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06화
태화가 대답을 이어갔다.
“일기예보를 보면 이날 날씨가 아주 좋거든요. 구름도 없고.”
그때였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이한철이 태화에게 말했다.
“감독님.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네. 촬영 감독님.”
“이 장면은 원래 조명을 치고 찍기로 한 장면입니다. 어차피 조명을 치고 찍는 장면에 이어서 촬영하면 되니까 촬영 비용이 더 나가는 것도 아닙니다.”
“맞습니다.”
“그런데도 새벽에 조명을 치지 않고 촬영한다는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입니까?”
“그렇습니다.”
“혹시 매직아워 때문입니까?”
태화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역시 촬영 감독님이군요. 맞습니다. 매직아워 때문입니다.”
매직아워(magic hour)는 촬영에 필요한 일광이 충분하면서도 인상적인 효과를 낼 수 있는 여명 혹은 황혼 시간대를 말한다. 일광이 남아 있어 적정 노출을 낼 수 있으면서도 자동차나 가로등, 건물 불빛이 뚜렷하다.
하늘은 청색이고 그림자는 길어지며 일광은 노란빛을 발산한다. 매우 따뜻하며 낭만적인 느낌을 만들 수 있으나 그 시간은 일출과 일몰 전후 30분에서 1시간 정도로 그 시간이 매우 짧다. 그리고 날씨가 흐리다면 매직아워 효과를 제대로 활용할 수 없다.
태화는 다시 시작되는 촬영 첫날 어떤 장면을 찍을지 며칠간 고심해왔다. 그래서 고른 게 바로 이 장면이었다. 일단 연기가 무난한 장면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바로 조명이었다.
[영감님. 다시 시작되는 첫 촬영에 이 장면이 어울립니다. 하지만 조명이 걸리는군요. 조명이 필요한 장면은 다 뒤로 미뤄놨는데요.]
[그 조명 문제는 금방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일세.]
[금방 해결이 가능하다고요?]
[그렇네.]
박도봉 감독은 태화에게 해결책으로 매직아워를 설명해 주었다. 태화도 박도봉 감독의 말을 듣고 이거다 싶었다.
[맞아요. 영감님. 매직아워. 학부 강의 시간에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한철이네.]
[한철이 형이요?]
[아마도 이한철은 자네의 의견에 반대할 걸세.]
[촬영 시간이 짧으니까요.]
[자칫하면 첫 촬영부터 제대로 촬영을 못 하고 끝날 수도 있네. 그래서 반대 의견을 내겠지만.]
[하지만 그만큼 얻는 게 있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촬영은 항상 연출보다 현실적인 부분을 고려하네. 연출은 상상이지만 촬영은 현실이니 말일세.]
[하지만 꼭 안 된다는 법도 없는 거잖아요.]
[자네한테 무슨 복안이 있는 건가?]
[단순히 저와 한철이 형 사이의 의견 충돌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음……. 자네 생각에 일리가 있네. 자네는 화두만 던진다는 말이구먼.]
[네. 화두를 던지면 누군가는 받게 되어 있는 거 아닙니까?]
[자네의 생각이 맞네. 아마도 자네의 화두를 받는 사람은 그것으로 이익을 볼 사람이고.]
[그렇습니다.]
태화가 이한철에게 말했다.
“이 장면은 우리 영화에서 유일하게 희망적인 장면입니다. 박성욱과 심수영이 서로를 의지하는 모습이 나오니까요. 전 이 장면이 좀 더 아름답게 나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야 뒤에 이어지는 장면들이 더 냉혹하게 보여질 테니까요.”
“하지만 변수가 너무 많아요.”
“알고 있습니다. 매직아워 시간이 너무 짧으니까요. 그래도 전 한번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태화는 화두를 던졌다. 하지만 이한철은 태화의 의견에 곧바로 동의하지 않았다. 그만큼 짧은 시간에 촬영한다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감독님. 자칫하면 아무 성과 없이 촬영이 끝날 수도 있습니다.”
