에 관한 열정이나 순수함은 주연급 연기자들보다 뜨거울 수 있네.]

실제 영화 현장에선 단역을 전문으로 하는 연기자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배역이 아무리 작더라도 영화가 좋아서 영화 현장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이다. 박도봉 감독이 이들이 주연급 연기자들보다 연기에 관한 열정이나 순수함이 있다고 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게다가 자네가 서울에서 출발할 때 보여주었던 겸손함이 저 사람들을 집중하게 만든 걸세.]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분들의 모습은 인상적입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어떤 말 말인가?]

[하찮은 배우는 있어도 하찮은 배역은 없다는 그 말 말입니다.]

[자네 말이 맞네.]

태화는 촬영 전 점검을 마치고 스태프와 함께 오늘 촬영이 있을 은행으로 향했다. 태화는 은행 영업에 방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마지막 고객이 밖으로 나올 때까지 은행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대기했다. 태화는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3시 30분. 그리고 이 시간에 맞추어 마지막 고객이 은행 정문을 나섰다.

태화가 대기하고 있던 스태프에게 몸을 돌렸다.

“자. 이제 우리들의 시간입니다. 안으로 들어갑시다.”

태화의 말에 스태프들이 대답했다.

“네.”

태화가 은행 안으로 들어가자 가장 먼저 담당자인 김연수가 반겼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네. 협조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실제 은행에서는 태화의 촬영에 도움을 주기 위해 문 앞에 안내문도 붙였다.

-오늘은 정확히 3시 30분에 창구 업무를 종료합니다. 고객님들의 양해 부탁드립니다.

태화가 김연수에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한 가지만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뭔가요?”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여기 직원분들 영화에 나올 수도 있습니다.”

“아. 이미 직원들한테는 알렸습니다. 그런데 무슨 대사를 하거나 그런 건 아니죠?”

“네. 그냥 평소처럼 일하시면 됩니다.”

“그런 거면 괜찮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럼. 전 제 자리로 가겠습니다. 업무가 좀 있어서.”

“알겠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태화가 김연수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스태프들이 재빨리 촬영을 위한 세팅 작업을 했다. 스태프들은 능숙한 솜씨로 촬영 준비를 해나갔다.

스태프들의 촬영이 어느 정도 끝나자 태화가 옆에 있던 김현석에게 지시했다.

“현석아.”

“네. 감독님.”

“우섭이한테 연기자들 올려보내라고 해.”

“알겠어요.”

김현석은 태화의 지시를 받자마자 바로 이우섭에게 연락을 취했다.

“우섭이 형. 지금 연기자들 올려보내랍니다.”

김현석이 연락하고 얼마 되지 않아 지하주차장에서 대기하고 있던 연기자들이 은행 안으로 들어왔다.

연기자는 정원석과 최수빈을 비롯한 주연 연기자 외에 오늘 미니버스를 타고 온 단역 연기자들이다. 연기자들 숫자를 합하면 꽤 숫자가 되었지만 비교적 넓은 공간을 채우기엔 부족했다.

이럴 때 쓰는 방법이 바로 여유 스태프를 활용하는 것이다. 실제 영화 현장에선 촬영, 사운드, 조명 등 기술 스태프는 필수인력으로 자리를 지켜야 하지만 그 외 인력은 여유가 있다. 그래서 이들을 배경을 채우는 일이 필요할 때 최후의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일 뿐이다. 태화는 이미 이에 대해 준비를 해놓고 있었다.

한재영이 태화에게 다가왔다.

“그런데 승미 씨가 좀 늦는데? 연락해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승미 씨는 내가 임무를 준 게 있어.”

“임무?”

“응.”

“그게 뭔데?”

한재영은 눈치가 빨랐다. 태화가 조승미에게 어떤 임무를 줬는지 알 것 같았다.

“혹시?”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게 맞을 거야.”

태화의 말에 한재영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하하. 너 진짜 이곳에서 빼먹을 건 다 빼먹는구나.”

“그렇게 안 하면 우리 같은 예산에 촬영할 수 있겠냐?”

“그건 네 말이 맞는다.”

그때였다. 은행 정문을 열고서 조승미가 안으로 들어왔다.

“감독님!”

#.

조승미의 목소리엔 힘이 넘쳐 있었다. 태화는 조승미의 목소리를 듣고서 알아챘다.

조승미가 자신이 준 임무를 완수했다는 걸.

