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07화
태화와 이한철은 이야기가 잘 되었고 덤으로 정원석과 최수빈은 열정을 가지고 더 연기 연습을 하기로 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 한재영과 송윤주는 상반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한재영이 송윤주를 보며 말했다.
“누나. 내가 이겼어요. 내놓으시죠.”
한재영이 송윤주에게 손을 벌렸다. 그러자 송윤주는 만 원짜리 한 장을 한재영에게 건넸다.
한재영과 송윤주는 태화와 이한철의 양자 간 대화를 앞두고 서로 내기를 했었다. 내기는 먼저 한재영이 제안했었다.
-누나가 그렇게 자신 있으면 돈을 걸든가?
송윤주는 한재영의 도발에 넘어갔다.
-네가 그렇게 말하면 못 할 줄 알고?
한재영은 두 사람의 대화가 잘 풀릴 거라는 것에 걸었고 송윤주는 그 반대로 걸었었다. 송윤주가 그렇게 건 것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이한철도 자존심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송윤주는 아직 혼란스러운 듯했다.
“이상하네. 한철 오빠가 저렇게 물러날 사람이 아닌데…….”
한재영은 송윤주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건 태화가 성장했기 때문이에요. 한철이 형이 물러날 정도로.
하지만 한재영은 송윤주에게 이 말을 하지 않았다. 한재영이 이렇게 한 건 무슨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다.
대신 한재영은 송윤주와의 내기에서 이긴 걸 즐기고 싶었다.
“뭐. 오늘은 물러나고 싶은 모양이었나 보죠.”
한재영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쨌든 누나 잘 쓸게요. 이럴 줄 알았으면 금액을 더 부르는 건데. 한 오만 원 빵 할걸.”
송윤주가 한재영에게 살짝 눈을 흘기며 말했다.
“야. 그냥 조용히 주머니에 돈 넣어라.”
“넵!”
#.
촬영 전날.
태화와 스태프는 내일 있을 촬영에 맞춰 분주하게 움직였다. 가장 먼저 태화는 내일 촬영이 있을 골목길을 사전 답사했다. 전에도 한 번 와본 곳이었지만 다시 한번 확인차 온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확인 차원은 아니었다. 태화는 매직아워 시간에 맞추어 골목길에 왔다.
태화는 실제 테스트 촬영을 해보기 위해서 카메라도 손수 가지고 나왔다.
골목길은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고 길에 설치된 가로등 불빛만이 골목길을 비추고 있었다.
골목길 중 중점적으로 촬영이 이루어지는 곳은 세 갈래 길이 나 있는 곳이다. 이우섭이 태화에게 보고했다.
“제가 저쪽 길을 맡아서 사람들을 통제할 겁니다. 아무리 새벽 시간이라고 해도 사람이 다니지 않는 건 아니니까요.”
“그렇지. 다른 두 길은?”
“전에 계획했던 대로 소품팀에서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한재영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소품팀은 인력 지원 외에 사람 통제에 필요한 기구들도 빌려주기로 했어.”
태화가 한재영에게 물었다.
“가드레일 벨트 같은 거?”
“응. 그리고 신호봉 같은 것도 빌려줄 거야. 소품팀에서 가지고 있는 게 있어서.”
“신호봉까지?”
사람을 통제할 때 신호봉 같은 걸 들고 있느냐 아니냐는 꽤 중요하다. 통제하는 사람이 신호봉을 들고 있으면 지나가던 사람들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무슨 일이 있다는 걸 바로 알게 된다.
태화는 한재영의 대답에 입가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역시. 한재영이다.”
“뭐. 소품팀장님이 도와준다고 하시더라고.”
한재영은 간단하게 대답했지만 이런 대답을 하기 위해서 한재영은 소품팀장에게 물밑 작업을 벌였다. 사무실을 직접 찾아가 사정도 설명하고 밥도 같이 먹고. 그리고 도와달라고 간청도 하고……. 한재영의 집요함에 소품팀장 전윤석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내가 한 피디는 못 당하겠다. 기왕 하기로 한 거 화끈하게 도와주지 뭐.
