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00화
박도봉 감독은 태화가 가지고 있는 해법에 흥미를 느꼈다.
[무슨 생각이 있는 건가?]
[네. 단순히 표정만으로 소화하기 힘들다면 제스쳐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음. 아주 좋은 생각일세. 나도 자네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네.]
[정말입니까?]
[그렇네. 아주 풀기 어려운 문제도 그 해결책은 아주 쉬운 경우가 간혹 있긴 하지. 지금 같은 경우가 그렇네.]
한편 최수빈은 태화가 말하지 않더라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번 연기는 실패라는 걸.
최수빈은 처음 시도에 성공할 거로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실망스러운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최수빈은 이걸 느끼자마자 시간을 끌지 않았다.
“그만할게. 그러는 게 나을 거 같아.”
“오케이. 쉽지 않지?”
최수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역시 쉽지 않네. 미안해.”
“어쩔 수 없지. 연기하기에 쉬운 부분은 아니니까. 수빈아.”
“왜?”
“이제부터 내가 너에게 연기 방향을 말하려고 해. 괜찮겠지?”
태화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최수빈에게 했다. 이건 최수빈에 대한 배려였다.
최수빈도 태화의 이런 배려를 느끼고 있었다. 감독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라고 지시를 하면 된다.
최수빈은 이러한 태화의 배려가 나쁘지 않았다.
“그야 당연하지. 네가 감독인데.”
“일단 네 연기를 본 느낌을 말해볼게.”
“말해줘.”
“현재 넌 표정으로만 감정을 표현하려고 하고 있어.”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야?”
“여기서 중요한 건 심수영의 감정의 변화를 표현하는 거야.”
“그래서 표정이 중요한 거잖아.”
“바로 그게 최수빈 너의 실책이야.”
“뭐? 실책이라고?”
“감정의 변화를 표현하는 데 표정이 중요하지. 하지만 수빈이 넌 표정에만 과몰입이 되어 있어.”
“내가 과몰입이 되어 있다?”
“그래. 감정을 표현하는 데 표정이 다가 아니야.”
“…….”
“때로는 감정을 표현할 때 표정이 아니라 제스쳐가 더 효과적일 수도 있어.”
“제스쳐?”
“그래. 불안과 초조함을 표현하는데 적절한 제스쳐는 뭐지?”
최수빈은 태화의 말에 뭔가 생각이 난 듯했다.
“아. 맞다. 손톱 물어뜯는 거?”
“바로 그거야.”
“하지만 너무 전형적이지 않나?”
태화는 최수빈의 의견에 고개를 저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관객에게 심수영의 감정을 전달하는 거야. 이 장면에서 심수영의 감정의 변화는 분명해. 하지만 방금 수빈이 네가 한 연기에선 어떤 감정을 표현하려고 하는지 전달이 안 됐어.”
태화는 방금 최수빈이 연기한 장면을 찍은 영상을 보여주었다. 최수빈이 잠시 자신의 연기를 모니터링한 후 자신의 느낌을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의도한 대로 잘 안 됐어. 난 떨림으로 감정의 변화를 표현하려고 했는데 잘 안되더라고.”
“수빈이 너의 욕심이 뭔지 알 것 같아.”
“…….”
“연기자도 뭔가 자신만의 연기를 하고 싶어 하지. 그래야 차별성을 가지니까.”
감독이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듯 연기자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갖기를 원한다. 최수빈은 태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
“하지만 그 시도가 제대로 되지 않았어. 지금 당장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가능성이 보였다면 난 기다릴 수 있어. 넌 어떻게 생각해?”
태화의 이 질문은 최수빈에겐 다소 자존심 상하는 질문이었다.
“자존심 상하지만 네 말이 맞아. 내가 연기한 걸 찍어놓은 영상을 보니 좀 한심하더라.”
최수빈은 자신의 연기에 관해서 비교적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영감님. 수빈이가 생각 외로 쉽게 인정하는군요. 전 수빈이가 좀 더 자기주장을 할 거로 예상했습니다.]
