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04화
당시엔 한재영이 심수영의 대사를 쳐주고 태화가 옆에서 오디오 녹음을 하면서 연출을 했었다. 실제 오디션에 섰던 오디오는 한재영이 대사한 부분을 삭제한 파일이었다.
태화는 오디오 편집을 위해서 한재영이 대사를 치는 부분과 정원석이 대사를 치는 부분이 서로 물리지 않게 연출했었다.
최수빈은 오디션에 섰던 오디오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이야기를 듣자 미소를 살짝 띠며 말했다.
“정원석 님. 한재영 피디님이면 남자였는데 어땠어요?”
최수빈은 한재영의 이름만 부를 법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피디님이라는 호칭을 붙였다. 이건 최수빈이 나름 정원석과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다는 태도이기도 했다.
“뭐. 그냥 남자가 아니라고 상상했습니다. 한재영 피디님이 좀 귀여운 인상이기도 하고요.”
최수빈이 뭔가 더 말하려고 했지만, 태화가 제지했다. 자칫 대화의 흐름이 곁가지로 흐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자자. 연기에 집중합시다. 정원석 님. 최수빈 님. 시나리오 봐주세요.”
정원석과 최수빈이 연기할 부분은 남주 성욱에게 여주 수영이 잡히는 장면이다.
성욱: (분노에 찬 표정으로) 야.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수영: (성욱을 비웃는다) 뭐가? 어차피 그거 가진 놈이 임자 아냐?
성욱: 뭐가 어쩌고 어째? (성욱 손으로 수영의 머리채를 잡는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수영: (악을 쓰며) 어차피 오빠도 그거 주운 거 아냐?
성욱: (수영의 뺨을 때리며) 이게 어디서 악을 써! 악을! 다 필요 없고. 내 복권 내놔!
수영: (처절하게) 없어! 없다고!
성욱: (눈을 부라리며) 이게 미쳤나? 너 말할 때까지 이제 나한테 맞는다.
정원석이 태화에게 말했다.
“이 장면 영화에서 아주 중요한 장면이잖아요.”
“그렇습니다. 박성욱과 심수영의 감정이 폭발하는 장면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오디션에 썼던 장면이죠. 두 사람한테 익숙한 장면일 겁니다. 하지만 주의할 사항이 있습니다.”
“…….”
“박성욱이 심수영의 머리채를 잡는 장면. 그리고 뺨을 때리는 장면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때였다. 정원석이 태화에게 물었다.
“지문을 보면 꽤 박성욱의 행동이 꽤 과격한데 수위는 어느 정도로 하나요?”
실제 이와 유사한 연기를 하다가 너무 연기에 빠져서 상대 연기자의 머리카락이 한 움큼 뽑히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뺨을 때리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때리는 척만 해야 하는데 실제로 뺨을 때리는 일도 있다.
“실제 연기를 백으로 본다면 팔십 정도로 하면 될 것 같습니다. 너무 하는 척만 한다면 감정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테니까요. 최수빈 님은 어떻습니까?”
최수빈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팔십 정도라고 하더라도 꽤 셀 거 같은데요?”
“그래서 합을 좀 맞춰보고 하려고 합니다. 중요한 건 지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박성욱이 심수영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박성욱이 심수영의 뺨을 때리기도 하고요. 정원석 님 그리고 최수빈 님.”
정원석과 최수빈은 동시에 대답했다.
“네. 감독님.”
“한번 해보죠.”
정원서과 최수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뒤이어 태화의 지시가 이어졌다.
“정원석 님이 최수빈 님의 머리채를 잡아보세요.”
정원석은 태화의 지시에 따라 최수빈의 머리채를 잡았지만, 힘을 준 상태는 아니었다.
그 상태에서 태화가 정원석에게 지시했다.
“정원석 님. 힘을 조금씩 올려보세요.”
“알겠습니다.”
정원석은 태화의 지시에 따라 최수빈의 머리채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다시 태화의 지시가 이어졌다.
