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14화
방 안의 사람들은 조승미의 대답에 기대하고 있었다. 그 기대란 다른 게 아니다.
뭔가 빵 터지게 할 그런 대답이었다.
“음…….”
조승미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약간 뜸을 들였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더 조승미의 대답을 기대했다. 그리고 조승미가 입을 뗐다.
“저분은 좀…….”
태화가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조승미에게 물었다.
“왜요?”
“포스가 좀 있는 거 같아요.”
“포스가 느껴진다고요?”
조승미의 대답에 이우섭은 잠시 우쭐함을 느꼈다. 하지만 이어지는 조승미의 대답에 이우섭은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네. 저분 좀 무섭게 생기셨잖아요.”
조승미의 반전 대답에 방 안의 사람들은 다시 한번 빵 터졌다. 이우섭은 괜히 좋다가 말았다.
어쨌든 이우섭은 졸지에 나이 많아 보이고 무섭게 생긴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우섭은 순간 화를 내기도 그렇다고 마냥 웃기도 애매했다. 이우섭은 자리가 자리인지라 화를 낼 수 없었다.
지금 이 자리가 어떻게 만든 자리인가? 태화가 어렵게 성사한 자리다. 만약 자신이 여기서 화를 낸다면 이 자리의 분위기는 차갑게 식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마냥 웃는다?
그건 이우섭 자신이 너무 초라해지는 것 같았다.
이우섭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 무렵. 조성찬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이우섭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아. 이거 실례가 많았습니다. 얘가 철부지라.”
조성찬이 조승미를 매섭게 보며 말했다.
“어서 사과드리지 못해!”
조성찬의 말에 조승미가 이우섭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죄송합니다.”
조성찬의 사과에 이어 조승미의 사과가 이어지자 이우섭도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죠. 그런데 저…….”
조승미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네?”
“겉모습은 그래도 속은 꽉 찬 사람입니다.”
“네?”
#.
태화 일행은 점심 식사를 마치고 식당 밖으로 나갔다. 조성찬은 외부 약속 때문에 그리로 이동했다. 우영인도 회사로 복귀해야 했다.
우영인은 그녀가 맡은 바 임무를 잘 수행했다. 그녀가 오늘 임무는 조성찬과 태화의 만남이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우영인은 적절하게 그 역할을 해냈다. 그걸 알기에 태화는 우영인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우 비서님. 오늘 고마웠습니다. 우 비서님이 계셔서 지점장님과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별말씀을요. 저는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대표님에게 안부 전해주세요. 신경 써주셔서 고맙다는 말도 전해주시고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영인은 조승미를 보며 말했다.
“승미 씨. 어디 갈 거면 나하고 함께 가요. 내가 근처까지 바래다줄게요.”
우영인의 제안에 조승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전 남겠습니다.”
“남겠다는 건?”
조승미가 태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감독님이 괜찮다고 하면 같이 움직이고 싶은데요?”
태화는 조승미를 보며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감님 생각은 어떠세요?]
[자네의 판단은 어떤가?]
[조승미가 식당에서 했던 발언은 좀 가벼웠습니다. 그래서 전 조승미가 촬영 당일 현장에 그냥 놀러 오는 거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점장 딸이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적당히 갑질을 하면서……. 그래서 전 적당히 그 분위기에 맞추려 했습니다. 어쨌든 촬영은 진행이 되어야 하니까요.]
[하지만 조승미는 오늘 어디 가지 않고 자네와 함께하는 걸 선택했네.]
[그러니까요. 제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선택이었습니다.]
[난 조승미가 위선적인 행동을 한다고 판단하지 않네. 조승미는 오히려 직설적인 성격이라고 볼 수 있네.]
[직설적인 성격이라……. 그런 것도 같군요. 아까도 자기의 생각을 필터링 없이 말했잖아요.]
[조승미는 직설적인 성격을 가질 만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집안의 외동딸일세. 분명 애지중지 키웠을 걸세. 지점장 조성찬이 딸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 굳이 자네에게 청을 넣은 거 아닌가?]
[충분히 그럴 만한 배경이군요.]
[직설적인 성격이 상황에 따라 때로는 가벼운 사람으로 비칠 수도 있네. 난 자네가 굳이 조승미를 피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데?]
[그렇죠. 굳이 피할 필요는 없죠. 하지만 조건은 필요하죠.]
[조건이라……. 그 조건은 이우섭을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이거야말로 제가 임의로 결정할 사안이 아니죠. 조승미가 오늘 계속 따라다닌다면 가장 불편할 사람이 우섭이니까요.]
[음. 자네 말에 일리가 있네. 감독은 스태프의 마음을 헤아릴 필요가 있지. 특히 지금 같은 경우엔 더욱더 말일세.]
태화가 조승미를 보며 말했다.
“승미 씨. 그 말 진심이에요?”
조승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감독님. 제가 식당에선 다소 엉뚱한 이야기를 했지만, 영화에 관한 생각은 진심입니다.”
“좋아요. 하지만 대신 조건이 있어요.”
“조건이요?”
태화가 이우섭을 가리켰다. 한재영과 이우섭, 그리고 김현석은 태화와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그건 우영인과 조승미가 있기 때문이었다.
세 사람은 태화가 이 두 사람과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다.
“우섭이가 괜찮다고 하면 그렇게 할게요.”
“저분한텐 아까 사과했는데요?”
“사과는 했다고 하지만 마음 한구석엔 상처가 남았을 수도 있죠. 처지를 바꿔서 승미 씨가 나이 들어 보이고 무서워 보인다고 누군가 말했다고 해보세요.”
“그럼. 가만 안 두죠.”
“그러니까요. 잘 생각해 봐요. 승미 씨가 절 따라다닌다는 건 우섭이하고 계속 동행한다는 말이기도 해요. 승미 씨가 우섭이라면 마음이 편할까요?”
