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11화
촬영 현장은 긴장감이 흘렀다. 그건 바로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촬영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태화는 촬영에 들어가기 전 정원석과 최수빈에게 말했다.
“두 사람 잘 들어요.”
“…….”
“정원석 님은 잘 알겠지만 내가 컷을 외치기 전까지 연기를 그만두면 안 됩니다.”
정원석이 태화에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정원석은 이미 저번 촬영에서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태화는 정원석은 어느 정도 안심이 되었다.
문제는 최수빈이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주지시킬 필요가 있었다.
“최수빈 님. 연기 도중 변수가 발생해도 자의적으로 연기를 그만둬서는 안 됩니다.”
“알겠어요. 그렇게 하죠.”
“좋습니다.”
태화는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었다. 태화는 바로 촬영 시작을 알렸다.
태화가 오른손을 들며 말했다.
“레디.”
태화의 구호에 맞추어 그다음 상황이 착착 진행됐다. 사운드 팀의 녹음이 시작됐고 카메라의 녹화 버튼이 켜졌다. 그리고 대기하고 있던 김현석이 촬영 순서를 외쳤다.
“씬 칠 일에 둘.”
“딱!”
이어서 태화가 왼손을 들며 말했다.
“액션!”
태화의 지시가 떨어지고 정원석과 최수빈의 연기가 시작됐다. 정원석과 최수빈은 한 번 해보았던 연기였기에 처음 시도보다 더 능숙하게 연기해 나갔다.
태화는 두 사람 몫을 하고 있었다. 한 편으론 모니터를 보며 현재 촬영되고 있는 영상을 확인했고 다른 한편으론 이한철이 중심을 잃지 않게 보조했다. 태화는 두 가지 일 중에 우선 이한철을 보조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한철이 중심을 잃게 되면 그냥 그걸로 촬영이 끝나게 된다. 오늘 촬영에서 더는 뒤가 없기에 태화는 이런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태화는 이런 결정을 하면서도 크게 불안하지 않았다.
태화는 이한철의 실력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철이 형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다.’
이한철은 태화의 믿음에 보답이라도 하듯 실수 없이 촬영을 진행해 나갔다. 태화는 이한철을 보조하면서도 간간이 모니터를 봤는데 촬영은 만족스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촬영은 이제 막바지로 가고 있었다. 이제 취객이 난입하기 바로 직전 장면을 찍을 차례다.
길을 걸어가던 정원석이 무언가 발견한 듯 시선을 내리며 대사를 쳤다.
-어. 저게 뭐지?
정원석은 대사를 치고 나서 최수빈의 손을 놓아야 했다. 하지만 정원석은 순간 그걸 잊어버렸다. 정원석이 최수빈을 손을 잡은 채 바닥에 떨어진 복권을 주웠다.
‘앗!’
순간 태화의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사전에 약속된 대로 연기가 펼쳐지지 않았을 때 연기자는 당황하게 마련이다. 바로 최수빈이 그랬다.
순간 최수빈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지려 하고 있었다. 여기서 최수빈의 표정이 잡히면 안 되었다. 태화는 재빨리 이한철에게 지시했다.
“정원석으로 원 샷.”
태화의 지시를 받은 이한철은 카메라를 재빨리 정원석, 최수빈 투 샷에서 정원석 원 샷으로 잡았다. 그제야 정원석은 자신이 실수를 알았는지 최수빈의 손을 놓았다.
태화는 그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정원석 님이 아무렇지 않은 듯 연기해서 다행이다. 수빈이의 표정은…. 잡혔는지 안 잡혔는지 지금으로선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일단 확인을 나중에 하더라도 촬영은 그대로 진행하자.’
촬영은 계속해서 진행됐다. 정원석이 바닥에서 무언가를 줍자 최수빈이 반응을 보였다.
-그게. 뭐야?
-이거 복권인데?
-뭐? 복권?
-응.
정원석은 대답하고 나서 복권을 자신의 상의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최수빈이 타박하듯 대사를 칠 차례다. 태화는 최수빈의 표정을 살폈다.