그때였다. 정원석이 손을 들었다.
“제가 한마디 해도 될까요?”
태화가 정원석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하셔도 됩니다.”
“그럼. 제 의견을 말하겠습니다. 저는 우리 영화가 잘 되길 누구보다 많이 원합니다. 그건 혜영이도 마찬가지고요.”
“…….”
“촬영 감독님 염려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작품을 위해서 한번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정원석의 말이 끝나자 이번에 최수빈이 발언했다.
“감독님. 저도 한마디 하겠습니다.”
“네. 발언하시죠.”
“저도 정원석 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전 우리 영화에 참여하면서 아까운 걸 포기했거든요.”
이한철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최수빈에게 물었다.
“아까운 걸 포기했다고요?”
“네. 다른 곳에 캐스팅 제안이 들어왔는데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 잘되어야 합니다.”
최수빈은 자신이 다른 작품에 캐스팅되었다는 사실을 송윤주에게 말하지 않았다. 최수빈이 송윤주에게 말하지 않았으니 이한철도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감독님의 설명을 들으면 이 장면은 아름답게 나오는 게 맞는 거 같아요.”
“하지만 그만큼 리스크가 있어요.”
“리스크 없이 이익을 얻을 수 없잖아요.”
정원석과 최수빈. 남녀 주연 배우가 태화의 의견을 따르자 분위기는 완전히 태화가 원하는 분위기로 넘어왔다.
정원석과 최수빈은 태화가 던진 화두를 받아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다. 배우에게 중요한 건 자신이 얼마나 화면에서 돋보이느냐이다. 이건 작품의 퀄리티만큼 중요하다.
실제 스타급 연기자도 자신이 돋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특정 영화에 출연하지 않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대외적으로는 자신과 맞지 않는 역할이라고 그럴듯한 이유를 대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돋보이지 않아서 그 역할을 맡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심한 경우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시나리오 수정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한철은 자기의 옆에 서 있는 한재영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건 분위기에서 밀린 사람이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행동이기도 했다. 사람은 당장 세력이 밀린다고 판단하면 주변에 누군가를 붙잡고 묻게 마련이다. 그리고 자기의 의견을 따라주기를 기대한다.
“한 피디님은 어떻게 생각해요?”
이한철에게 질문을 받은 한재영은 즉답하지 않았다. 한재영도 나름 정무적 판단을 하고 있었다. 자칫하면 누구 편을 든다고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한재영은 잠시 고민한 후 자신의 대답을 내놓았다.
“전 감독님의 의견에 찬성합니다. 다소 리스크가 있더라도 시도해 보는 게 나쁘지 않다고 판단합니다. 어쨌든 우린 주어진 여건에서 최상의 것을 뽑아야 하니까요.”
한재영은 이 사안에 관해서 판단하지 않고 중립을 유지할 수도 있었다.
-전 사안이 결정되면 그냥 따르겠습니다.
한재영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지만, 한재영은 태화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한재영은 태화가 그동안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아 온 사람이다. 심지어 태화의 말도 안 되는 애교를 바로 목전에서 목격한 장본인이지 않은가?
한재영은 피디로서 감독인 태화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한재영은 학교 선배인 이한철의 의견에 불편하지만,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힐 수밖에 없었다.
이한철은 이후 이우섭과 김현석에게도 물어보았다. 이우섭과 김현석은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두 사람은 어떤 것이든 결정한 대로 따르기로 했다. 송윤주 정도가 이한철의 의견에 동의했을 뿐이었다.
[태화 군. 자네가 원했던 결론으로 흘러가는구먼. 결국 자네의 화두는 두 주연 배우의 욕망을 건드렸고 성공했네.]
[네. 아름다운 장면을 싫어하는 연기자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자넨 마냥 좋아해서만은 안 되네.]
