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99화
순간 최수빈은 화들짝 놀라 태화에게서 떨어져서 방문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최수빈은 태화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하지만 태화는 잠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뭐야. 일어나려는 게 아니었어?”
뒤이어 태화의 잠꼬대가 이어졌다.
“야. 그거 아니라고!”
태화는 요즘 연출에 관해서 나름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잠꼬대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최수빈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뭐야? 잠꼬대한 거야?”
최수빈은 태화가 잠꼬대하자 다시 태화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려는 의도였다.
“야. 최수빈!”
태화가 다소 화가 난 말투로 잠꼬대를 했다. 최수빈은 태화의 잠꼬대에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뭐야? 너 지금 꿈속에서 나를 본 거야? 왜? 내가 네 뜻대로 잘 못 하디? 아주 꿈속에서 제대로 괴롭히는 모양이네.”
이어서 태화의 잠꼬대가 계속 이어졌다.
“최수빈!”
현재 태화의 말투는 조금 전 말투보다 좀 더 거칠어진 상태였다. 최수빈은 태화의 이 말투가 재밌었다. 그만큼 꿈속에서 자신이 태화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 아닌가? 최수빈은 태화의 애교 말투 때문에 잠을 설친 걸 생각하면서 조금은 고소해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최수빈이 장난스럽게 그 옆에서 대화하듯 대꾸했다.
“왜 자꾸 불러.”
“너. 바보냐? 너 그거밖에 못 해!”
태화의 잠꼬대에 순간 최수빈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뭐? 바보? 이게 진짜……. 잠꼬대라고 다 봐줄 수 있는 건 아니다?”
최수빈은 방금 태화가 한 잠꼬대는 그럭저럭 참을 수 있었다. 문제는 바로 그다음이었다.
“야! X 대가리야!”
최수빈은 순간 발끈했다.
“뭐? X 대가리? 이게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최수빈은 순간 자기의 손바닥으로 태화의 가슴팍을 퍽 하고 내려쳤다. 그 충격 때문에 태화는 잠에서 깰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태화는 그냥 잠에서 깬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꿈속에서 했던 말을 하면서 깨어났다.
“야! 넌 방금 한 것도 기억 못 하냐!”
태화는 잠꼬대하면서 동시에 상반신을 일으켰다. 태화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헉. 헉. 꿈이었구나.”
잠에서 막 깬 태화는 아직 최수빈이 자신의 옆에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너 잠꼬대 심하게 하더라.”
태화는 최수빈의 말에 깜짝 놀랐다.
“깜짝이야!”
태화가 최수빈을 보며 말했다.
“너. 언제 왔어?”
“조금 전에.”
“아. 그래. 내가 깜빡 잠들었나 보다. 왔으면 깨우지, 그랬어.”
“근데 다른 사람들은?”
“헌팅된 장소 확인한다고 일찍 나갔어.”
“근데 꿈이 악몽이었나 봐? 잠꼬대까지 하는 거 보니까.”
“하하. 그랬나?”
“꿈속에서 내가 너 많이 괴롭힌 거 같더라?”
“뭐?”
“그래서 너 나한테 막 뭐라고 하던데?”
태화는 순간 긴장했다. 태화는 자신이 꾸었던 꿈이 모두 기억이 나는 건 아니었지만 마지막 부분은 어느 정도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내가 뭐라고 했는데?”
“`X 대가리라고.”
태화는 ‘헉’ 소리가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야. 그건 꿈에서 한 거잖아. 현실에서가 아니고.”
“그렇지. 꿈이지. 그래서 네가 그렇게 잠꼬대한 게 화가 나는데…….”
태화는 차라리 사과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아무리 꿈속 잠꼬대라도 듣는 사람으로선 기분이 나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미안하게 됐다.”
최수빈은 태화가 사과까지 한 마당에 더 뭐라고 하기도 뻘쭘했다.
“이거 화를 못 내겠네.”
태화는 최수빈의 발언에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수빈이 너 좀 달라진 거 같다.”
“뭐. 전 같으면 네 사과가 문제겠냐?”
“그래. 아마 질렀겠지.”
