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01화
최수빈이 발언을 이어갔다.
“맞아. 포스라는 것도 그냥 나오는 건 아니잖아. 포스라는 게 어떻게 보면 사람이 성장하면서 커지는 것인데 넌 요즘 급성장한 거 같단 말이지.”
태화는 최수빈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했다.
“근데 너하고 나. 이런 이야기는 처음 해보지 않냐?”
“뭐. 그동안 이런 이야기를 할 시간이 없었지. 딱히 계기도 없었고.”
“하긴. 그동안 너하고 나 서로 으르렁대기만 했으니까.”
그때였다. 사람들이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침 일찍 나갔던 한재영과 이우섭, 그리고 김현석이었다.
한재영이 태화와 최수빈을 향해 말했다.
“뭐야? 두 사람 일은 안 하고 입 털고 있었던 거야?”
태화가 한재영에게 말했다.
“잠깐 쉬고 있었던 거야. 근데 갔던 일은?”
“당연히 잘 처리하지 않았겠어?”
“하긴 누가 갔는데.”
한재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그럼. 그럼.”
태화는 한재영뿐만 아니라 이우섭과 김현석의 손에 뭔가 잔뜩 들려 있는 걸 발견했다.
“재영아. 손에 든 건 다 뭐야?”
“오면서 시장에 잠깐 들러서 장 좀 봤지. 근데 오늘은 메뉴가 좀 특별하다.”
“특별?”
“응. 이건 현석이가 말할 거야.”
김현석이 한재영에게서 바통을 이어받아 발언했다.
“이제 곧 촬영이잖아요. 체력도 재충전해야 하고…. 그래서 삼계탕 준비했습니다.”
김현석의 대답을 들은 최수빈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근데 현석 씨는 삼계탕도 할 줄 알아요?”
“네. 좀 합니다.”
태화가 최수빈에게 말했다.
“현석이. 취사병 출신이야. 조리사 자격증도 있고.”
“어머 정말이에요?”
김현석이 최수빈의 질문에 대답했다.
“네. 근데 수빈 님은 삼계탕 싫어하는 건 아니죠?”
“네. 좋아해요.”
“그럼. 다행이네요.”
#.
얼마 후.
옥탑 평상에는 커다란 상이 펴졌고 태화와 한재영, 그리고 최수빈은 메인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엌에서 이우섭의 외침이 들렸다.
“자. 메인 요리 나갑니다.”
이우섭과 김현석은 각자의 손에 삼계탕을 들고 평상으로 이동했다.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 삼계탕을 하나씩 놓았다. 한재영이 툭 던지듯 말했다.
“이야. 냄새 좋고.”
한재영이 냄새를 맡고 나서 한 숟가락 떴다. 한재영은 맛을 보고 나서 절로 감탄이 나왔다.
“야. 맛있다. 태화야 먹어봐.”
“그래?”
태화도 김현석이 만든 삼계탕의 맛을 보았다. 한재영의 말대로 삼계탕의 맛이 제법이었다.
“현석아. 정말 맛있다.”
“하하. 다행이에요”
태화가 맛있다고 하자 최수빈도 그 맛이 궁금했다. 최수빈도 한 숟가락 떴다.
“음. 맛있네요. 고소한 맛도 나고.”
태화를 비롯한 사람들은 각자 한 숟가락을 맛보고 나서 본격적으로 삼계탕을 먹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그때였다.
태화가 입을 열었다.
“먹기 전에 잠깐.”
태화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내일 정원석 님이 여기 올 거야.”
한재영이 태화에게 물었다.
“선혜영 님. 아직 퇴원 안 했잖아.”
실제 재촬영은 선혜영이 퇴원하고 삼 일 후부터 시작이다.
“그렇긴 한데. 촬영 전에 남주하고 여주하고 만나야 하잖아.”
“그렇지. 그런데 언제 통화한 거야?”
“어제저녁 때 했어.”
태화는 정원석에게 전화를 거는 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최수빈이 합류를 결정하고 나서도 바로 연락하지 않았다. 특히 선혜영에게 도리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연락하는 걸 마냥 미룰 수는 없었다.
