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02화
태화와 정원석이 계단을 올라가자 평상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정원석을 반겼다. 제일 먼저 한재영이 정원석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혜영이 돌보면서 지냈습니다.”
정원석이 한재영의 얼굴을 잠깐 살피더니 발언했다.
“근데 한 피디님 며칠 사이 살이 좀 빠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보였나요?”
“네.”
“요즘 일이 좀 많아서요.”
“그러셨구나.”
한재영에 이어 이우섭과 김현석이 정원석에게 인사를 건넸다.
“두 분도 살이 좀 빠지신 거 같습니다.”
이우섭이 정원석에게 대답했다.
“살이 빠져도 힘은 납니다. 그래도 다시 촬영 들어가잖아요.”
뒤이어 김현석이 말했다.
“오늘 정원석 님 온다고 하셔서 실감이 났습니다. 정말 다시 촬영 들어가는구나.”
“저도 어제 감독님 연락받고 놀랐습니다. 저도 작품 하게 되어서 기쁩니다.”
이제 남은 건 정원석과 최수빈의 인사였다. 이 작품의 남녀 주인공이 처음으로 대면을 하게 되는 순간이다. 최수빈과 정원석이 전에 같은 작품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면 그냥 두 사람이 인사를 해도 된다. 하지만 오늘 두 사람은 처음 본 사이다. 게다가 최수빈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나중에 합류한 상황이다.
이럴 때 감독이 직접 소개를 해줘야 최수빈에게 힘이 실린다. 태화가 최수빈을 정원석에게 소개해 주기 위에서 나섰다.
“정원석 님. 이번에 심수영 역을 맡게 된 최수빈 님입니다.”
태화와 최수빈은 오늘 정원석을 만나는 자리를 계기로 호칭을 정리했다. 공식적인 자리에선 상호 존칭을 쓰기로 했다.
태화의 소개를 받은 최수빈이 정원석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방금 감독님이 소개한 최수빈입니다.”
“반갑습니다. 정원석입니다. 혜영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네?”
“오디션 때 혜영이 다음 순서였다고 하더군요.”
“네. 맞습니다.”
정원석은 최수빈과 첫인사에서 선혜영의 이야기를 굳이 꺼낼 필요가 없었다. 아무래도 불편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재영과 이우섭, 그리고 김현석은 이미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런데도 정원석이 선혜영의 이야기를 꺼냈다는 건 뭔가 의도가 있다는 말이다.
[영감님.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정원석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꺼냈군요.]
[그렇네. 정원석은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선혜영의 존재를 잊지 말라고 하는 걸세.]
[저도 그렇게 들었어요. 단지 수빈이만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죠.]
[그렇네. 하지만 최수빈은 다른 사람들보다 무게감을 느끼게 될 수밖에 없네.]
[그렇겠죠. 어쨌든 수빈이는 선혜영의 바통을 이어받은 거니까요. 하지만 수빈이는 그냥 물러나지 않을 겁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최수빈이 정원석에게 말했다.
“저도 오디션 당시 선혜영 님이 캐스팅될 거로 예상했었습니다.”
정원석이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랬습니까?”
“네. 직감 같은 게 있었으니까요.”
최수빈의 대답은 적절했다. 최수빈 자신도 선혜영을 기억하고 있다는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최수빈은 선혜영 때문에 오디션에 탈락한 존재임을 상기시켰다.
[태화 군. 최수빈이 적절하게 대처한 거 같네.]
[네. 영감님. 수빈이는 자신을 낮추면서 선혜영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높여주었습니다. 정원석으로선 만족스러울 수밖에 없죠.]
[그렇네.]
정원석은 태화의 생각대로 최수빈의 대답에 나름 만족했다. 그래서일까?
정원석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러셨군요.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부탁은 제가 드려야죠.”
최수빈과 정원석의 인사가 끝나자 한재영이 정원석에게 말했다.
“정원석 님. 방에 들어가서 커피라도 한잔하시죠.”