태화와 조승미가 대화하는 걸 우영인은 곁에서 유심히 지켜보았다. 우영인은 이 대화를 보면서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태화를 다시 평가하고 있었다.
우영인에게 태화의 존재는 어느 날 갑자기 낙하산처럼 떨어진 인물이었다. 그래서 내색하지 않았지만 우영인은 이선영의 비서로서 태화를 속으로 경계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태화가 보여주는 모습은 좋은 리더가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우영인은 자기 사람을 잘 관리하는 것이 바로 좋은 리더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기 사람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그 조직은 붕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습은 자신이 모시고 있는 이선영의 모습이기도 했다.
‘혹시 대표님은 서태화 감독에게서 자기의 모습을 본 건 아닐까?’
#.
태화는 조승미에게 고민할 거리를 던져주었다고 판단했다. 만약 조승미가 자신이 말한 대로 영화에 관해서 진심이라면 이우섭이 자신을 받아들이도록 해야 한다.
태화는 조승미가 결심하는 데 시간이 걸릴 거로 생각했지만 이건 태화의 오판이었다. 그녀는 결심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감독님. 제가 어떻게 하면 되죠?”
태화는 조승미의 생각보다 빠른 결심에 살짝 놀랐다.
[영감님. 조승미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결심이 빠르군요.]
[어찌 보면 거침이 없다는 것이기도 하겠지. 그건 아마도 삶의 배경과 관련이 있을 걸세.]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말을 금방 이해했다. 태화의 학창 시절에도 그런 부류가 있었다. 항상 자신감이 넘쳐 있었던 그런 부류의 동급생들. 알고 보면 그 동급생들의 집안을 보면 나름 경제적으로 넉넉한 집안 출신인 경우가 많았다.
“생각에 따라 어려울 수도, 쉬울 수도 있어요.”
“…….”
“그냥 우섭이에게 말해요. 승미 씨가 원하는걸.”
“알겠어요.”
태화는 바로 이우섭을 불렀다.
“우섭아!”
이우섭은 태화의 부름을 받자 바로 대답했다.
“네.”
“잠깐 이리 와봐.”
이우섭은 바로 태화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에요?”
“여기 승미 씨가 너한테 할 말이 있다고 하네.”
이우섭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네?”
태화가 조승미를 보며 말했다.
“승미 씨. 말해요.”
태화가 말을 마치자마자 조승미가 입을 뗐다.
“오늘 감독님 따라다니면서 영화 일을 좀 배우려고 해요. 그렇게 해도 괜찮겠죠?”
“네?”
이우섭은 처음엔 조승미의 말을 듣고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거지? 이건 태화 형에게 허락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이우섭은 이내 이게 태화의 배려라는 걸 이해했다.
‘그래. 태화 형은 내가 불편할까 봐 그런 거야. 조승미가 아까 식당에서 나한테 했던 말 때문에 내가 불편할까 봐.’
이우섭은 새삼 태화의 배려에 고마움을 느꼈다. 솔직히 이우섭은 태화가 독단적으로 조승미를 받아들인다고 결정해도 그에 따를 생각이었다.
현재 이우섭에게 중요한 건 이 작품이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태화는 이우섭 자신을 세심하게 배려하고 있었다.
이우섭이 조승미를 보며 말했다.
“승미 씨. 아까 내가 했던 말 기억해요?”
“어떤 말이요?”
“겉모습은 그래도 속은 꽉 찬 사람이라고 했던 거.”
“아. 네. 기억해요. 그럼. 제가 오늘 따라다녀도 괜찮은 건가요?”
“그럼요.”
조승미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태화는 이우섭과 조승미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결말이 좋게 나서 다행이다. 그럼 우리도 슬슬 이동하자.”
태화는 시선을 우영인에게 돌렸다. 우영인은 이곳을 떠나려면 진즉에 떠났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우영인은 태화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의미다.
[영감님. 우영인이 저를 감시하는 것 같은 행동은 이 대표님의 의지는 아니겠죠?]
[아마도 그럴 걸세. 저건 선영이의 의도와는 상관없네. 하지만 우영인은 다르지.]
[네. 우영인은 대표님의 비서니까요. 아마도 제가 대표님에게 이롭지 않은 존재일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죠.]
[그렇네. 자네는 정말 갑자기 나타난 존재니까.]
우영인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서 감독님. 일이 잘 마무리돼서 다행이네요.”
“네. 저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우 비서님. 오늘 고마웠습니다.”
“별말씀을. 그럼. 일 보도록 하세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영인은 태화와 인사를 나누고 나서 그제야 그 자리를 떠났다. 태화는 우영인을 떠나보내자 한재영과 김현석이 태화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이 오자 태화가 조승미에 관해서 말했다.
“오늘 승미 씨는 우리를 따라다니면서 일을 배우게 될 거야. 두 사람도 가르쳐 줄 게 있으면 알려줘.”
한재영과 김현석은 거의 반사적으로 이우섭을 바라보았다. 한재영과 김현석도 조승미가 함께하면 이우섭이 불편해할 수도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이에 이우섭이 한재영 김현석 두 사람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신은 괜찮다는 의미였다.
한재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야. 대환영이지. 모르는 게 있으면 얼마든지 물어봐요.”
“네. 그렇게 할게요.”
뒤이어 김현석이 발언했다.
“저도 아는 건 많지 않지만 물어보시면 성심껏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한재영과 김현석의 태도에 이우섭이 살짝 토라진 말투로 말했다.
“두 사람. 승미 씨가 그냥 갔으면 어쩔 뻔했어?”
한재영이 이우섭의 말에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그러게.”
한재영의 말에 태화를 비롯한 사람들은 웃음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