“근데 오늘은 아니야.”
태화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너 무슨 일 있었냐?”
“뭐. 내가 우리 영화의 기적이잖아. 이 정도는 감내해야지.”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넌 기적이지.”
태화는 말을 마치고 나서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 최수빈이 말했다.
“뭐 찾아?”
“응. 여기 바닥에 동선 새로 짠 게 있을 텐데.”
“저기 책상 위에 있다.”
“책상 위에?”
태화는 몸을 일으켜 책상으로 갔다. 최수빈의 말대로 책상 위엔 태화가 잠들기 전 짰던 동선이 차곡차곡 정리되어있었다.
“이거 수빈이 네가 정리한 거야?”
“그래. 눈에 보이길래. 내가 지저분한 건 또 못 보거든.”
“하여튼 고맙다.”
“그런데 어떻게 진행할 거야?”
“무슨 소리야?”
“다른 스태프들은 나가고 없잖아. 누가 대사를 쳐줘.”
“나갔다가 점심 때쯤 돌아올 거야. 그래서 오전에는 대사 치는 거 빼고 바뀐 동선을 익히는 거지.”
“오. 그러면 되겠네.”
“그럼. 밖으로 나가자.”
“오케이.”
#.
태화와 최수빈은 옥탑 평상으로 이동했다. 태화는 평상으로 가면서 방에 있던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최수빈이 연기하는 모습을 촬영하기 위해서다.
최수빈은 태화가 수정해서 만든 동선이 전반적으로 마음에 들었다.
“이 부분 마음에 드네.”
“어떤 점이?”
“전에는 여기서 좀 복잡하다고 생각되었었거든? 그런데 좀 간결하게 된 거 같아서 좋은 거 같아.”
최수빈이 말한 부분은 시선 처리 부분이었다. 심수영이 박성욱에게 쫓기기 시작하는 부분인데 전에 있던 동선에선 시선 처리가 꽤 복잡했다. 태화는 심수영의 복잡한 심경을 표현하기 위해서 짠 연출이었는데 이게 외려 화면을 복잡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래서 태화는 시선 처리를 과감하게 줄이고 심수영의 감정 변화에 집중하기로 했다.
“시선 처리는 심플하게 정리했지만 그렇다고 편한 장면은 아니야.”
“…….”
“어떻게 보면 전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어.”
“알아. 표정 연기를 적절하게 끌어올려야 하니까.”
“맞아. 너무 지루하지 않게 심수영의 복잡한 심경을 표현해야 해. 최수빈.”
“왜?”
“할 수 있겠지?”
“무조건 해내야 하는 거 아냐?”
“좋아. 이 씬에서 심수영의 감정은 뭐야?”
“불안, 초조, 공포 아닐까? 이제 박성욱에게 잡히면 끝일 테니까.”
“하나가 빠졌어.”
“그게 뭔데?”
“심수영은 타이밍만 맞았다면 수십억의 돈을 가질 수 있었어. 하지만 결국 박성욱에게 걸리게 되지.”
태화의 설명을 듣던 최수빈이 대답했다.
“아쉬움.”
“맞아. 아쉬움의 감정이 빠졌어. 그렇다면 감정의 변화는?”
“당연히 아쉬움에서 불안, 초조, 공포로 가야겠지.”
“맞아. 그 변화를 네가 그려내야 해.”
“이거 만만치 않은데.”
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연히 만만치 않지. 하지만 그걸 해내야 주인공인 거지.”
최수빈은 태화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
‘서태화. 지금 나한테 도발하는 거 맞지?’
최수빈은 이러한 태화의 속내를 알고 있었고 바로 맞받아쳤다.
“지금 나 불 지르는 거지?”
“끓어오르지 않는다면 여주 자격 상실이지. 안 그래?”
태화가 미소를 지으며 최수빈을 바라보았다.
“최수빈이라면 해내야지. 성격은 안 좋아도…….”
최수빈은 ‘성격은 안 좋아도’라는 말에 발끈했다.
“뭐? 그걸 말이라고!”
“최수빈이 연기에 관한 자존심 하나는 세잖아. 아닌가?”
