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03화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생각이 선 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요? 게다가 수빈이도 혼란스러워할 텐데요?]
[그렇더라도 그렇게 해야 하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자칫하면 정원석은 배려가 아니라 기만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일세.]
[기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요?]
[그렇네. 태화 자네와 한재영, 이한철 그리고 송윤주의 관계는 이미 정원석이 알고 있네. 하지만 최수빈에 관해선 그렇지 않네. 이런 상황에서 최수빈이 자신을 처음 보는 것처럼 하는 설정을 알고 참여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음. 영감님 말이 이해됩니다. 끼리끼리 논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게다가 수빈이는 연기자잖아요.]
[그렇네. 하지만 최수빈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네. 나중에 최수빈이 자네와 같은 동문이라는 게 밝혀져도 정원석은 고마움을 느끼게 될 걸세. 한 패거리로 보일 수 있는 최수빈에게 거리를 둔 것이니까.]
[영감님의 말은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염려가 되는 점이 있습니다.]
[뭔가?]
[수빈이가 이런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돌발 행동을 할 수도 있잖아요.]
[그건 염려하지 말게.]
[네?]
[최수빈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함부로 행동하지는 않을 걸세. 최수빈이 그렇게 어리석은 존재는 아니니까.]
[다른 건 몰라도 수빈이가 어리석은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 관해서 영감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태화는 이후 최수빈을 제외한 한재영, 이우섭, 김현석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이 세 사람이 실수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
최수빈은 인사를 마치고 나서 태화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태화는 최수빈이 왜 이런 눈빛을 보내는지 알고 있었다.
‘궁금하겠지. 자기한테 왜 그렇게 했는지.’
태화는 눈짓으로 옥탑 끝을 가리키고 나서 먼저 이동했다. 잠시 후 최수빈은 태화를 따라나섰다. 태화와 최수빈은 한 걸음 정도의 거리를 둔 채 섰고 두 사람은 서로가 아닌 밖을 향하고 있었다.
최수빈이 먼저 입을 뗐다.
“도대체 뭐야? 몰카야?”
“미안하게 됐다.”
“그러니까 뭐가 미안한 거야?”
“수빈아. 지금부터 내가 설명할게.”
“그래. 설명해 봐.”
태화는 이한철과 송윤주가 최수빈을 처음 본 사람처럼 대했는지 설명했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최수빈은 태화의 설명을 들으면서 시종일관 침착함을 유지했다.
“태화, 네 의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가. 내가 정원석 님이라도 소외감을 느꼈을 거야.”
“고맙다. 이해해 줘서.”
“하지만 기분이 나빴던 건 사실이야. 그리고 한철 오빠하고 윤주 언니는 저번에도 그러더니…….”
“그 두 사람 너무 미워하지 마. 내가 두 사람한테 부탁했어. 두 사람도 처음엔 내 제안을 탐탁지 않게 여겼었어. 굳이 너한테 그럴 필요가 있냐고……. 그러니까 다 내 책임이야.”
“그래도 서운한 건 어쩔 수 없어.”
“알아. 네 기분.”
“의외네.”
태화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뭐가?”
“그냥 네가 인정을 해버린 거. 의외라고.”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
“보통 이런 경우 이렇게 핑계 대지 않나?”
“어떻게?”
“어쩔 수 없었다. 네가 희생해라. 대를 위한 소의 희생. 딱 명분도 좋잖아.”
순간 태화가 피식 웃었다. 그러자 최수빈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왜 웃어?”
“수빈이 네가 희생하라고 희생할 사람이냐?”
“그거야 뭐.”
“그러니까. 어쨌든 나도 고민했다는 것만 알아줘라. 그리고 고맙다.”
“뭐가?”
“솔직히 네 반응이 염려됐었거든.”
“내 반응? 내가 미친년처럼 굴까 봐?”
태화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뭐.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너 진짜 나한테 이런 거 나중에 몇 배로 갚아라.”
“GV 정도 하면 될까?”
