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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109화 (107/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09화

태화가 박도봉 감독에게 계속해서 말했다.

[윤주 누나의 관심사는 이 작품과 함께 저와 수빈이의 관계일 테니까요.]

[그렇네. 하지만 자네는 이 상황에선 그냥 모른 척 넘어가야 하네.]

[알고 있습니다. 제가 윤주 누나와 그 주제로 대화를 하게 되는 건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잖아요. 촬영을 앞둔 현시점에서 적절하지 않습니다.]

[자네 말이 맞네. 지금 집중해야 할 건 잠시 후 있을 촬영이네.]

태화가 최수빈, 송윤주와 간단한 인사를 끝내자 옆에 있던 정원석이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두 분 반갑습니다.”

송윤주가 먼저 정원석에게 인사를 건넸다.

“반가워요. 정원석 님.”

뒤이어 최수빈이 정원석에게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최수빈 님. 생각보다 여유 있어 보이네요.”

“그래 보였습니까?”

“네.”

“겉은 그렇게 보여도 속은 긴장하고 있습니다.”

“정말요?”

“네.”

“그래도 막상 촬영 들어가면 달라지겠죠.”

최수빈은 정원석의 발언에 어색하게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아. 네. 그렇겠죠.”

태화는 순간 정원석의 발언과 최수빈의 반응에 주목했다.

[영감님. 수빈이가 정원석의 발언에 어색하게 미소를 띤 건 정원석의 발언이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까?]

[그렇네. 겉으로 드러난 의미는 최수빈을 격려하는 말이지만 속뜻은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 있네.]

[네. 실제 촬영에서는 긴장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 준 거나 다름이 없죠. 그런데 정원석은 굳이 이런 발언을 했을까요?]

[그건 아마도 오늘 촬영 조건 때문에 그런 것일세.]

[촬영할 수 있는 시간이 짧은 거 때문에 그런 거란 말이군요.]

[그렇네. 영화 촬영장은 참여하는 사람들의 욕망이 부딪히는 곳이기도 하네. 감독만의 욕망이 존재하는 곳이 아니지.]

[특히 정원석은 가장 비중이 높잖아요.]

[맞네. 정원석은 이번 촬영을 망치고 싶지 않은 거네. 그래야 앞으로 있을 촬영도 동력을 이어갈 수 있으니까. 그러기 위해선 연기 상대방인 최수빈이 따라와 줘야 하네.]

[전 정원석의 저 발언이 상황상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자네의 판단이 맞네. 감독인 자넨 수많은 욕망을 적절히 이용하거나 제어하면 되는 것일세.]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여기서 자네가 할 일이 하나 생겼네.]

[그게 뭔지도 알아요.]

#.

삼거리 골목길은 곧 있을 촬영 준비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연기를 펼칠 정원석과 최수빈도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정원석과 최수빈은 송윤주의 차량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제 감독인 태화가 호출하면 바로 나갈 준비가 된 상태다.

태화는 송윤주의 차가 주차되어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정원석이 먼저 태화를 발견했다.

“저기 감독님 오네요.”

최수빈은 시선을 들어 차창 밖을 보았다. 차창 밖으로 태화가 송윤주의 차량으로 걸어오고 있는 모습 보였다.

최수빈은 태화가 걸어오는 모습을 보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태화가 남녀 주연 배우가 있는 곳으로 온다는 건 이제 촬영을 시작하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제 촬영 시작이다. 내 여주 첫 작품……. 그런데 왜 이렇게 긴장되지? 이러면 안 되는데…….’

하지만 한 번 뛰기 시작한 최수빈의 심장은 쉽게 평온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원석이 먼저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최수빈도 차 밖으로 나가야 했지만,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운전석에 앉아 있던 송윤주가 고개를 돌려 최수빈을 보며 말했다.

“수빈아. 나가자.”

“응. 언니.”

