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16화
태화 일행과 연기자들의 좌석 배치는 차량 앞쪽에 태화와 이우섭, 그리고 김현석이 자리하고 연기자들은 그 뒤에 앉았다.
태화는 자리에 앉자마자 피곤함이 몰려왔다. 그래서일까?
태화는 자신도 모르게 길게 하품을 했다. 하지만 태화는 하품하면서 크게 소리를 내거나 하지 않았다.
[태화 군. 많이 피곤한가?]
[뭐. 좀 피곤하긴 하네요.]
[그럴 만도 하지.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게나.]
[그러기 전에 잠깐 할 일이 있습니다.]
[할 일? 자네가 할 일이란 게…….]
[아마도 영감님이 생각하는 걸 겁니다. 눈을 붙이는 건 그다음에 하기로 하죠.]
태화는 버스가 출발하자 몸을 일으켜 연기자들을 향해 섰다. 그런 후 태화는 연기자들을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여러분.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어느 지위에 있건 중요한 건 바로 그 사람의 태도다. 태화는 감독이고 영화를 제작하는 현장에선 최고의 위치다. 그 최고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단역 연기자들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감독의 정중한 인사를 받은 연기자들은 당연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뭔가 자신들이 대우받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서다.
태화가 정중히 인사하자 연기자들의 반응이 바로 왔다. 버스 가장 뒤쪽에 앉아 있던 중년의 남자 연기자인 오준식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이고. 감독님. 고생은요. 고생은 감독님이 많이 하셨지.”
이번에는 다른 자리에 앉은 중년 여성 연기자 이선정이 말을 받았다.
“그러게요. 감독님 얼굴 상한 거 봐.”
태화는 연기자들의 반응에 활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봐주시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오늘 촬영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태화의 말에 오준식이 대답했다.
“아. 그럼요. 우리 오늘 화끈하게 감독님 도와줍시다.”
오준식의 말에 버스에 탄 연기자들이 소리를 내며 웃었다. 웃음이 잦아들자 태화가 마지막으로 발언했다.
“다들 감사드립니다. 그럼. 다들 편히 쉬십시오.”
태화는 말을 마치고 나서 다시 자기 자리에 앉았다. 태화가 단역 연기자들에게 정중한 태도를 보인 건 오늘 촬영이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은행 업무가 끝나고 바로 촬영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다. 은행이 쉬는 날 촬영을 해도 되지만 그렇게 되면 더 많은 엑스트라 연기자를 섭외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엔 제작비에 여유가 없었다. 차라리 은행 업무 이후에 촬영하는 게 낫다.
그건 은행 직원을 소위 말하는 배경으로 바로 쓰면 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태화는 비교적 짧은 촬영 시간에 맞춰 만반의 준비를 한 상태였지만 변수는 단역 연기자들이었다.
이 사람들이 현장에서 잘 맞춰줘야 촬영이 효율적으로 돌아간다. 특히 태화의 작품이 롱 테이크로 촬영하기에 더욱 그렇다. 박도봉 감독도 이러한 사실을 알기에 태화가 했던 행동을 생각했었다.
[태화 군. 방금 자네가 했던 행동. 잘한 행동일세. 지금 생각해 보니 타이밍도 좋았던 것 같네. 나는 대전에 도착해서 해도 된다고 생각했었네. 그래서 자네에게 눈을 붙이라고 한 것이고…….]
[저도 영감님과 같은 생각을 했지만……. 차라리 출발할 때 하는 게 나을 거라는 판단이 들었어요. 어차피 인사도 할 거였으니까. 차라리 정중하게 인사하면서 부탁하는 게 나을 거라고 판단했어요.]
[아주 좋은 판단이었네.]
태화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태화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던 이우섭이 염려하는 말투로 말했다.
“형. 잠깐 눈 좀 붙여요. 무슨 일 생기면 바로 깨울게요.”
“그래. 알았어. 무슨 일 생기면 깨우고.”
“알았어요.”