GV는 Guest Visit의 약자로 영화 상영 시 감독이나 영화 관계자들이 직접 방문하여 영화에 대하여 설명하고, 관객들과 질의응답도 주고받는 무대를 말한다. 흔히 관객과의 대화라고도 한다. 태화가 최수빈에게 GV를 언급한 건 <내 복권 내놔!>를 극장에 상영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기도 하다.
최수빈도 자신의 첫 번째 장편 주연 영화가 극장에서 개봉되면 그것만큼 좋은 일은 없다.
“뭐. 그 정도면 나쁘지 않지.”
#.
태화를 비롯한 사람들이 평상 주변으로 모였다. 태화가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참, 여기까지 힘들게 왔습니다. 다들 고생 많았습니다.”
이한철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감독님. 아직 갈 길이 멉니다. 벌써 이러면 안 되죠.”
“촬영 감독님 말이 맞습니다. 아직 갈 길이 멉니다. 하지만 오늘 이 순간이 없다면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다들 버텨주어서 고맙습니다.”
태화는 이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었다.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는 전 행복한 녀석입니다. 이제부터 남주, 여주 연기를 맞춰보겠습니다.”
태화의 말이 끝나자 태화와 이한철 정원석과 최수빈을 뺀 나머지 스태프는 뒤로 빠졌다. 태화가 정원석 최수빈 두 사람에게 말했다.
“시나리오에서 박성욱과 심수영이 함께 나오는 장면을 맞춰볼 겁니다. 시나리오 순서대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
“오늘 첫날이니만큼 가능한 NG 없이 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디테일한 것보다는 전반적인 동선과 흐름을 이해하는 데 중점을 둘 겁니다. 두 사람도 이점을 생각하고 연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태화의 말에 정원석과 최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촬영 감독님.”
“네. 감독님.”
“촬영 준비해 주시고요.”
“오케이.”
이한철은 카메라를 조작해 포커스와 노출을 맞추었다.
“감독님. 준비됐습니다.”
“오케이. 레디!”
태화가 이한철을 보며 말했다.
“카메라.”
“롤.”
“액션!”
태화의 외침에 이어 정원석과 최수빈의 연기가 시작되었다. 태화는 자신이 말한 대로 디테일한 부분까지 관여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진도가 꽤 빨리 나갔다.
한재영과 이우섭, 김현석 그리고 송윤주는 정원석과 최수빈의 연기를 지켜보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유는 정원석과 최수빈의 연기의 집중도가 높은 것도 있었지만 태화의 연출이 신속하면서도 정확했기 때문이다.
태화는 매 장면을 시작하기 전 간단하게 정원석과 최수빈에게 연기에 관한 브리핑을 했는데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그 때문에 정원석과 최수빈은 비교적 용이하게 연기를 진행할 수 있었다.
어느새 정원석과 최수빈의 연기는 시나리오의 중반을 넘어 종반부로 흐르고 있었다. 태화는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다. 김현석은 휴식 시간이 되자 준비해 두었던 음료수를 사람들에게 돌렸다.
태화가 정원석에게 말을 걸었다.
“정원석 님. 집중력이 대단하십니다. 이러기 쉽지 않을 텐데요.”
“잘해야죠. 그래야 혜영이한테 할 말이 있죠.”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제가 여러모로 선혜영 님에게 도움을 받는 거 같습니다. 이 정도면 배후세력 아닙니까?”
정원석은 태화의 농담에 활짝 웃었다.
“하하.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요?”
“나중에 여건이 되시면 선혜영 님 촬영장으로 왔으면 좋겠어요. 크랭크 업할 때 오면 더 좋고요.”
정원석은 태화에게서 따뜻한 인간미를 느꼈다. 보통 이런 경우 부담이 돼서라도 사고 당사자에 관해서 언급을 잘 하지 않는다.
“저도 혜영이한테 한번 말해보겠습니다.”
“꼭 좀 전해주세요. 제 진심입니다.”