[영감님. 알고 있습니다. 한철이 형의 기분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을 거잖아요.]
[그렇네. 이한철은 자네의 학교 선배이자 영화계에서 선배네. 그런데 자신의 의견이 이렇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네. 그러니 자네가 잘 다독여야 하네.]
[네. 그렇게 해야죠.]
태화가 이한철에게 말을 걸었다.
“촬영 감독님. 잠깐 저하고 이야기 좀 하실까요?”
태화가 이한철에게 단둘이 이야기를 하자고 한 건 적절한 선택이었다. 이제부터는 공적인 영역이 아니라 사적인 영역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태화와 이한철은 옥탑 한쪽 구석으로 이동했다.
#.
태화와 이한철은 옥탑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섰다. 태화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한철이 형. 미안해요.”
“뭐가?”
“제 생각이 좀 갑작스러웠잖아요. 그래서 형도 좀 당황했을 거예요.”
“당황했다기보다는 좀 불안하니까 그랬다. 네가 의도한 대로 그림이 나오면 좋지만 그렇지 않을 땐 아까도 말했지만, 저번처럼 힘만 들고 성과가 없을 수도 있으니까.”
“알아요. 사기 문제잖아요. 기껏 다시 촬영에 들어갔는데 또 성과가 없으면 우리 영화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사기가 떨어지겠죠. 회의감도 들 거고요.”
“잘 아는 녀석이 그러냐?”
“형이 우리 영화에 관해 갖는 마음이 어떤 건지 잘 알고 있어요. 누구보다 우리 영화가 잘되기를 바라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형이 좀 도와줘요.”
태화는 리스크를 짊어지고 성과를 냈을 때 얻을 수 있는 게 더 크다는 이유를 대지 않았다. 그 사실은 이한철도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성이 아니라 감성이었다.
이한철은 태화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태화는 이한철과의 논쟁에서 더 많은 사람의 동의를 끌어낸 상황이다. 그렇기에 명분은 태화에게 있었고 이한철은 당장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거기에 따라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태화는 지금 이한철에게 도와달라고 간청하고 있었다.
‘태화 녀석. 그새 또 성장했군. 승자의 아량도 베풀 줄 알고……. 이럴 땐 그냥 못 이기는 척하는 게 낫다. 괜히 내 고집만 부리다가 내 꼴만 우스워지지.’
이한철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태화야. 내가 너 못 당하겠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감독인 네가 이렇게 도와달라고 말하면 촬영을 맡은 내가 거절할 수가 없잖아.”
“한철이 형. 그럼 도와주는 겁니까?”
“감독이 이렇게 청을 하는데 당연히 도와야지. 안 그래?”
“고맙습니다. 형.”
“기왕 하기로 한 거 잘해보자.”
“네,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태화와 이한철은 웃으며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이렇게 태화와 이한철이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하자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태화와 이한철이 평상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자 정원석이 활짝 웃으며 두 사람을 반겼다.
“두 분 의기투합하셨군요.”
태화가 정원석의 말에 대꾸했다.
“보시다시피.”
“그래서 저하고 수빈 씨도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뭘 말입니까?”
“첫날 찍는 장면 더 연습하고 가려고요.”
정원석의 말을 최수빈이 받았다.
“촬영할 수 있는 시간이 매우 부족하다면서요. 시간 내에 촬영을 끝내려면 NG를 최소화해야죠.”
태화로선 정원석과 최수빈의 태도 전환을 반길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조금 전까지 퇴근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특히 최수빈은 퇴근하겠다고 발언까지 했었다.
태화가 피식 웃으며 최수빈에게 말했다.
“최수빈 님은 퇴근하겠다고 말하지 않았었나요?”
“흠흠. 그러려고 했는데 상황이 바뀌었잖아요? 뭐. 감독님이 원하지 않으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야 대환영이죠. 그럼. 조금만 더 연습하고 가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