최수빈은 긴장감에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최수빈은 순간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이건 최수빈의 인생에서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송윤주가 최수빈의 이러한 모습을 보지 못하고 먼저 차에서 내렸다는 점이다. 최수빈은 아무리 친한 송윤주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 점에선 다행이었지만 당장 자신 앞에 놓인 상황이 만만치 않았다.

사람이 자신의 분야에서 한 단계 위로 올라가려면 그만큼 대가를 치러야 한다. 어쩌면 최수빈은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 몰랐다.

그때였다. 최수빈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최수빈은 순간 깜짝 놀라 자신의 스마트폰 화면을 보았다. 발신자는 태화였다.

최수빈은 본능적으로 이 전화는 받아야 한다고 느꼈다. 최수빈이 태화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너, 지금 떨고 있지?”

-뭐?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그래.

“그냥 찍어봤어. 근데 맞았네.”

최수빈은 순간 태화의 장난스러운 발언에 발끈하며 말했다.

“뭐? 이 순 엉터리.”

“어때? 지금은 좀 긴장 좀 풀렸냐?”

태화의 말처럼 최수빈의 긴장감은 이전보다 다소 풀린 상태였다.

-그냥. 뭐.

“어제 한 말 기억하지?”

-내 능력을 증명해야 한다는 말?

“그래. 한 번 사람들을 유혹해 보라고. 네 연기로….”

-연기로 사람들을 유혹하라고?

최수빈은 연기로 사람들을 유혹하라는 태화의 발언이 가슴에 꽂혔다. 그리고 조금씩 최수빈은 마음을 다잡기 시작했다. 태화가 단지 긴장하지 말라고 평이하게 이야기했다면 최수빈에게 이렇게 짧은 시간에 심리적 변화를 끌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리더는 말을 잘해야 하고 단어 선택도 잘해야 한다. 태화가 선택한 연기와 유혹. 이 두 단어의 조합은 최수빈에게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었다.

“그래. 그게 네가 오늘 당장 할 일이자 앞으로 해야 할 일이야.”

태화의 말을 들은 최수빈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태화는 최수빈의 이 숨소리가 ‘난 준비가 되었다.’라는 신호로 들렸다.

“수빈아. 사람들을 유혹할 준비는 다 된 거지?”

-그야. 당연하지.

“이제 본래 최수빈의 모습으로 돌아온 건가?”

-그래. 돌아왔다.

“그럼. 빨리 나와. 사람들 기다리니까.”

-알았어.

최수빈은 태화와 통화를 끝내고 바로 차에서 내렸다.

[태화 군. 연기로 사람들을 유혹해 보라는 말. 아주 멋졌네. 이 말은 어떻게 생각해 낸 건가?]

[전에 제가 연기를 지망하던 시절 마음속에 품었던 말이었습니다. 그 말이 지금 이렇게 쓰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자네가 마음속에 품었던 말이었기에 빈말처럼 들리지 않았구먼. 아마 최수빈의 머릿속은 자네가 했던 말이 떠나지 않을 걸세.]

실제 최수빈의 머릿속에 자신의 연기로 사람들을 유혹할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래서 긴장할 틈이 없게 되어버렸다.

[수빈이는 그럴 겁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이니까.]

#.

태화는 정원석, 최수빈과 함께 간단하게 촬영 전 리허설을 진행했다. 리허설은 태화가 생각했던 것보다 부드럽게 진행이 되었다. 이렇게 된 결과는 최수빈이 본래의 모습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태화가 정원석, 최수빈 두 사람에게 말했다.

“좋습니다. 지금 리허설한 대로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정원석과 최수빈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한철이 태화에게 다가왔다.

“감독님. 촬영 시작하죠.”

“네. 촬영 감독님. 이제 곧 마법이 시작될 테니까요.”

태화와 이한철 그리고 정원석과 최수빈은 촬영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이동했다. 이한철은 정원석과 최수빈 앞쪽에 카메라를 든 채 자리를 잡았다. 태화는 새벽에 촬영하는 만큼 촬영 전 구호를 크게 외칠 수 없었다. 그래서 사전에 수신호를 병행해서 사용하기로 했다. 태화가 오른손을 들면 ‘레디’의 의미고 왼손을 들면 ‘액션’과 ‘컷’의 의미다.