“알고 있어요. 감독님 진심이라는 거.”
태화는 이번에 최수빈에게 말을 걸었다.
“최수빈 님. 잘하시네요.”
태화의 칭찬에 최수빈은 어깨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뭐. 그렇죠.”
“앞으로 기대가 큽니다.”
평소 같으면 최수빈은 이렇게 반응했을 것이다.
-서태화. 네가 웬일이냐? 날 칭찬을 다 하고?
그게 아니라면 태화의 의도를 의심했을 것이다.
-지금 한 말 진심이야? 야. 닭살 돋는다. 그만해라.
하지만 최수빈은 이렇게 반응하지 않았다. 정원석이 있어서 그렇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태화에게서 칭찬을 듣는 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화와 최수빈의 모습을 지켜보던 이한철과 송윤주가 귓속말로 말을 서로 주고받았다.
“윤주야. 예상외로 분위기 좋다?”
“그러게. 저러다 둘이 사귀는 거 아냐?”
송윤주의 말에 이한철이 고개를 저었다.
“너 그거 설레발이야.”
“설레발? 만약 아니면 어쩔 건데?”
“야. 말이 되냐? 어떻게 태화하고 수빈이가…….”
그때였다. 한재영이 슬쩍 이한철과 송윤주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두 분 아주 흥미로운 얘기 중이시네요.”
송윤주가 한재영의 말에 놀라며 말했다.
“아이. 깜짝이야! 야, 너 신호 좀 켜고 들어와.”
“뭘 그리 놀라십니까? 당연히 관심을 가질 말을 한 건데.”
이한철이 한재영에게 물었다.
“그러는 넌 어떻게 생각해?”
“뭘요?”
“태화하고 수빈이 말이야. 윤주 말대로 사귈 거 같아?”
“글쎄요.”
“글쎄요는 뭐가 글쎄요야. 둘이 사귄다는 게 말이 되냐?”
한재영은 태화가 최수빈에게 애교를 부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한재영은 그때 이후 태화와 최수빈의 관계가 미묘하게 변했음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태화와 최수빈은 감독과 여배우의 관계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무슨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한재영은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을 굳이 이 시점에서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한재영의 이런 결정은 어쩌면 당연했다. 지금은 영화 제작에 집중할 시기이기 때문이다.
“에이. 말이 안 되는 소리죠.”
“그러니까.”
하지만 송윤주는 뭔가 느낌이 있는 듯했다.
“아. 이상하네. 태화하고 수빈이. 뭔가 있는 거 같은데…….”
송윤주는 한재영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자 한재영이 송윤주의 눈길을 애써 피했다.
“너. 뭐 알고 있지?”
“없습니다.”
“근데 너 왜 내 시선을 피해?”
“누나가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그럼 같이 노려봐?”
“야. 한재영. 그러기야?”
“윤주 누나. 진짜 나 아는 거 없어. 궁금하면 나중에 직접 물어보든가.”
“너, 진짜야?”
“당연하지.”
“아무래도 너 뭔가 알고 있는 거 같은데?”
한재영은 끝까지 시치미를 뗐다.
“난 정말 모른다니까? 누나도 이제 쓸데없는 생각 그만하세요.”
“쓸데없는 생각?”
“지금은 영화에 집중할 시기 아닙니까?”
한재영이 이렇게 말하자 송윤주도 더 말을 꺼내기 뭐 했다.
“뭐. 그렇긴 하지.”
#.
잠깐의 휴식 시간을 가진 후 태화는 다시 정원석과 최수빈의 연기 연습을 이어갔다.
“이번에 두 사람이 연기할 장면은 익숙한 장면일 겁니다.”
최수빈이 태화의 말에 대꾸했다.
“오디션 때 했던 장면이잖아요.”
“맞습니다. 정원석 님은 당시 직접 오디션에 참석할 수 없어서 오디오로 녹음했던 장면이기도 합니다.”
“네. 저도 오디오로 녹음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그땐 한재영 피디님이 심수영 역할을 해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