[그만큼 최수빈은 욕망이 강한 거네.]
[이 작품을 발판으로 삼겠다는 생각이 강할 테니까요.]
[태화 군. 이제부터 대화가 중요하네.]
[네?]
[상대가 잘못을 인정했다고 해서 시종일관 밀어붙이듯 대화하면 그 결과는 나쁠 수밖에 없네. 그래. 너 잘났다고 말하면서 대화가 결말을 맞게 되지.]
[영감님 말은 대화의 강약을 조절하란 말이군요.]
[그렇네. 사람은 이성보다 감정이 더 앞서기 때문일세. 자네의 논리가 아무라 맞더라도 상대의 감정을 건드리게 되면 그 결과는 뻔할 수밖에 없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태화는 앞으로 최수빈과 하게 될 대화를 머릿속에 그렸다. 그런 후 태화는 최수빈에게 말했다.
“미안하게 생각한다.”
최수빈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대화의 흐름으로는 태화는 최수빈 자신을 몰아붙이는 게 자연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뭐가 미안해?”
“현 상황 때문에 수빈이 너에게 시간이 충분하지 않잖아.”
최수빈은 태화의 말을 듣고서 다소 상했던 자존심이 회복하는 걸 느꼈다.
“그거야 뭐……. 나도 그걸 알고 시작한 거니까.”
“이해해 줘서 고맙다. 어쨌든 난 감독으로서 결정해야 해. 촬영 개시도 얼마 안 남았고……. 난 현실적인 걸 택할 거야.”
“네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아.”
“나한테 서운하지?”
최수빈은 태화에게 서운함보다 이렇게까지 말해주는 태화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서운하긴. 나한테 실망하지 않았어?”
“왜?”
“내가 너무 연기로 표현하지 못한 거 같아서.”
“난 너의 이런 모습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뭐?”
“네가 처음부터 너무 잘하면 감독인 내가 무안하잖아.”
태화의 말에 최수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깝다. 정말 잘했어야 했는데.”
“하하. 그런가?”
“다시 한번 해보자. 이번에는 네 말대로 연기할게.”
“오케이.”
태화는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 그리고 녹화 버튼을 누르면 말했다.
“수빈아. 시작해.”
태화의 말에 이어 최수빈의 연기가 시작됐다. 최수빈은 먼저 숨이 가쁜 연기를 펼친 후 대사를 쳤다.
-이런 젠장! 왜 하필 지금!
최수빈은 대사를 치고 나서 자기의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최수빈은 단순히 손을 입으로 가져간 게 아니었다. 그녀는 손을 살짝 떤 채로 입으로 가져갔다.
[영감님. 그냥 손을 떨면서 입으로 가져가니 확실히 더 느낌이 사는군요.]
[나도 그렇게 느꼈네. 확실히 최수빈은 감각이 있는 거 같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런 경우 자신이 전에 시도했던 건 아예 잊어버리고 가는 경우가 많은데 지금의 시도는 좋아요. 처음 시도에서도 손이 떨리는 연기는 나름 괜찮았거든요.]
최수빈은 연기의 순서를 짜면서 자신이 처음 했던 연기를 떠올렸다. 그리고 어디까지 괜찮았는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최수빈은 처음엔 검지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러다 최수빈은 엄지손톱을 물어뜯었다.
[태화 군. 단순히 검지손톱에서 엄지손톱으로 물어뜯는 위치가 바뀌었을 뿐이지만, 확실히 감정의 깊이가 달라.]
[네. 저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검지 손톱을 물어뜯는 단계가 불안과 초조의 감정이라면 엄지손톱을 물어뜯으면서 공포로 그 감정이 고조되고 있어요.]
[음. 자네 말이 맞네. 지금 최수빈은 아주 효율적으로 연기를 펼치고 있다고 할 수 있네.]
연기자가 효율적으로 연기를 한다는 건 전반적으로 에너지 소비가 적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장면이 롱 테이크인 우리 영화에 아주 적합한 연기죠.]