태화는 자기의 머리를 의자에 마저 기대었다. 그러자마자 태화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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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 형. 일어나요. 형.”
태화는 이우섭이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다.
“음. 그래. 우섭아.”
“형. 거의 다 도착했어요.”
태화는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태화의 눈에 익숙한 도로와 풍경이 보였다.
‘익숙한 풍경이 될 만하지. 벌써 네 번째 오는 거니까.’
맨 처음 이선영을 만나고 나서 그리고 좀 더 시간이 지나서 장소 촬영을 위해서, 그리고 이틀 전, 그리고 오늘.
이 도로와 풍경이 익숙하지 않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할 정도다. 이제 몇 분만 더 가면 촬영 장소인 동화 은행 서구지점에 도착한다.
“우섭아. 현석이는?”
이우섭이 김현석이 있는 자리를 한 번 보고 나서 대답했다.
“녀석 자고 있어요.”
“피곤하겠지. 더 자게 둬.”
“알았어요.”
“근데 우섭이 넌 안 피곤해?”
“저도 중간에 잠깐 잠이 들긴 했어요. 많이 잔 건 아닌데 지금은 개운해요.”
“녀석 체력은 좋아.”
“크크. 저의 장점 아니겠습니까?”
태화와 이우섭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동화은행 서구지점이 태화의 눈에 들어왔다. 그건 이우섭도 마찬가지다. 이우섭이 자는 김현석을 깨웠다.
“현석아. 일어나라.”
김현석은 피곤했는지 바로 일어나지는 못했다. 이우섭이 몇 번 더 깨우자 그제야 눈을 떴다.
“지금 어디예요?”
이우섭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어디긴 목적지지.”
“벌써 다 왔어요?”
“너 아주 잠을 잘 잤나 보다?”
“아니. 뭐…….”
“어쨌든 정신 차려. 태화 형은 진즉에 일어났어.”
김현석은 태화가 일어났다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그래요? 그럼 나도 정신 차려야죠.”
김현석은 한껏 기지개를 켰다. 태화는 이우섭과 김현석의 모습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두 사람의 대화가 재밌어서가 아니었다.
두 사람이 고마웠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버텨주었고 앞으로도 버텨줄 것이기에…….
태화가 탄 미니버스가 은행 근처에 도착하자 먼저 도착한 한재영의 모습이 보였다. 한재영이 손을 흔들어 미니버스를 지하 주차장으로 유도했다.
태화는 불과 몇 시간 만이지만 한재영이 너무도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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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와 이우섭, 그리고 김현석은 미니버스에서 내렸다. 연기자들은 일단 미니버스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마땅히 대기할 만한 곳이 없기 때문이었다.
태화 일행은 미니버스에서 내려 주차장 밖으로 나왔다. 태화 일행이 밖으로 나가자 한재영이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야. 몇 시간 만에 보는데 이렇게 반갑냐?”
태화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다.”
이우섭과 김현석도 각자 한재영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형. 고생했어요.”
“형. 보고 싶었어요.”
한재영이 이우섭 김현석 두 사람에게 말했다.
“너희들도 고생 많았다.”
태화가 한재영에 물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근처에 도착했어. 미술 소품팀은 이미 도착했고.”
“아무래도 그렇겠지.”
“근데 작업 깔끔하게 잘해놨더라.”
“그래?”
태화는 한재영의 말을 듣고서 얼굴에 기대감이 서렸다. 한재영은 프로들과 작업을 해봤고 그 결과물을 경험한 사람이다. 그래서 한재영은 눈높이가 제법 있었다. 어설프게 작업한 결과물을 가지고 잘해놨다고 할 사람이 아니다.
“그럼. 한번 보러 가야지.”
태화는 재빨리 은행으로 향했다. 뒤이어 한재영과 이우섭, 그리고 김현석도 태화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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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는 은행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자기의 눈을 의심했다. 그전에 밋밋했던 공간은 오간 데 없고 세련된 공간이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밋밋했던 공간을 세련된 공간으로 만든 건 바로 색이었다. 은행 창구가 있는 데스크가 그전에는 하얀색으로 밋밋했는데 그 부분을 네이비 색으로 꾸몄다.