“커피가 있어요?”
“네. 전에 원두 사놓은 게 있는데 오늘 제가 핸드드립으로 한잔 뽑아드리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할까요?”
정원석은 한재영을 따라 옥탑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뒤이어 이우섭과 김현석도 따라 옥탑방으로 들어갔다.
태화가 최수빈의 어깨를 툭 치며 조용히 말했다.
“수빈아. 잘했다.”
“뭘?”
“방금 정원석 님에게 대답한 거. 불편했을 텐데.”
“본래 남주 여친이 여주였는데 그 여주가 사고로 더는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그 자리를 맡게 되었다. 뭐 이 정도면 어느 정도 그림이 나오는 거 아닌가?”
“그렇긴 하지. 하지만 예상한 것과 실제 그 상황에서 적절하게 대답하는 건 다른 일이지.”
“그야. 나도 작품이 잘돼야 하니까. 태화 너 잊은 건 아니겠지?”
“뭘?”
“나도 우리 영화 투자자야.”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너도 투자자지.”
#.
태화를 비롯한 사람들은 간단한 커피 타임을 가지고 나서 옥탑방을 나섰다. 한재영이 핸드드립으로 뽑은 커피는 꽤 맛이 괜찮았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더 좋은 기분으로 옥탑방을 나설 수 있었다.
정원석과 최수빈은 연기할 준비가 되었지만, 태화는 진행하지 않았다. 그러자 최수빈이 태화에게 물었다.
“감독님. 시작 안 해요?”
“잠깐만요.”
“혹시 누가 또 오기로 했어요?”
“네.”
“누가 오기로 한 거예요?”
최수빈의 질문이 끝나자마자 옥탑에 도착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이한철이었다.
“감독님! 잘 지냈습니까?”
태화는 반가운 마음에 재빨리 이한철에게 다가갔다.
“어서 오세요. 촬영 감독님.”
이한철은 자신에게 다가온 태화를 껴안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게 말했다.
“자식. 해냈구나.”
“해내야죠. 안 그러면 형이 나 가만 안 뒀을 거잖아요.”
“정말 네가 수빈이 캐스팅 못 했으면 가만 안 두려고 했었다.”
“그렇게까지 도와주었는데 말이죠.”
“그래. 인마.”
이한철은 쓸데없는 말을 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태화가 만약 최수빈을 캐스팅하지 못했다면 이한철은 방금 자신이 했던 말대로 했을지 모른다.
“저도 그럴 줄 알고 죽기 살기로 했습니다.”
“태화 너랑 같이 작업하면서 많이 놀랐지만 이번에 정말 놀랐다. 태화 네가 수빈이를 캐스팅할 줄이야.”
“우리 영화가 좌초되는 건 막아야 하잖아요.”
이한철이 껴안았던 태화를 놓았다.
“어쨌든 오늘 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나야. 필요하면 얼마든지 와야지.”
그때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거 남자 둘이 너무 흐뭇한 장면 만드는 거 아냐?”
태화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보며 활짝 웃었다.
“윤주 누나.”
태화가 다가가자 송윤주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난 임자가 있는 몸이야. 껴안으면 안 된다.”
“저도 그럴 생각 없어요.”
송윤주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고 굳이 그렇게 빨리 말할 필요는 없잖아. 안 그러니?”
“저도 그렇게까지 할 마음은 없었는데 무서운 사람이 있어서 말이죠.”
태화의 말에 이한철과 송윤주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한철과 송윤주가 평상으로 다가가자 한재영이 두 사람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두 분 다시 보니 여간 반가운 게 아닙니다.”
한재영의 말에 송윤주가 대꾸했다.
“말로만 그런 거 아닌가?”
한재영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며칠이 몇 년 같았습니다.”
한재영 옆에 있던 이우섭과 김현석이 차례로 인사를 건넸다. 먼저 이우섭이 반가운 마음을 전했다.