태화가 조승미를 보며 말했다.

“승미 씨. 어서 와요.”

조승미가 태화에게 말했다.

“감독님. 전에 감독님이 저한테 내린 임무 완수했어요.”

“표정을 보니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한 거 같은데요?”

“당연하죠.”

조승미는 자기의 손으로 손수 은행 문을 열며 소리쳤다.

“안으로 들어와!”

조승미의 외침과 함께 이십여 명 정도 되는 대학생들이 우르르 은행 안으로 들어왔다. 태화와 한재영은 대학생들의 모습을 보며 웃음이 절로 나왔다.

한재영이 태화를 보며 말했다.

“저 정도면 충분하겠는데?”

“응. 아주 충분하지.”

조승미가 태화에게 쪼르르 다가와 말했다.

“감독님. 어때요?”

“아주 잘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이 사람들을 구한 거죠?”

“같은 학부 사람들이랑 동아리 사람 긁어모았죠.”

“승미 씨 덕에 한숨 덜었어요. 고마워요.”

“얘들도 궁금해하더라고요. 이렇게 초저예산으로 장편영화를 찍을 수 있는지.”

승미와 같은 학부라면 영화 전공자다. 미래의 영화인으로서 초저예산으로 영화를 제작하는 게 당연히 궁금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보면 자기들이 가까운 미래에 할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승미 씨. 꽤 영리한데요?”

태화의 이 발언은 진심이었다. 태화가 보기에 조승미는 꽤 야무진 구석이 있었다.

조승미는 태화의 칭찬에 우쭐해졌다. 영화 현장에서 감독한테 칭찬받는 건 일반 회사에서 사장한테 칭찬받는 것과 같다. 조승미로선 당연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다.

태화도 조승미에게 뭔가 답례를 해야 한다. 하지만 그건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비록 하루짜리 스태프라도 제대로 일을 맡기는 게 답례라면 답례다.

태화는 김현석을 불렀다.

“현석아!”

“네. 감독님.”

김현석이 대답을 하고 나서 태화 앞에 섰다.

“현석아. 오늘 하루 스크립터 역할은 승미 씨가 한다.”

“알겠습니다.”

김현석은 태화의 말에 당황하지 않았다. 태화가 미리 김현석에게 언질을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화는 조승미에게 어떤 역할을 맡길지는 말하지 않았다.

조승미는 자신이 스크립터를 맡는다는 말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정말요?”

“네. 오늘 많이 배워가요.”

스크립터는 감독 옆에서 직접 감독을 보좌하는 역할이다. 그래서 많은 걸 배울 수 있는 포지션이기도 하다.

#.

최수빈은 고객들이 앉는 자리에 앉은 채로 태화와 조승미의 모습을 보았다. 최수빈은 왠지 태화와 조승미의 모습이 거슬렸다. 최수빈은 바로 옆에 있는 송윤주에게 물었다.

“언니. 쟤 뭐야?”

“쟤? 여기 은행 지점장 딸이라고 하던데?”

“지점장 딸?”

“응. 영화과 다닌다는데 오늘 하루 스태프로 참여한다나 봐. 뭐 그런 거 있잖아.”

“주고받는 거?”

“그렇지. 아빠는 태화가 은행에서 촬영하는 거 협조해 주고 대신 딸은 스태프로 참여하게 하는 거.”

송윤주가 말을 하고 나서 최수빈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왜? 질투라도 나니?”

“질투는 무슨…….”

“태화하고 저렇게 다정한데?”

태화와 조승미는 송윤주의 말처럼 계속 웃으면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언니! 자꾸 쓸데없는 말 할 거야?”

“야. 너 좀 이상해.”

“뭐가?”

“오늘 왜 이렇게 예민해?”

“그야. 뭐……. 몸도 좀 피곤하고 하니까.”

“피곤하니까 그렇다?”

“응. 그렇다니까.”

“응. 알았어. 오늘 수빈이가 많이 피곤한 모양이네.”

송윤주의 말투는 소위 말해서 영혼 없는 말투였다. 최수빈도 송윤주의 이런 말투를 알아챘다.

“근데 언니 말투가 좀 그래?”

“뭐가?”

“내 말 안 믿는 말툰데?”

“에이. 그럴 리가 있나? 나야 당연히 네 말을 믿지.”

그때였다. 정원석이 최수빈과 송윤주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무슨 대화를 두 분이 그렇게 재밌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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