하지만 내일 새벽 촬영이라는 말에 전윤석은 짜증을 냈었다. 하지만 이미 한번 도와주기로 한 거. 전윤석은 이러한 이유로 자기의 말을 거둬들이지는 않았다.
“아. 그리고 촬영 중이라는 입간판도 있어야 할 텐데?”
“그건 걱정하지 마라. 그것도 다 소품팀에 발주한 상태니까. 눈에 띄게 특별히 야광으로 해달라고 했다. 이건 공짜로 안 돼서 제작비 주기로 했고.”
“잘했다. 아무리 제작비가 부족해도 줄 건 줘야지.”
잠시 후 어두웠던 골목길이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다.
[태화 군. 이제 시작이네.]
[네. 영감님. 마법의 시간이 펼쳐지겠군요.]
태화는 내일 촬영이 있을 골목길을 다시 한번 눈으로 훑어보았다.
곡선으로 꺾이는 길과 오르막길은 여전히 흥미로운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태화가 이우섭과 김현석을 향해 말했다.
“우섭이하고 현석이. 두 사람 같이 서봐.”
이우섭이 태화의 의도를 바로 알아챘다.
“테스트 촬영하시게요?”
“그래. 둘이 다정하게 서봐.”
“다정하게요?”
“그래.”
이우섭과 김현석은 서로 어깨동무하고 섰다.
“그래. 좋아.”
태화는 자신이 들고 온 카메라의 전원 버튼을 켜고 녹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서 태화는 카메라의 모니터를 보았다. 모니터를 본 한재영이 순간 감탄했다.
“이야. 저 두 녀석 완전히 딴 사람 같네.”
“하하. 그렇지?”
“저 두 녀석. 이 영상 보면 파일 복사해서 자기들 달라고 하겠는데? 인생작이라고 하겠어.”
태화는 순간 영화가 빛의 예술이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재영이 넌 매직아워에 촬영한 적 없어?”
“아직.”
“정말?”
“찍으면 좋지만, 시간이 짧잖아. 감독은 가능하면 모든 걸 통제하려고 하는데 매직아워는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하긴. 한철이 형도 그래서 반대한 거고.”
“어쨌든 넌 보란 듯이 내일 촬영 마쳐야 한다.”
“알아. 그렇게 해야 나에 대한 신뢰도 쌓이겠지.”
내일 촬영은 단순히 작품의 완성도를 넘어서 태화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만약 내일 촬영이 성과 없이 끝난다면 태화는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 아마도 스태프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첫 촬영인데 그냥 무난하게 찍지. 왜 고집을 부려서….
어떤 이유로든 감독이 상처를 입게 되면 스태프에게 감독의 말이 제대로 먹히지 않게 된다. 그렇게 되면 촬영 현장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하지만 태화는 현 상황에선 부정적 결과보다는 긍정적 결과를 보고 갈 수밖에 없었다. 부정적 결과를 먼저 생각한다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뭔가를 결정했다면 뚝심 있게 밀고 갈 수밖에 없다.
그때였다. 뻘쭘하게 서 있던 이우섭과 김현석이 뭔가 하기 시작했다.
“태화야. 근데 저 두 녀석 연기하는 거야?”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 거 같은데?”
“근데 언제 시나리오 대사를 외웠대?”
“그만큼 시나리오를 많이 봤을 테니까.”
“하긴 녀석들 시나리오. 너덜너덜하더라.”
이우섭과 김현석은 시나리오의 대사를 치고 있었다. 이우섭 박성욱 김현석이 심수영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두 사람의 연기는 어설플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영상만큼은 아름다웠다.
“옷이 날개가 아니라 조명이 날개네.”
“오. 명언인데?”
#.
저녁 시간.
한재영과 이우섭, 그리고 김현석은 일찍 잠자리에 들어갔다. 내일 새벽 촬영 때문이다.
일찍 잠자리에 들면 잠이 잘 안 올 수도 있을 거라는 염려와 달리 세 명은 자리에 눕자마자 바로 곯아떨어졌다. 하지만 태화는 잠이 잘 오지 않았다.
태화는 몸을 뒤척이다 방을 나와 옥탑 평상에 앉았다.