“최수빈 님은 정원석 님이 잡은 머리채를 흔들면 그 움직임에 맞춰 머리를 움직여줘야 합니다. 안 그러면 아무리 팔십 정도의 힘이라도 머리카락이 뽑힐지도 모르니까요.”
“네.”
“정원석 님.”
“네. 감독님.”
“정원석 님은 머리채를 잡고 움직일 때 너무 복잡하게 움직이면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한번 해보죠. 정원석 님. 움직여 보세요.”
정원석은 태화의 지시에 따라 최수빈의 머리채를 잡은 채 손을 움직였다. 정원석의 움직임은 처음엔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태화는 바로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잠시 지켜보았다.
이건 정원석에 대한 태화의 배려였다. 어쨌든 정원석은 처음엔 조심스러웠지만, 차츰 동작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최수빈은 정원석의 동작에 맞춰 자기의 머리를 움직였다. 그래서 처음엔 어색했지만, 차츰 합이 맞아갔다.
합이 어느 정도 맞자 제대로 된 모습이 연출되기 시작했다. 태화의 지시가 이어졌다.
“성욱. 수영의 뺨을 때린다.”
정원석은 태화의 지시에 맞춰 자기의 팔을 휘둘렀다. 최수빈은 정원석의 팔의 움직임에 맞춰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최수빈은 실제로 뺨을 맞지 않았고 장면도 그럴듯하게 연출되었다.
태화는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컷!”
태화의 외침과 함께 정원석이 잡았던 최수빈의 머리채를 놓았다.
“이제 어느 정도 합이 맞은 건 같으니 전체 연기를 해보겠습니다. 정원석 님.”
“네. 감독님.”
“연기할 수 있게 감정을 올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최수빈 님도 감정을 올려주시기를 바랍니다.”
“네. 감독님.”
태화의 말이 떨어지자 정원석과 최수빈은 감정을 끌어올렸다.
[태화 군. 둘 다 집중력이 좋은 연기자들이라 감정을 금세 끌어올리는구먼.]
[맞습니다. 특히 수빈이는 생각 이상입니다.]
[뭐가 말인가?]
[정원석은 선혜영과 준비했던 경험이 있었다지만 수빈이는 그렇지 않잖아요.]
[그건 아마도 절실함 때문일 걸세.]
[절실함이요?]
[그렇네. 최수빈의 절실함이 어떻게 보면 그녀의 잠재 능력을 끌어올린다고 할 수도 있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영감님은 수빈이의 절실함을 알기 때문에 아까 그렇게 판단했던 겁니까?]
[어떤 판단 말인가?]
[한철이 형과 윤주 누나가 수빈이를 처음 본 사람처럼 대할 때 말입니다. 영감님은 수빈이가 돌발 행동을 하지 않을 거로 판단했었잖아요.]
[그렇네. 난 최수빈의 절실함이 그만큼 크다고 봤네.]
태화는 정원석과 최수빈의 연기 준비 상태를 보았다. 두 사람 모두 준비가 된 듯 보였다.
“두 사람 모두 준비됐죠?”
정원석과 최수빈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디!”
태화가 이한철을 보며 말했다.
“카메라.”
“롤.”
“액션!”
태화의 외침에 이어 정원석과 최수빈의 연기가 시작되었다. 정원석과 최수빈은 연기는 시작하자마자 마치 불꽃이 튀는 듯했다. 박성욱의 분노와 심수영의 악에 받친 감정이 제대로 표현되고 있었다. 서로 간 대사를 한마디를 주고받고 나서 태화는 잠시 긴장했다. 이제부터 합을 맞춰본 부분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성욱: 뭐가 어쩌고 어째?
정원석이 대사를 치고 나서 최수빈의 머리채를 잡았다. 정원석이 원래 맞췄던 합보다 세게 최수빈의 머리채를 잡았다. 보통 연기자들은 아무리 연습이라고 해도 몰입하게 되면 감정적으로 흥분상태가 된다. 그래서인지 최수빈은 합을 맞춰볼 때 하지 않았던 소리가 입에서 터져 나왔다.
“앗!”
