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10화
정원석과 최수빈이 다음 동선으로 걷기 시작하자 촬영을 맡은 이한철도 차분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걸음.
태화는 순간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 부분에서 정원석의 세밀한 연기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정원석은 사전에 맞춘 동선에 따라 최수빈의 손을 슬쩍 잡았다.
태화는 여기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리허설 때 태화는 정원석이 최수빈의 손을 잡는 타이밍을 잡기 위해 몇 번을 시도했었다. 그리고 정원석이 다섯 걸음 정도 걸은 상태에서 최수빈의 손을 잡는 게 자연스럽다고 판단했었다.
연기자가 대사를 치는데 집중하다 보면 이런 세밀한 연기를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원석은 이 부분을 잊어버리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연기를 자연스럽게 소화했다.
이한철은 카메라를 움직여 정원석이 최수빈의 손을 잡는 장면을 잡았다. 이한철은 정원석이 최수빈의 손을 잡을 장면을 카메라에 담고 나서 다시 카메라를 움직였다. 그리고 정원석과 최수빈을 투 샷으로 잡았다.
태화는 이번에도 잠시 긴장했다. 이번에는 최수빈의 세밀한 연기가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최수빈은 사전에 계획된 동선대로 정원석과 손을 잡은 상태로 앞뒤로 팔을 장난스럽게 점점 씩씩하게 흔들었다. 그다음 연기는 정원석과 최수빈이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는 연기다. 이 연기도 매끄럽게 진행됐다.
이 부분은 태화가 매직아워 촬영을 결정하면서 그렸던 장면이었다. 한때 서로를 의지했던 박성욱과 심수영의 모습이 아름다운 조명과 어우러져 그려지는 장면.
지금까지 태화가 계획했던 대로 촬영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태화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거의 다 왔다. 조금만 더….’
이제 남은 부분은 정원석이 최수빈과 걸어가다가 길에 떨어진 복권을 줍는 장면이다. 길을 걸어가던 정원석이 무언가 발견한 듯 시선을 내리며 대사를 쳤다.
-어. 저게 뭐지?
정원석은 대사를 치고 나서 최수빈의 손을 놓았다. 그런 후 바닥에 떨어진 복권을 주웠다. 이한철은 정원석과 최수빈의 투 샷에서 정원석을 원 샷으로 화면을 잡았다.
정원석이 바닥에서 무언가를 줍자 최수빈이 반응을 보였다.
-그게. 뭐야?
-이거 복권인데?
-뭐? 복권?
이제 남은 대사가 얼마 남지 않았다. 연출을 맡은 태화, 촬영을 맡은 이한철, 그리고 열연을 펼치고 있는 정원석과 최수빈도 이제 거의 끝났다고 생각할 바로 그 순간이었다.
#.
태화는 어디선가 새벽 시간에 어울리지 않게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었다.
“안 됩니다. 아저씨! 그리로 가시면 안 돼요!”
이렇게 외치는 사람은 골목길 통제를 맡은 스태프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에 대응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내 길 가겠다는데……. 딸꾹. 네가 무슨 상관……이야! 이 동네 땅이 다 네 것이야!”
태화는 잽싸게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새벽 시간 술에 취한 중년의 남자가 촬영장으로 난데없이 들어온 상황이었다.
태화는 재빨리 사운드 팀장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사운드 팀장 박지형이 손으로 X자 표시를 했다.
태화는 촬영이 더 진행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태화는 우선 촬영을 중지시켰다.
“컷!”
태화는 현 상황이 너무 아쉬웠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화가 났다.
태화는 마음 같아선 당장 저 술에 취해 난데없이 등장한 저 남자를 실컷 패주고 싶었다.
박도봉 감독은 이런 태화의 심정을 헤아리고 있었다.
[태화 군. 지금은 무엇보다 일을 수습하는 게 중요하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군요.]