“저도 한 피디님과 같은 마음입니다. 두 분 너무 보고 싶었어요.”
뒤이어 김현석이 말했다.
“저도요.”
이한철이 이우섭과 김현석에게 말했다.
“정말 고맙다. 나도 두 사람이 많이 걱정됐었어.”
이우섭이 이한철에게 되물었다.
“정말입니까?”
“그래. 두 사람 첫 장편인데 엎어지면 나름대로 충격이 오래가거든. 그런데 다행이다. 다시 촬영할 수 있게 됐으니까.”
스태프들과 인사를 나눈 이한철과 송윤주는 정원석과 최수빈에게 다가갔다. 이한철과 송윤주는 먼저 정원석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정원석 님.”
“네. 두 분 다시 보니 너무 반갑네요. 다시 촬영 들어가는 게 실감도 나고요.”
이한철이 정원석에게 물었다.
“선혜영 님은 어떠세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마 지금도 이곳을 응원하고 있을 겁니다.”
“빨리 쾌차하길 빌겠습니다.”
이한철은 선혜영의 그 마음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선혜영의 쾌차를 비는 그의 말투는 아주 진중했다. 정원석도 이한철의 이러한 말투와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신경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이한철과 송윤주는 시선을 돌려 최수빈을 보았다. 최수빈은 기대 어린 시선으로 이한철과 송윤주를 쳐다보았다.
최수빈은 이한철과 송윤주를 같은 작품에서 만나고 싶어 했었다. 그래서 최수빈으로선 지금, 이 순간이 아주 기분이 좋은 시간이기도 했다.
최수빈에게 인사를 건넨 건 송윤주였다.
“이번에 새로 캐스팅된 분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송윤주는 최수빈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인사를 건넸다. 최수빈은 송윤주의 태도에 잠시 혼란스러웠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송윤주 다음으로 이한철이 인사를 건넸다. 이한철의 태도도 송윤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같이 작품을 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최수빈은 이한철과 송윤주를 번갈아 보았다. 두 사람은 여전히 최수빈을 처음 보는 사람 대하듯 했다.
‘도대체 뭐야. 두 사람 나한테 왜 이러지?’
최수빈은 혼란스러웠고 이 상황을 설명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순간 최수빈은 태화와 눈이 마주쳤다.
태화는 최수빈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저었다. 최수빈은 태화가 보낸 신호의 의미를 알아챘다. 맥락상 의문을 품지 말라는 의미였다.
최수빈은 왜 이런 상황이 발생했는지 궁금했지만 당장 태화가 보낸 신호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네. 저도 두 분 만나서 반갑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
이한철과 송윤주가 최수빈을 처음 본 사람처럼 대하라고 제안한 건 태화다. 태화가 이렇게 한 건 정원석 때문이었다. 태화는 어제 이한철에게 연락하기 전 생각을 정리했다.
[영감님. 아무래도 한철이 형과 윤주 누나가 수빈이를 처음 본 사람처럼 대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나도 자네의 생각에 동의하네. 태화 군. 자네와 이한철 송윤주 최수빈 그리고 한재영까지 같은 동문일세. 정원석 입장에선 자칫 소외감을 느낄 수 있네.]
[그렇습니다. 선혜영이 있을 땐 정원석이 굳이 소외감을 느낄 필요가 없었습니다.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항상 촬영장에서 함께 하니까요. 하지만 선혜영이 없는 지금 정원석은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죠.]
[정원석은 선혜영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질 시기라 소외감을 더 느낄 걸세.]
[그런데 한 가지 염려가 됩니다.]
[염려?]
[네. 만약 정원석이 눈치를 채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건 걱정하지 말게.]
[걱정하지 말라고요?]
[그렇네. 설마 자네의 의도가 발각된다고 해도 정원석은 자네에게 고마워할 걸세.]
[그건 정원석이 배려라고 느낄 것이기 때문입니까?]
[그렇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건 최수빈은 이 사실을 몰라야 한다는 것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