순간 태화는 최수빈의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최수빈은 연기를 중단하지 않았다. 태화도 흐름이 좋았기 때문에 굳이 컷을 외치지 않았다. 정원석의 연기가 이어졌다.
성욱: 그걸 지금 말이라고!
수영: (악을 쓰며) 어차피 오빠도 그거 주운 거 아냐?
이제 정원석이 최수빈의 뺨을 때리는 장면이다. 정원석이 팔을 최수빈의 뺨을 향해 휘둘렀다.
정원석이 다소 흥분한 상태에서 팔을 휘둘렀다. 때문에 합을 맞췄을 때보다 정원석이 팔을 휘두르는 속도가 다소 빨랐다. 하지만 최수빈은 절묘하게 정원석의 팔을 피해서 얼굴을 돌렸다.
태화는 잠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최수빈이 실제로 뺨을 맞았다면 소리가 났을 테지만 태화의 귀에 뺨을 때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계속해서 정원석과 최수빈의 연기가 이어졌다.
성욱: 이게 어디서 악을 써! 악을! 다 필요 없고. 내 복권 내놔!”
수영: (처절하게) 없어! 없다고!
성욱: (눈을 부라리며) 이게 미쳤나? 너 말할 때까지 이제 나한테 맞는다.
태화는 연기가 끝나자 외쳤다.
“컷! 오케이.”
태화가 외치자마자 정원석과 최수빈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 모두 연기를 펼치면서 에너지 소비가 꽤 있었기 때문이다. 태화가 정원석과 최수빈을 향해 말했다.
“두 사람 모두 수고했어요. 쉬운 장면이 아니었는데 불구하고 아주 잘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아무리 연기라고 하더라도 상대를 때리는 연기는 연기 이후가 중요하다. 특히 방금 정원석처럼 예상보다 세게 최수빈의 머리채를 잡는 경우다.
[태화 군. 자네가 이 상황을 정리해 주어야 하네. 이럴 땐 배우가 직접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감독이 정리해 주어야 하네. 감독이란 때론 불편할 수도 있는 일을 해결해야 하는 존재니까 말일세.]
[네. 영감님. 만약 이걸 정리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게 되면 후에 분란의 소지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네. 특히 최수빈이 자네에게 서운한 감정을 갖게 될 걸세. 그리고 여기서 자네가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가능성이 적은 이야기이지만…….]
[아마도 정원석에게 잘못된 신호가 갈 수도 있겠죠. 이 정도 과하게 하는 건 괜찮다는 그런 신호 말입니다.]
[그렇네. 그래서 자네가 직접 깔끔하게 정리를 해줘야 하네.]
[당연히 제가 해야죠. 이런 걸 당사자들에게만 맡기면 안 되잖아요.]
태화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 가슴 졸이는 장면이 있긴 했지만요.”
태화의 말을 들은 정원석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감독님. 저 들으라고 한 소리시군요.”
“기분이 나쁘셨다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제 잘못이죠. 합을 맞출 때보다 제가 오버한 건 사실이니까요.”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최수빈은 태화의 발언에 고마움을 느꼈다. 정원석은 현재 영화에서 비중이 가장 큰 인물이다. 최수빈이 여주라고 하나 정원석에게 직접 말하는 건 아무래도 곤란했다. 하지만 태화가 정원석에게 대신 그 부분을 짚고 넘어가니 최수빈은 태화에게 고마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정원석이 최수빈에게 말을 건넸다.
“미안해요. 제가 최수빈 님 머리채를 좀 세게 잡았죠?”
“아. 괜찮습니다.”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연기에 몰입하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같은 연기자로서 이해합니다. 아마 저라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최수빈 님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좋은 연기자인 것 같습니다.”
최수빈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네? 그게 무슨…….”
“아무리 연기라고는 해도 그 부분에서 참고 계속해서 연기하는 게 쉽지 않잖아요.”
“그야……. 어쨌든 해야 하는 연기니까요.”
“하지만 그만큼 열정이 없으면 쉽지 않죠. 전 열정이 있는 배우가 좋은 연기자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