최수빈의 표정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태화가 이한철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수빈을 잡아도 좋다는 신호였다. 이한철은 카메라를 돌려 최수빈을 원 샷으로 잡았다.
-왜 쓰레기를 챙겨?
-혹시 모르잖아.
최수빈이 피식 웃으며 대사를 쳤다.
-참. 취향도 독특해.
정원석과 최수빈은 다시 나란히 섰고 카메라도 다시 두 사람을 투 샷으로 잡았다. 최수빈이 자연스럽게 정원석에게 팔짱을 끼며 대사를 쳤다.
-근데 복권에 당첨되면 어떻게 할 거야?
-쓰레기라며?
-혹시 모르잖아?
정원석이 잠시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사를 쳤다.
-뭐. 잘 먹고 잘살아야지.
-틀린 말은 아니네.
정원석과 최수빈은 팔짱을 낀 채로 골목길을 걸어갔다. 이한철은 카메라를 움직이지 않은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잡았다. 두 사람이 구부러진 골목길로 점점 사라져갔다.
태화가 왼손을 들며 소리쳤다.
“컷!”
#.
태화가 컷을 외쳤지만, 촬영 현장의 누구도 환호하지는 않았다.
현장의 분위기는 차분했다. 촬영 도중 취객이 난입한 데다가 더는 촬영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 상황에서 스태프들이 환호할 수 있는 건 태화가 ‘오케이’라고 말할 때이다.
태화는 방금 촬영한걸 모니터링하기 시작했다. 대체로 촬영에 큰 문제는 없었다. 태화가 신경 쓰인 부분은 정원석이 최수빈의 손을 놓지 않고 복권을 줍는 장면이었다.
모니터링 결과 정원석은 촬영할 때 느꼈던 것처럼 큰 문제는 없었다. 중요한 건 바로 최수빈 부분이었다.
바로 최수빈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지는 부분.
‘이 부분만 잘 넘어간다면….’
태화의 생각처럼 그 부분만 잘 넘어간다면 오늘 촬영은 성공이다. 태화는 속이 타는 마음으로 모니터링을 계속했다.
정원석이 최수빈의 손을 잡고 복권을 집어 드는 그 순간. 최수빈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는데 다행히 최수빈의 얼굴이 정면이 아니라 약간 옆으로 잡혔다. 그래서 최수빈의 표정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그 상태에서 카메라가 이동하면서 정원석의 원 샷으로 바뀌었다.
화면을 보고 나서 태화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태화의 한숨 소리를 들은 이한철이 피식 웃으며 태화의 어깨를 다독였다.
“감독님. 다행이죠?”
“네. 정말 다행입니다. 정말 카메라를 제때 잘 돌렸어요.”
“그때 집중하고 있어서 그렇게 된 겁니다. 감독님의 지시도 적절하게 나왔고.”
태화는 나머지 부분도 모니터링을 했다. 그 결과 나머지 부분은 큰 문제가 없었다.
태화가 사운드 팀장 박지형을 호출했다. 태화가 박지형에게 물었다.
“오디오는 어떻습니까?”
“큰 문제 없습니다.”
박지형의 대답을 들은 태화는 이제야 활짝 웃을 수 있었다. 태화가 무전기를 켜고 말했다.
“방금 촬영 끝난 장면……. 오케이입니다. 오늘 다들 고생 많았습니다.”
태화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현장 스태프들은 환하게 웃었다. 다만 시간이 아직 새벽이라 크게 환호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스태프들은 나름대로 기쁨을 표현하고 있었다. 누구는 주먹을 쥐었고 누구는 옆에 있는 사람들을 껴안고 좋아했다. 그리고 누구보다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정원석과 최수빈이었다. 태화가 정원석과 최수빈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 고생 많았어요.”
태화의 말에 정원석이 대답했다.
“고생은요. 오히려 저 때문에 큰일 날 뻔했잖아요.”
“그래도 연기를 능청스럽게 계속한 덕분에 촬영이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태화는 정원석과 대화를 나눈 후 최수빈에게 시선을 돌렸다.
“최수빈 님. 고생했어요.”