[촬영장에서 이런 변수는 항상 존재하네. 감독은 그것도 항상 고려해야 하네. 아직 일을 수습하고 촬영할 시간은 있네.]
[영감님 말이 맞습니다. 아직 매직아워가 남아 있습니다.]
[우선 골목길을 통제하고 있는 스태프들에게 현 위치를 고수하라고 전하게.]
태화는 상황이 긴급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박도봉 감독의 해법이 합리적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자칫 골목길을 통제하고 있는 스태프들이 자리를 비울 경우. 그사이 또 다른 변수가 터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태화는 사전에 지급했던 무전기를 켰다. 이 무전기는 소품팀에서 지원해 준 장비다.
“모든 스태프는 현 위치를 유지해 주십시오. 특히 골목길을 통제하는 스태프들은 현 위치를 유지하고 통제를 계속해 주십시오.”
태화의 지시가 내려지고 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알겠습니다. 현 위치 유지하겠습니다.”
태화는 지시를 내리고 나서 황당해하는 정원석과 최수빈에게 말했다.
“현 상황을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죠?”
정원석과 최수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촬영할 수 있는 시간이 있습니다. 두 사람은 다시 촬영할 준비를 해줘요.”
정원석과 최수빈은 고개를 끄덕이고 촬영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이동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 태화가 다시 무전기를 켰다.
“현 시간부로 모든 스태프는 바로 촬영에 들어갈 수 있게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오늘 촬영은 반드시 성공시키겠습니다.”
위기일 때 리더의 역량이 빛을 발한다. 태화는 침착하게 스태프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선제적 조치를 취했다.
태화의 신속한 조치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스태프들은 더는 동요하지 않았다. 태화는 무전을 마치고 나서 이한철에게 말했다.
“촬영 감독님. 주성 씨. 제가 잠시 써도 될까요?”
“그럼요.”
이한철이 박주성을 보며 말했다.
“주성아. 감독님 도와드려.”
“네.”
이한철이 태화에게 물었다.
“혹시 내가 도와줄 일은 없습니까?”
“촬영 감독님은 바로 있을 촬영 준비해 주세요. 그게 절 도와주는 겁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죠.”
태화는 무전기로 한재영을 호출했다.
“한재영 피디님. 지금 즉시 내가 있는 곳으로 와주세요.”
“알겠습니다.”
태화가 무전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재영이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한재영도 골목길 통제를 하고 있었다.
한재영의 눈에 취객이 보였다. 여전히 취객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혼자서 하고 있었다.
“제길. 저쪽 길은 길도 다른 곳보다 길도 좁고 해서 통제 인원을 한 명만 배치했는데……. 감독님. 내 실수입니다.”
“지금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닙니다. 우선 저 취객을 여기서 나가게 해야 합니다.”
“네.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태화와 한재영, 그리고 박주성은 취객이 있는 곳으로 갔다. 취객에게선 술 냄새가 심하게 났다. 태화가 취객에게 다가가자 취객은 태화에게 공격적인 행동을 취했다.
“너, 뭐야?”
“저기 선생님.”
“선생은 내가 무슨 선생이야! 저리 가!”
태화는 순간 이 취객과 합리적인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영감님. 대화가 안 되겠는데요?]
[내가 볼 땐 알코올 중독 같은데…….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네.]
[방법이 있습니까?]
[왜 알코올 중독이겠나?]
[그럼. 술을 사주란 말입니까?]
[술에 환장한 사람한테 그 방법밖에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강제로 저 사람을 내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일세.]
박도봉 감독 말처럼 태화가 저 취객을 강제로 촬영장에서 내쫓을 권리는 없다. 그렇다면 결국 술을 사준다고 살살 달래서 촬영장을 벗어나게 하는 수밖에 없다.
“재영아. 어려운 부탁 좀 하자.”
한재영은 태화의 부탁이 오히려 반가웠다. 자신의 실수를 만회할 기회였기 때문이다.