매직아워 시간이 다가오자 어두웠던 골목길이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태화가 오른손을 들며 말했다.

“레디.”

태화의 수신호를 본 사운드 팀장 박지형은 ‘스피드’라고 외치는 대신 자기의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박지형의 신호를 본 태화가 이한철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한철은 태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롤.”

이어서 대기하고 있던 김현석이 촬영 순서를 이한철처럼 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씬 칠 일에 하나.”

김현석이 크지 않은 목소리로 촬영 순서를 말해도 현재 큰 문제는 없었다. 새벽 시간대라 조용해서 김현석이 크게 소리치지 않아도 음량은 충분했다. 게다가 중요한 건 슬레이트를 치는 소리다. 슬레이트를 치는 소리가 제대로 녹음이 되면 후반 작업할 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딱!”

김현석이 슬레이트를 친 소리는 새벽 시간대라 그런지 아주 청명하게 울렸다. 태화가 이한철의 뒤로 가 역시 크지 않은 목소리로 말하며 자기의 왼손을 들었다.

“액션.”

태화의 지시가 떨어지자 본격적으로 정원석과 최수빈의 연기가 시작되었다. 정원석과 최수빈이 걷기 시작했고 이한철이 두 사람 앞에서 핸드헬드로 찍기 시작했다.

이번 촬영에선 중요한 건 촬영감독이 뒷걸음을 치며 촬영을 해야 한다. 그래서 촬영감독이 움직이는 도중 넘어지거나 스텝이 엉켜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이번 촬영엔 촬영 보조로 온 박주성이 이한철의 등 뒤로 붙어서 이한철의 눈이 되어야 한다.

이한철을 중심으로 모니터를 볼 수 있는 왼쪽엔 태화가 자리를 잡았고 오른쪽에 박주성이 자리를 잡았다.

촬영이 시작되고 박주성은 자신이 맡은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이한철은 뒷걸음질 치면서 촬영을 하고 있지만, 화면은 안정적으로 나오고 있었다.

잠시 나란히 걷던 정원석과 최수빈의 본격적으로 대사를 주고받는 연기가 시작되었다. 먼저 대사를 친 건 정원석이다.

-수영아. 오늘 박 사장 그놈이 또 지랄했지?

최수빈이 잔뜩 찌푸린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정말. 그 인간 짜증 나 죽겠어.

정원석이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최수빈도 가던 걸음을 멈췄다. 이한철도 두 연기자에 맞춰 움직임을 멈췄다.

정원석이 최수빈을 살짝 껴안으며 대사를 쳤다.

-조금만 참자. 그래도 그 인간 우리 단골이야.

-그래도. 짜증 나. 그 인간.

정원석은 말없이 최수빈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수영아. 난 네가 있어서 너무 좋다.

-성욱 오빠.

-넌 시궁창 같던 내 삶에 그래도 희망이야.

-정말?

-당연하지. 만약 수영이 네가 지금 내 곁에 없다고 생각하면 끔찍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태화는 두 사람의 정원석과 최수빈의 연기를 보며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확실히 오늘 촬영할 장면을 여러 번 연습했던 성과가 나오고 있다. 확실히 정원석 님은 차분하게 잘하고 있고 수빈이도 잘 맞춰가고 있어.’

정원석이 최수빈을 살짝 껴안았던 손을 풀었다. 그리고 그윽하게 최수빈을 바라보았다.

-정말?

최수빈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사를 쳤다.

-나도 오빠가 있어서 그나마 버티는 거야.

정원석은 최수빈의 대사를 듣고 나서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정원석의 미소는 과하지도 그렇다고 약하지도 않았다. 태화는 현재까지 진행된 두 사람의 연기가 마음에 들었다.

‘이 정도면 한 방에 끝낼 수도 있겠는걸.’

정원석과 최수빈은 서로를 보며 웃었다. 그리고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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