“감독님. 일단 촬영이 잘 끝나서 다행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럴 말을 들을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태화는 최수빈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최수빈은 자신의 실책을 알고 있었다.
물론 일차적인 책임은 정원석에게 있었지만 바뀐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건 최수빈 바로 자신의 책임이었다.
“분명 최수빈 님의 초기 대처가 그리 매끄러웠던 건 아닙니다.”
“…….”
“하지만 그 이후 대처가 좋았습니다.”
“네?”
“최수빈 님은 자의적으로 연기를 중단하지 않고 끝까지 임했습니다. 그래서 촬영이 성공적으로 끝났고요. 그것으로 된 겁니다.”
“하지만…….”
“자. 그럼 다음 장소로 이동하시죠.”
태화는 다음 스케줄을 위해서 몸을 돌렸다. 하지만 최수빈은 뭔가 마음에 잔여물이 남아 있는 듯했다. 최수빈이 태화를 따라갔다.
“저. 감독님.”
태화가 최수빈을 보며 말했다.
“수빈아.”
태화는 최수빈을 편하게 호칭했다. 지금 최수빈의 곁엔 정원석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태화는 감독과 배우가 아닌 학부 동기로서 이야기하고 싶어서였다.
“처음부터 완벽할 순 없어. 단 이거 하나만 기억해.”
“무슨?”
“수빈아. 넌 현재 자신을 증명해 가는 과정에 있어. 그 말은 앞으로도 보여줄 게 남았다는 의미이기도 해.”
“…….”
“난 그걸 기대하고 있고.”
“뭐? 기대하고 있다고?”
“그래. 그러니까 계속해서 널 증명해.”
“계속해서…… 날 증명…… 하라고?”
“그래. 그게 앞으로 네가 해야 할 일이야.”
태화는 말을 마치고 나서 최수빈에게서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태화는 몇 걸음 걸어가다가 뭔가 생각난 듯 최수빈에게 돌아서서 말했다.
“수빈아.”
“어?”
“가장 중요한 말을 빼먹었네.”
“가장 중요한 말?”
“그래. 오늘 넌 널 증명했다.”
태화는 최수빈에게 말을 하고 나서 다시 몸을 돌려 스태프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최수빈은 한동안 꼼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최수빈은 자신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 왜 눈물이 나지?”
최수빈은 왜인지 눈물이 멈춰지지 않았다. 그런 최수빈에게 송윤주가 다가왔다.
송윤주가 최수빈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수빈아. 고생했다.”
“…….”
송윤주의 말에 최수빈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송윤주는 최수빈의 뒤로 다가가서 아직 최수빈의 얼굴을 보지 못한 상태였다.
송윤주는 순간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송윤주가 최수빈의 얼굴을 보기 위해 앞쪽으로 이동했다. 송윤주가 최수빈의 얼굴을 보자 놀라며 말했다.
“수빈아. 너 지금 울어? 아니. 왜?”
“…….”
“혹시 태화가 한 소리 했니?”
태화가 감독이고 최수빈은 연기자다. 송윤주로선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최수빈은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송윤주는 최수빈을 조용히 껴안으며 물었다.
“수빈아. 왜 그래?”
최수빈이 훌쩍이며 말했다.
“나보고 증명하래. 그리고 오늘 증명했대…….”
“뭐?”
“그런데 왜 그 말이 이렇게 눈물이 날 일일까?”
송윤주는 최수빈의 등을 어루만졌다.
“수빈아. 태화가 너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녀석에게 보여줘.”
#.
태화는 스태프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스태프들은 각종 장비들을 정리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태화 군. 오늘 촬영 성공. 축하하네.]
[고맙습니다. 아무 문제 없이 촬영을 끝낸다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습니다.]
[그거야. 당연한 일이네. 처음에 누구나 겪는 과정일세. 하지만 앞으로 촬영은 좀 더 수월해질 걸세.]
[네. 그렇게 되겠죠. 점점 더 자신감도 붙을 테고요.]
[그런데 난 자네가 최수빈에게 했던 말을 자네에게 해주고 싶구먼.]
[절 증명해 보이라고요?]
[그렇네. 영화는 감독이 책임지는 것이니 말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