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113화 (111/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13화

이선영이 태화에게서 느끼는 친근함의 바탕엔 박도봉 감독이 있었다. 이선영은 박도봉 감독이 태화와 함께하고 있다는 걸 알기에 더 친근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태화도 이선영이 자신을 편하게 대하는 게 나쁘지 않았다. 전화기 너머로 이선영의 무척이나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태화 씨.

“안녕하세요. 대표님. 저 지금 대전에 와 있습니다.”

-근데 미안해서 어쩌지. 내가 일이 있어서 거기엔 못 갈 거 같아. 대신 우 비서 보냈으니까 금방 연락 갈 거야.

“알겠습니다. 대표님이 바쁘면 좋죠. 그만큼 회사가 잘된다는 거니까요.”

-그렇게 이해해 주니 고맙네. 그럼. 일 잘 봐.

“네. 알겠습니다.”

태화가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전화가 걸려 왔다. 처음 보는 전화번호였지만 태화는 그 번호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여보세요.”

-서태화 감독님 핸드폰이죠?

“네. 그렇습니다.”

-전 이선영 대표님 비서 우영인입니다.

“아. 네. 방금 대표님하고 연락했는데 그러시더라고요. 우 비서님이 오실 거라고요.”

-아. 그랬군요. 전 지금 은행에 와 있거든요.

“그러세요?”

-네. 그럼 차 주차하고 1층 정문에서 뵙죠.

“알겠습니다.”

태화는 우영인과 통화를 끝내고 나서 한재영에게 말했다.

“일단 차부터 주차하자.”

“오케이.”

동화 은행 서구지점 건물은 지하에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지하 주차장은 꽤 규모가 있었다. 한재영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거 잘만 하면 촬영할 때 주차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겠는걸.”

“그러게.”

#.

태화 일행은 차를 지하 주차장에 주차하고 나서 1층 정문으로 향했다. 태화 일행이 정문으로 가자 이미 우영인과 한 중년 남성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중년 남성은 전반적으로 차분한 분위기를 풍겼다. 우영인은 태화를 보자 살짝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네. 잘 지냈습니다. 우 비서님도 잘 지내셨죠?”

“네.”

태화가 우영인의 옆에 서 있는 중년 남자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혹시 지점장님 되십니까?”

태화의 질문에 우영인이 대답했다.

“감독님. 눈치가 빠르시네요. 맞아요. 지점장님이세요.”

우영인의 소개가 끝나자 태화가 고개를 숙여 지점장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지점장님. 서태화라고 합니다.”

지점장은 태화의 인사를 받자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거 반갑습니다. 동화 은행 서구지점장 조성찬입니다. 전 감독님이 아니라 배우인 줄 알았습니다. 하하.”

“별말씀을요.”

“이거 만난 것도 인연인데 악수나 할까요?”

조성찬은 오랫동안 은행에서 영업해서 그런지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싹싹하게 대했다. 태화는 조성찬의 손을 맞잡았다.

태화는 조성찬과 악수를 마치고 나서 함께 온 일행을 소개했다.

“지점장님. 여기 같이 온 일행이 있습니다.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 좋습니다.”

태화는 가장 먼저 한재영을 소개했다.

“프로듀서인 한재영입니다.”

조성찬은 태화에게 한 것처럼 한재영에게도 악수를 청했다.

“혹시 저번에 오셨던 분 아닙니까?”

“네. 맞습니다.”

“그땐 내가 외부에 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웠었죠.”

“…….”

“직원들이 잘해 주던가요? 내가 특별히 지시했었는데.”

조성찬이 방금 한 발언은 우영인이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 이건 자신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이선영에게 말해달라고 한 거나 다름이 없었다. 한재영도 이걸 알기에 자신의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친절하게 잘 대해주셨습니다.”

“아. 그랬군요.”

태화는 계속해서 이우섭과 김현석을 조성찬에게 소개했다. 조성찬은 이우섭과 김현석과 인사를 나눌 때도 악수를 청했다.

대충 소개가 끝나자 우영인이 발언했다.

“자, 그럼 식사하러 가시죠.”

#.

태화를 비롯한 스태프와 우영인, 그리고 조성찬은 근처에 있는 한우 전문식당으로 들어갔다. 이 식당은 규모가 꽤 컸고 홀과 몇 개의 방이 있는 구조다. 일행은 예약한 방으로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들어갔다.

사람들이 자리에 앉자 조성찬이 입을 열었다.

“이 식당이 이 지역에선 한우로 유명해요. 그렇죠. 우 비서님?”

우영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한우 먹으려면 이 집만 한 곳이 없죠. 저희 대표님도 한우 드시려고 하시면 이 집으로 오세요.”

우영인과 조성찬의 대화를 듣던 태화가 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두 분 대화하시는 걸 들어보니 벌써 기대가 됩니다.”

태화의 말에 조성찬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기대할 만할 겁니다.”

잠시 후 음식이 세팅되고 나서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고기는 막내 김현석이 맡아서 구웠다. 김현석은 나름 센스 있게 고기를 잘 구웠다.

조성찬의 말대로 이 식당의 한우는 맛이 괜찮았다. 고기가 입으로 들어가자 사르르 입에 녹는 듯했다.

고기를 먹던 조성찬이 태화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감독님.”

“네. 지점장님.”

“제가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

태화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부탁이요?”

“너무 부담 갖지 마세요.”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부탁이라면……. 들어드리겠습니다.”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한테 딸이 한 명 있습니다.”

“아. 그러세요?”

“근데 그 녀석이 영화에 관심이 좀 있습니다. 대학 전공도 그쪽으로 선택을 했고요.”