태화는 바로 어제가 마지노선이라고 생각했고 정원석에게 연락을 취했었다.
“안녕하세요. 정원석 님.”
-감독님이시군요. 잘 지내시죠?
“저야. 잘 지내고 있습니다. 선혜영 님은 어떠세요?”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행입니다. 정원석 님.”
태화는 말을 더하지 않고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자 정원석이 발언했다.
-감독님. 말씀하세요.
“선혜영 님을 대체할 여배우를 섭외했습니다. 지금 연기 연습 중입니다.”
-아. 잘됐군요.
정원석의 대답은 차분했다. 그의 곁에 선혜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내일 옥탑으로 와주실 수 있나 해서 연락드렸습니다.”
-당연히 가야죠. 촬영 들어가야 하잖아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뵙도록 하겠습니다.”
-네. 감독님.
태화가 최수빈에게 말했다.
“수빈이 너 괜찮지?”
최수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야 뭐. 좋지. 촬영 전에 합도 맞춰봐야 하니까.”
“좋아.”
태화가 김현석을 보며 말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삼계탕은 시기가 적절한 거 같다.”
“네. 근데 내일 정원석 님이 온다고 하니까 실감이 나는 것 같습니다.”
“좋냐?”
“네. 다시 마음이 설레는 것 같습니다.”
“녀석. 얼굴에 화색이 도네.”
태화는 한재영과 최수빈, 그리고 이우섭과 김현석과 차례로 눈을 마주쳤다.
“자. 삼계탕 먹고 힘내자.”
#.
다음 날 오전.
태화는 정원석을 마중 나갔다. 태화가 정원석을 마중 나간 건 정원석이 자가용이 아니라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옥탑으로 오기 때문이었다.
태화는 근처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정원석을 기다렸다. 정원석은 선혜영이 입원해 있는 우신 병원에서 출발할 때 그리고 전철에서 내릴 때 태화에게 연락했다.
태화는 정원석이 전철에서 내렸다는 메시지를 받고 옥탑에서 마을버스 정류장으로 출발했다. 태화는 멀리서 마을버스가 정류장으로 오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 태화는 마을버스가 오고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도착한 건가?’
마을버스가 태화가 있는 정류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윽고 마을버스가 정류장에 멈춰 섰다. 마을버스의 뒷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하차하기 시작했다.
정류장에서 내리는 사람은 대여섯 명 정도였는데 정원석은 제일 끝 쪽에 서 있었다. 태화는 정원석과 어떻게 인사할지 잠시 고민이 되었다.
[영감님. 고민이 좀 되는군요.]
[정원석과 인사할 때 어떻게 할지 그것 때문에 그런 건가?]
[마치 제 생각을 읽은 듯하군요.]
[뭐. 이런 상황에서 고민이란 게 뻔하지 않은가?]
[밝게 하는 게 나을까 아니면 톤을 낮춰서 하는 게 나을까 그게 고민입니다.]
[자네가 밝게 인사하면 선혜영에 대한 예의가 아닐 테고 반대로 톤을 낮추면 현재 상황과 맞지 않지. 어쨌든 영화는 다시 촬영이 재개될 테고 그건 좋은 일이니까.]
[그러니까요.]
[이렇게 애매할 때 자네가 할 수 있는 건 제한적일 수밖에 없네.]
[해법이 있다는 말이군요.]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게나. 자넨 그냥 가볍게 미소를 지으면 되네.]
[뭐.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 그런 겁니까?]
[그건 아닐세. 때론 웃는 낯에 침이 아니라 주먹이 날아들 수도 있네.]
[그런데 저보고 미소를 지으라는 겁니까?]
[하지만 자네의 미소는 좀 다르네. 자네의 미소는 남녀노소 다 통할 수 있는 자네의 무기라면 무기일세. 매력적인 미소를 보고 시비를 걸 사람은 없네. 그러니 걱정하지 말게. 단 과하게만 하지 말게.]