[태화 군. 마치 데자뷔 같구먼.]
[크크. 그러게요. 일주일 전에도 이랬던 거 같은데.]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분명히 다르네. 짧은 기간이었지만 자넨 성장했으니 말일세.]
[아픔만큼 성장한다는 말이군요.]
[그렇네. 사람은 그냥 시간이 흐른다고 성장하는 게 아닐세. 뭔가 계기가 있어야 성장하는 걸세. 자네에게 지난 일주일은 성장의 계기가 된 거네.]
[저도 영감님 생각에 동의합니다. 지난 일주일이 아니었다면 제가 수빈이한테 애교를 부렸겠습니까?]
[그렇네. 자네의 성장은 어떻게 보면 영화에 관한 자네의 마음가짐이라고 할 수도 있네. 그건 영화에 관한 집념이라고도 할 수 있지. 영화에 관한 집념이 없는 감독은 온전한 감독이라고 할 수 없네. 자네의 집념이 내일 촬영도 무사히 끝나게 할 걸세.]
[영감님이 함께한다는 게 힘이 되는군요.]
그때였다. 태화의 스마트폰에 알림이 울렸다. 바로 문자 메시지 알림이었다.
문자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바로 최수빈이었다.
-혹시 자니?
태화는 최수빈의 문자 메시지를 보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수빈이가 잠을 설치는 모양이군요.]
[그럴 만도 하지 않은가? 처음 맡은 여주지 않은가?]
전에 선혜영이 여주일 땐 이런 메시지가 올 필요가 없었다. 남주와 여주가 연인 사이였기 때문에 서로 의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최수빈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감독인 태화가 유일했다.
태화가 바로 답장하지 않자 최수빈이 다시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자는 거야?
보통 문자 메시지를 한 번 보내고 답장이 안 오면 상대가 자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수빈은 또다시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그건 그만큼 심리가 불안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태화는 최수빈에게 답장을 보내는 대신 전화를 걸었다. 태화는 문자보다는 직접 통화를 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최수빈은 통화 연결음 소리가 나자마자 바로 태화의 전화를 받았다.
-안 자는구나.
“그래. 안 자고 있었어.”
-휴. 다행이다.
“다행이라고? 왜?”
-나. 너무 긴장돼.
“수빈이 너 촬영 전날 긴장하고 그런 성격 아니잖아.”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막상 잠을 자려고 하니까 잠이 안 오네. 오늘 쉬지 말 걸 그랬나 봐.
“그랬으면 또 뭐라고 할 거였잖아. 너무 혹사한다는 둥. 그럴 거 아냐?”
-크크. 그건 맞아. 사람이 참 간사하다. 그렇지?
“걱정하지 마. 넌 잘할 거야.”
-정말? 잘할 수 있을까?
“그럼. 난 내 선택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아. 넌 지난 일주일 동안 나한테 네 능력을 증명해왔어.”
최수빈은 태화가 방금 발언한 것 중에 네 능력을 증명해왔다는 말이 귀에 확 들어왔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냥 하는 말 아니지?
“당연하지. 네가 스스로 능력을 증명해왔기 때문에 난 지금 안심하고 있어.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해.”
-부족하다고?
“그래. 넌 내일 네 능력을 사람들 앞에서 증명해야 해.”
-사람들에게 내 능력을 증명한다?
“그래. 배우는 감독만을 상대하는 게 아니라 결국 대중을 상대해야 하니까. 내일 너는 대중들을 상대하기에 앞서 스태프 앞에서 네 능력을 증명하는 거야. ”
태화가 방금 한 발언은 최수빈의 욕망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결국 배우는 대중의 사랑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태화. 네 말을 들으니 안심이 좀 된다.
“안심이 아니라 욕심이 생긴 건 아니고?”
-크크. 어떻게 내 마음을 알았냐?
“뭐, 뻔한 거 아냐? 여주를 위해서 상업영화를 포기한 너야. 결국 그건 대중들에게 더 주목받기 위해서 아냐?”
최수빈의 태화의 말을 순순히 인정했다.
-맞아. 난 대중들에게 주목받고 싶어.
“그럴 거면 인제 그만 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