태화의 말처럼 최수빈은 연기에 관해선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인물이었다.
“그런 유치한 도발을…….”
“말은 그렇게 해도 이미 통한 거 같은데?”
“…….”
“수빈아. 한번 해보자.”
최수빈은 태화의 제안에 대답하지 않았다. 최수빈은 말보다 크게 한숨을 쉬는 것으로 대신했다.
[영감님. 수빈이의 눈빛이 달라졌어요.]
[태화 군. 자네의 도발이 어느 정도 통한 거 같네.]
[수빈이는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에요.]
[그만큼 자네의 도발에 반작용이 작용했겠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일수록 자신에게 한 도발에 더 강하게 반응하니까.]
[네. 저도 그걸 노리고 도발한 겁니다.]
#.
최수빈은 크게 몇 번 한숨을 쉬고 나서 눈을 감았다. 최수빈은 눈을 감은 채 감정을 서서히 끌어올렸다. 최수빈은 자신이 연기해야 할 감정의 변화에 대해서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아쉬움에서 불안과 초조로 어떻게 넘어가지?’
아쉬움과 불안, 초조의 감정은 그 갭이 상당했다.
‘이 갭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최수빈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답이 나올 리 없었다.
‘일단 해보자. 부딪쳐 보는 거지.’
최수빈은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자 태화가 기대 어린 시선으로 최수빈을 바라보는 게 보였다.
최수빈은 태화의 표정을 보자 부담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비록 실전은 아니라도 감독에게 기대받는다는 건 좋은 일이긴 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부담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한번 해볼게.”
“좋아.”
“그전에 한 가지만 말할게.”
“말해봐.”
“시나리오상에는 대사가 없는데 넣어도 되는 거야?”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알았어. 그럼 시작할게.”
“오케이. 네가 하는 연기 촬영할 거야. 괜찮겠지?”
“좋아.”
“그럼. 시작해.”
태화는 카메라의 촬영 버튼을 눌렀다. 뒤이어 최수빈은 연기를 시작했다.
최수빈은 우선 숨이 차는 연기를 먼저 시작했다. 이건 시나리오상 앞의 상황과 이어지는 연기기 때문이다.
최수빈이 잠시 가쁜 숨을 멈춘 상태에서 대사를 쳤다.
-이런 젠장! 왜 하필 지금!
최수빈이 방금 친 대사가 바로 새롭게 넣은 대사다. 최수빈이 이 대사를 넣으려고 한 건 대사만으로도 아쉬움이라는 감정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수빈은 대사를 치고 나서 다음 연기로 들어갔다. 최수빈은 불안감을 표현하기 위해서 손을 떨기 시작했다. 태화는 빠짐없이 최수빈의 연기를 유심히 관찰했다.
태화가 보기에 지금까지 최수빈의 연기는 괜찮았다.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불안과 초조 그리고 공포로 이어지는 감정의 연기.
최수빈은 손에서 시작된 떨림이 서서히 표정으로 이어지려는 의도를 가지고 연기했다. 하지만 최수빈의 의도대로 얼굴 근육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았다.
그런 결과 최수빈의 표정은 묘하게 어색했다. 얼굴 근육이 제대로 떨림을 표현하지 못하고 얼굴만 잔뜩 찌푸린 표정이었다.
[영감님. 쉽지 않군요.]
[그렇네. 이런 연기를 소화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닐세.]
[하지만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나도 자네와 생각이 같네. 확실히 최수빈은 연기의 기본은 되어 있네. 단 이 장면 연기에서 방법을 못 찾고 있을 뿐이네. 하지만 그 해법은 선혜영과 달라야 하네.]
선혜영은 연극 연기를 통해서 표정 연기에 관해서 어느 정도 훈련이 된 상태였다. 연극 무대의 특성상 다소 과한 표정을 짓곤 했는데 이게 오히려 이 장면을 연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어쨌든 선혜영은 풍부한 표정을 가지고 있었고 태화는 선혜영에게 과한 표정을 죽이는 방향으로 연기 방향을 설정했었다. 그리고 이게 의외로 잘 먹혔었다.
[네. 저도 영감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그래서 말인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