[알겠습니다.]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태화가 한재영의 옥탑방에 머물면서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들과 지나가면서 만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태화는 그 사람들에게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는데 그 사람들은 어느새 태화를 호의적으로 대했다.
태화는 정원석을 보자마자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정원석 님. 어서 오세요.”
정원석은 태화의 인사를 받자마자 역시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태화에게 인사를 건넸다.
“감독님. 며칠 만에 뵙는데 반갑네요.”
태화는 정원석의 표정을 보고 일단 안심했다.
“그러게요.”
태화의 시선이 정원석의 복장으로 향했다. 정원석은 짙은 갈색의 트레이닝 바지에 상의는 하늘색 티셔츠에 짙은 데님 재킷을 입고 있었다.
“정원석 님. 오늘 복장이 편해 보입니다.”
“오늘 단순히 미팅만 하는 건 아니잖아요. 연기도 해야 하니까.”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어쨌든 저도 작품에 책임을 져야죠.”
정원석이 동네를 눈으로 한번 둘러보며 말했다.
“전에 자가용으로 왔을 땐 몰랐는데 동네가 꽤 운치가 있네요.”
“약간 달동네 느낌도 나고 그렇죠.”
“요즘 이런 동네 찾아보기 힘들잖아요.”
“그렇긴 하죠.”
태화와 정원석은 함께 동네를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캐스팅이 빨리 이루어졌네요.”
“운이 좋았다고 봐야죠.”
“솔직히 계속 작품에 참여한다고 했지만, 반신반의했거든요.”
“알고 있습니다. 여주 캐스팅이 문제였으니까요.”
“네. 감독님이 어느 정도 자신이 있으니까 저에게 계속 작품에 참여해달라고 청했지만…….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그런 생각도 들었었거든요.”
“뭐. 당연히 그런 생각할 수 있죠.”
“그런데 어떻게 캐스팅이 된 겁니까?”
“다행히 선혜영 님과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였던 연기자가 있었어요.”
“혹시 그 연기자 혜영이 다음에 연기했던 분 아닌가요?”
태화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어제 감독님 연락받고 혜영이가 그러더군요. 캐스팅된 여배우 아무래도 자기 뒤에 연기했던 사람 같다고…….”
“선혜영 님의 육감이 대단하군요.”
“뭐. 그런 거 있잖아요. 그전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지만 저 사람은 내 경쟁자다. 라고 느낄 때가 있잖아요. 혜영이가 그분을 봤을 때 그런 걸 느꼈대요.”
선혜영의 직감은 인간의 동물적인 본능과 맞닿아 있다. 자신과 경쟁이 될 상대는 한 번만 봐도 알아보는 것이다.
태화와 정원석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한재영의 옥탑방이 있는 건물에 도착했다.
“정원석 님. 다 왔군요. 먼저 올라가시죠.”
“네. 감독님.”
정원석은 옥탑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정원석은 계단을 올라가다 잠시 멈춰 섰다.
“감독님. 이쯤이죠?”
“네. 그쯤입니다.”
정원석은 눈을 감고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바로 계단을 올라갔다. 태화는 정원석의 행동이 의외였다.
“정원석 님.”
“네. 감독님.”
“좀 더 계셔도 괜찮습니다.”
“아니요. 이미 지난 일입니다.”
“…….”
정원석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혜영이가 그러더군요. 혹시라도 계단 올라갈 때 멍 때리지 말라고.”
태화는 새삼 선혜영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태화는 정원석이 계단을 올라갈 때 염려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그건 정원석이 다시 톤 다운되는 것이었다.
주연 배우가 그것도 작품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배우가 톤 다운이 된다면 감독으로선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화가 정원석이 먼저 계단을 오르게 한 것도 사실 의도된 행동이었다. 정원석이 계단에 머무르는 시간을 길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한 나름 조치였다.
“정원석 님.”
“네. 감독님.”
“선혜영 님에게 전해주십시오. 제가 우리 영화 반드시 극장에 개봉시킬 거라고.”
“네. 꼭 전하겠습니다.”
“그럼. 올라가실까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