“그럼. 연극영화과로 진학한 겁니까?”

“네. 근데 대전이 광역시지만 서울에 비하면 지방이죠. 그래서 영화 제작을 경험할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실제 조성찬의 말처럼 영화제작사가 대부분 서울에 있어서 지방에 사는 영화학도는 서울로 가야 한다.

조성찬이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 촬영할 때 제 딸이 일일 스태프라도 좀 하려고 하는데 어떠신지?”

“근데 저희 영화가 규모가 있는 영화가 아니라서요. 혹시라도 따님이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건 상관없습니다. 제가 딸하고 이야기를 해봤는데 꽤 관심을 보이더라고요.”

“아. 그렇습니까?”

“네.”

태화 입장으로선 조성찬의 부탁이 크게 부담되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조성찬의 부탁을 들어준다면 태화로서도 그리 나쁠 건 없었다.

기브 앤 테이크.

그나마 조성찬의 눈치를 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태화 군. 여기서 자네 혼자 독단적으로 결정해서는 안 되네. 조성찬이 있는 자리이기에 결론은 뻔하지만.]

[알고 있어요. 결론이 뻔하더라도 구성원들에게 의견을 물어봐 주는 것과 아닌 것은 분명히 차이가 있으니까요.]

[그렇네. 그게 바로 절차의 문제네. 이 사안이 갑작스럽게 생긴 것이긴 하지만 급박하게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이 아니기에 더 그렇네. 태화 군. 자네와 같이 온 스태프의 의견을 묻는 모양새를 취하는 게 확실히 낫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태도의 문제잖아요. 리더의 태도.]

[맞네. 구성원은 리더의 태도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게 마련이네. 특히 사소한 것이라도 리더가 구성원에게 물어보면 그 구성원은 리더에게 심적으로 친밀감을 느끼게 되지.]

구성원이 리더에게 친밀감을 리더에게 일체감을 느끼게 된다. 리더가 잘되는 게, 마치 자기가 잘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그 사람을 위해서 일하게 되는 결과가 만들어진다.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조언을 확실하게 이해했다. 이해했다면 그다음은 실천이다.

태화가 한재영에게 먼저 물었다.

“한 피디 생각은 어때?”

“나는 찬성. 하루인데 뭐.”

태화는 한재영에 이어 이우섭과 김현석에게도 물어보았다. 두 사람도 한재영의 의견에 동의했다. 태화는 스태프들의 의견을 따르는 듯한 모양새를 취했다.

“스태프들의 의견도 이러니 지점장님의 청을 들어드리겠습니다.”

태화의 대답에 조성찬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이거 고맙습니다. 감독님.”

태화의 발언에 한재영은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태화 녀석. 제법이야. 지점장의 청을 들어주면서 스태프들의 체면도 살리고.’

태화가 조성찬의 부탁을 들어주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조성찬이 반응했다. 조성찬이 태화를 보며 말했다.

“하하. 이거 제 딸이 왔나 봅니다.”

“따님이요?”

“네. 촬영 당일에 만나면 좀 서먹서먹할 거 아닙니까?”

“그렇기는 하죠.”

조성찬이 들어오라고 말하기 전에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조성찬의 딸로 보이는 20대 초반의 여성이 안으로 들어왔다.

조성찬의 딸은 조성찬의 옆으로 걸어가 섰다.

“녀석 성질도 급하네. 인사드려.”

조성찬이 딸이 태화의 일행들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조승미입니다.”

태화와 일행은 가만히 자리에 앉아있을 수 없었다. 태화와 일행이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갑작스럽게 인사를 하는 상황이 발생하다 보니 태화 일행의 자세는 어정쩡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태화 일행과 조승미는 인사를 마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잠시 어수선했던 분위기도 정리되었다. 그래서 태화도 조승미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조승미는 스트레이트 진과 파란색 체크무늬 남방을 입었다. 거기에 짧은 커트 머리를 했는데 20대 초반의 발랄한 느낌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조승미가 태화를 보며 말했다.

“근데 뭐 하는 분이세요?”

“네?”

“스태프라고 하기에는 너무 잘생겼고 배우라고 하기엔…….”

“하기엔 뭐죠?”

“배우가 장소 헌팅 하러 다니지는 않잖아요.”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렇긴 하죠.”

“그러니까요. 정체가 뭐예요?”

그때였다. 조성찬이 태화와 조승미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승미야. 버릇없이 감독님한테 무슨 말이야?”

조승미는 조성찬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머. 감독님이세요?”

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내가 감독입니다.”

“정말 의외네요.”

“승미 씨는 누가 감독이라고 생각했었는데요?”

조승미가 이우섭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분이 감독일 거로 생각했어요.”

“왜요?”

이우섭은 순간 조승미의 대답을 기대했다. 감독 같아 보인다는 건 뭔가 차별성이 있어 보인다는 거 아닌가?

조승미의 대답을 기대하는 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건 없었다. 뭔가 재미있을 것 같은 그런 예감이 들어서다.

조승미의 대답이 이어졌다.

“제일 나이 들어 보여서요.”

조승미의 대답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순간 빵하고 터졌다. 당사자인 이우섭도 웃음이 터지긴 마찬가지였다.

조승미의 대답이 너무나 엉뚱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승미도 나름대로 판단의 근거는 있었다. 감독은 기본적으로 무언가 지시를 하는 사람이다. 통념상 연장자가 지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여기에 조승미는 잘생긴 태화의 외모 때문에 판단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웃음이 잦아들자 태화가 조승미에게 물었다.

“나이가 많아 보인다. 그런 거 말고 다른 이유는 없어요?”

“네. 있어요.”

태화가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뭔데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