네이비 색으로 데스크 전체를 꾸몄다면 오히려 촌스러웠을 것이다. 미술 소품팀은 네이비 색의 시트지를 마치 띠처럼 만들어서 데스크를 꾸몄는데 그것만으로도 세련된 모습을 연출했다.
은행 내부의 모습을 처음 본 이우섭과 김현석도 바뀐 은행 내부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이우섭이 감탄하며 말했다.
“이게 바로 프로의 실력이군요.”
뒤이어 김현석이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며칠 전에 왔을 때와 완전히 다른데요?”
그때였다. 작업의 실무적 책임자인 이형준이 태화 일행이 있는 곳으로 왔다.
“감독님. 마음에 드십니까?”
“아. 네. 아주 좋군요. 마음에 들어요.”
“감독님이 말한 대로 작업했을 뿐입니다.”
“그런가요?”
“저희는 감독님이 원하는 대로 만드는 게 일이니까요.”
태화가 이형준에게 주문했던 건 한 가지였다. 은행이라는 공간을 세련되게 보이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태화가 세련되게 보이게 해달라고 한 건 일종의 눈속임 같은 것이었다. 동화은행 서구지점이 꽤 규모가 큰 은행이라고는 하지만 태화가 원래 섭외하려고 했던 은행의 본점에 비하면 그 규모는 작을 수밖에 없다. 그럴 바엔 관객의 눈을 다른 곳으로 잡아둘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전략은 바로 박도봉 감독의 조언이기도 했다.
[관객이 은행의 스케일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선 시각적으로 다른 볼거리를 제공해야 하네.]
[그것이 바로 색이군요.]
[그렇네. 색이란 건 바로 눈에 띄는 것이니까.]
[그래서 관객의 시선을 붙잡을 수 있다는 말이군요.]
[그렇네. 하지만 무조건 강한 색을 쓴다고 다가 아니네. 오히려 역효과가 나니 말일세.]
[그 색은 당연히 공간과 어우러져 세련된 느낌을 주어야 하겠죠.]
[그렇네. 중요한 건 바로 세련미네.]
태화가 이형준을 보며 말했다.
“너무 겸손하시군요. 오히려 제가 주문했던 내용이 너무 추상적이었는데요.”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감독님이 네이비 색을 직접 지정해 주지 않았습니까? 네이비 색은 보수, 안정 및 권위를 상징합니다. 은행의 이미지와도 어느 정도 맞고요. 그런데 감독님?”
“네.”
“혹시 색상을 공부하신 겁니까?”
영화감독은 연출을 위해 다양한 예술적 장르를 공부한다. 그중 사진과 색상은 영화감독이 가장 많이 공부하는 분야이기도 하다.
특히 색상은 그 존재만으로 등장인물의 심리나 영화적 분위기를 좌우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다. 그렇기에 태화도 색상에 관한 공부를 꾸준히 해왔다. 하지만 태화는 상대에게 대답할 땐 겸손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특히 상대는 미술 관련 일만 몇 년 이상 해온 프로다.
“아직 깊이 있게 공부하진 않았습니다. 그냥 저의 얕은 지식이 상황과 맞았을 뿐입니다.”
“어쨌든 전 감독님이 꽤 감각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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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는 은행 안을 기분 좋게 둘러보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태화가 밖으로 나오자 도착한 스태프들이 주차장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태화는 재빨리 스태프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다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사운드 팀장 박지형이 긴 머리를 휘날리며 태화에게 인사했다.
“감독님도 고생이 많아요.”
태화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고생보다는 오늘 촬영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역시 감독님이네요. 전 감독님의 그 에너지가 좋습니다.”
“저는 팀장님의 그 찰랑거리는 긴 머리카락이 좋습니다.”
태화의 농담에 박지형뿐만 아니라 주위의 스태프들도 순간 빵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