[그렇네.]
태화는 기대감을 가진 채 최수빈의 연기를 지켜보았다. 최수빈은 엄지손톱을 점점 거칠게 물어뜯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입가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이것만으로 공포라는 감정이라 표현하기에 부족했다. 최수빈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점점 초점을 잃어갔다. 단순히 눈동자가 커지는 건 공포라기보다는 놀람의 감정이다. 사람이 공포가 밀려들기 시작하면 눈에 제대로 보이는 게 없게 된다. 최수빈의 초점 없는 눈동자는 바로 그걸 표현하고 있었다.
태화는 최수빈의 연기에 만족감을 느끼며 외쳤다.
“오케이!”
태화는 카메라의 녹화 버튼을 껐다. 막 연기를 끝낸 최수빈이 태화를 향해 말했다.
“내 연기 어땠어?”
태화가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최고였다.”
“정말?”
“그래. 손톱을 물어뜯는 장면은 전형적이지만 네 연기는 그걸 뛰어넘었어.”
태화는 최수빈에게 칭찬을 넘어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전형적인 걸 전형적이지 않게 보이도록 하는 것도 대단한 능력이기 때문이다.
최수빈도 태화가 한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최수빈은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었다.
마치 여인이 사랑을 확인하듯.
“방금 한 말 진심이야?”
“당연히 진심이야. 현시점에서 내가 너한테 거짓말할 이유가 없잖아.”
최수빈은 한숨을 크게 내쉬며 말했다.
“정말 다행이다.”
“…….”
“하긴 나도 연기하면서 느낌이 나쁘지 않았어.”
“수빈아. 방금 네 모습 처음 본다.”
“뭘?”
“연기하고 나서 어땠는지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거. 처음 본다고.”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야?”
“뭐가?”
“네가 감독이니까. 내가 아무리 잘했다고 생각해도 감독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거잖아.”
“그렇긴 하지. 그런데 오늘 너 내가 못 해본 거 했다.”
“태화 네가 못 해본 거?”
“응. 나 연기 지망생 시절에 감독한테 칭찬 한 번 들어보는 게 소원이었거든.”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난 끝내 그 칭찬 못 들었지. 욕만 잔뜩 얻어먹고……. 그런데 감독이 되고 나서 연기자에게 칭찬하고 있잖아. 인생 참 웃기지 않냐?”
태화의 말에 최수빈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게. 살다 보니 이런 일을 다 겪어보네.”
태화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볼 때 넌 연기의 재능이 있는 거 같다.”
태화의 이 발언은 진심이었다. 최수빈도 태화의 이 말이 진심이라는 걸 느끼고 있었다.
최수빈이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걸 이제 알았어?”
“수빈이 네 연기를 보면서 잠시 다른 상상을 해보기도 했었어.”
“다른 상상?”
“만약 나한테 수빈이 네 정도의 연기 재능이 있었다면……. 내 삶은 어땠을까?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을까?”
“그건 모른다 아닐까?”
“모른다?”
“그래. 네가 재능이 있어도 결국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야 하잖아. 언제 그 사람이 나타날지도 모르고.”
“하긴 내 재능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없다면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말짱 꽝이지.”
“난 태화 네가 감독으로서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수빈이 너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니야?”
“내가 노골적이라고?”
“그래. 내가 널 여주로 써서 나한테 재능이 있다고 한 거 아니야?”
최수빈은 태화의 말에 활짝 웃었다.
“들켰나?”
“그래. 너무 티 났어.”
태화와 최수빈은 한동안 소리를 내며 웃었다.
“서태화. 너 지금 어울려.”
“뭐가?”
“감독이라는 옷이 어울린다고.”
“그래?”
“전에 네가 연기할 땐 뭔가 안 맞는 옷을 입는다는 느낌이었어. 하지만 지금은 달라. 멋진 슈트를 입고 있는 느낌이야. 나름 포스도 느껴지고.”
“그게 다 내가 감독으로서 재능이 있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