“말만 해.”
“저 취객. 술 좀 사주고 와.”
“뭐?”
한재영은 처음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화의 방법에 수긍한다는 의미였다.
“여기서 실랑이를 하기보다는 차라리 그게 낫겠다.”
“지금 시간이 없어.”
태화는 하늘을 보았다. 점점 골목길이 밝아지고 있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매직아워가 아니라 그냥 아침이 되어버린다.
태화가 박주성을 보며 말했다.
“주성 씨가 한 피디를 좀 도와줘요.”
태화가 박주성을 한재영에게 붙이려는 건 박주성의 체격이 꽤 좋았기 때문이었다. 태화는 상대적으로 체구가 작은 한재영을 박주성이 옆에서 도와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주성 씨. 사정은 제가 촬영 감독님에게 잘 말하겠습니다.”
박주성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태화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태화가 한재영을 보며 말했다.
“재영아. 부탁한다.”
“걱정하지 마라. 넌 촬영에만 집중해.”
“고맙다.”
태화는 한재영에게 뒷일을 맡기고 몸을 촬영장으로 돌렸다. 태화가 다시 촬영장으로 돌아가며 다시 무전을 쳤다.
“다시 촬영합니다. 모든 스태프는 준비해 주세요.”
#.
한재영은 자신이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한재영이 어떻게 취객을 구슬렸는지 취객이 순순히 한재영을 따라나섰다. 그사이 태화는 정원석과 최수빈, 그리고 이한철이 있는 곳으로 도착했다.
이한철이 태화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취객이 한 피디를 순순히 따라나서는데요?”
“제가 한 피디한테 지시했습니다. 취객한테 술을 사주라고요.”
태화의 대답에 이한철뿐 아니라 정원석과 최수빈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
“솔직히 단시간에 해결할 방법이 없더라고요. 그래도 취객이 술을 좋아하는 거 같으니 한 피디한테 술을 사주라고 했죠.”
태화의 대답에 이한철이 순간 빵 터졌다.
“옳거니. 그거 아주 좋은 방법이네. 술 좋아하는 사람한테 술 사주겠다는데 마다할 사람은 없지.”
“촬영 감독님. 주성 씨는 한 피디를 도와주기 위해서 같이 보냈습니다.”
“괜찮습니다. 지금 중요한 건 촬영이니까요.”
“촬영할 때 주성 씨가 했던 건 제가 대신하겠습니다.”
“가능하겠어요?”
“해봐야죠. 근데 정원석이 복권 줍는 장면까지 촬영 기억하시죠?”
“그야. 당연하죠.”
“그 장면까지 제가 주성 씨가 했던 일을 병행해서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내가 중심을 잃지 않게만 해주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태화는 이한철과 대화를 마친 후 정원석과 최수빈을 바라보았다.
“두 분은 아까처럼 해주면 됩니다.”
태화는 말을 마친 후 하늘을 보았다. 정원석이 태화에게 물었다.
“감독님. 시간이 얼마 없는 거죠?”
“네. 한 번 정도 촬영할 시간은 되는 거 같네요.”
태화가 정원석과 최수빈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위기라면 위기지만 기회로 만들어 보죠.”
정원석이 태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감독님 말에 동의합니다. 이렇게 된 거 해볼 때까진 해봐야죠. 감독님이 이렇게 노력하시는데.”
“정원석 님. 고맙습니다.”
태화가 이번엔 최수빈을 보며 말했다.
“최수빈 님. 긴장되나요?”
“긴장은 되지만 이걸 해내면 제 능력이 증명되는 걸까요?”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럼. 증명해 보일게요.”
“좋습니다.”
취객의 난입으로 한때 촬영은 위기에 처했지만, 태화의 재빠른 대처로 위기 국면은 빠르게 수습되었다.
태화가 다시 무전기를 켰다.
“모든 스태프는 각자 자리를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촬영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