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98화 (96/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98화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왜 이렇게 버벅대?”

“피곤해서 그런가?”

“피곤할 텐데 쉬어라.”

“하하. 아무래도 그래야겠네.”

“아. 그리고 내일부턴 편한 복장으로 와.”

“이거 일상복인데?”

“그렇긴 해도 트레이닝복이 더 낫지 않겠어?”

“그렇게까지 해야 해?”

“뭐 선택은 자유야.”

“정말 빡세게 시킬 모양이네.”

최수빈은 어색하게 웃은 후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태화가 차창을 열고 말했다.

“수빈이 너 딴짓하지 말고 쉬어라.”

“뭐? 딴짓?”

“푹 자고 오라는 말이야.”

“알았다. 알았어.”

“그럼 난 간다.”

태화는 최수빈과 인사를 나눈 후 차를 돌려 출발했다. 최수빈은 태화가 탄 차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태화가 탄 차가 사라지자 최수빈은 한 손으로 자기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도대체 난 왜 버벅댄 거니?”

#.

최수빈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나서 실내복으로 갈아입었다. 최수빈은 아직 머리를 말리지 않은 젖은 상태로 자신이 책상에 놓아둔 꽃바구니를 보았다.

최수빈은 꽃바구니를 보자 태화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파란 장미. 꽃말은 기적. 네가 우리 작품의 히로인이 된 게 기적이니까.

최수빈은 태화의 말을 떠올리며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고맙다. 서태화. 네가 처음으로 나를 대우해 주는구나.”

최수빈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참 아이러니하다고 느꼈다.

서태화가 누구던가, 최수빈 자신이 한때 가장 멀리하려고 했었던 사람 아니던가? 그런데 그 서태화가 최수빈 자신의 자존감을 세워주고 있었다.

최수빈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여분의 벽걸이를 책상 서랍에서 꺼내 벽에 붙였다. 그리고 파란 장미가 담긴 꽃바구니를 벽걸이에 걸었다.

최수빈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나 파란 장미가 담긴 꽃바구니와 벽을 바라보았다. 파란 장미가 담긴 꽃바구니는 확실히 집안 장식의 효과도 있었다. 최수빈의 집 벽은 파스텔 톤의 색이었는데 파란 장미와 잘 어울렸다. 최수빈이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벽이랑 잘 어울린다. 예쁘네.”

최수빈은 꽃바구니로 다가가 파란 장미의 꽃향기를 맡았다.

향긋하고 달콤한 향기가 최수빈의 코로 스며들었다. 최수빈은 꽃향기를 맡고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였을까?

최수빈은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홀로 외쳤다.

“나는 기적이다!”

#.

다음 날.

최수빈은 태화의 말대로 편한 복장으로 옥탑으로 출근했다. 최수빈은 위아래 네이비 컬러의 트레이닝복을 입고 왔는데 꽤 잘 어울렸다.

[태화 군. 어제는 안 입고 올 거 같더니 결국 입고 왔구먼.]

[그러게요.]

태화가 최수빈에게 말했다.

“편하니까 좋지?”

“그렇지 뭐.”

“잘 어울린다.”

태화와 최수빈은 옥탑에서 연기 연습을 할 계획인데 오늘부턴 최수빈이 직접 연기를 펼칠 예정이다. 태화는 연기 연습하기 전 이한철이 맡겨둔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수빈이 너도 알 거야. 자신이 연기한 걸 영상으로 찍어서 보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라는 걸.”

“그야 잘 아는 내용인데……. 네가 직접 촬영할 거야?”

“왜? 내가 못 할 거 같아?”

“그런 건 아니지만…….”

“걱정하지 마. 나도 기본적인 촬영은 할 줄 아니까. 너는 그냥 연기만 집중해서 하면 돼.”

“알았어.”

최수빈이 단독으로 나오는 장면은 최수빈이 혼자 연기하면 되지만 문제는 상대가 있는 장면이었다. 이 장면에선 한재영과 이우섭, 그리고 김현석이 대사를 쳐주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한재영과 이우섭은 그럭저럭 대사를 쳤는데 문제는 김현석이었다.

김현석은 긴장해서 그런지 대사가 씹히고 난리가 아니었다. 김현석이 제대로 못 하자 태화보다 한재영과 이우섭이 더 난리였다.

먼저 한재영이 김현석에게 말했다.

“야. 너 왜 그렇게 긴장해? 실제 촬영하는 것도 아닌데.”

“저도 그거 아는데……. 잘 안 되네요.”

이번에는 한재영 옆에 있던 이우섭이 한마디 했다.

“현석아. 너 슬레이트 칠 때도 극복했잖아.”

“근데 우섭이 형.”

“왜?”

“이게 슬레이트 치는 것과 달라요.”

“뭐가 달라?”

“그래도 이건 연기잖아요.”

태화는 현 상황을 판단했다.

[영감님. 상황으로 봐선 현석이를 여기서 빼는 게 맞겠죠?]

[그렇네.]

[하지만 전 그렇게 할 수 없네요. 이건 김현석의 사기 문제니까요.]

[맞네. 김현석은 여러 장점을 가진 사람일세. 저거 하나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네.]

태화가 김현석에게 다가왔다.

“현석아.”

“네. 형.”

“네가 지금 긴장하는 거 다 이해한다.”

김현석은 태화의 배려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형. 그냥 제가 안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렇게 하면 네 마음이 좀 편하냐?”

김현석은 태화의 물음에 즉각 대답하지 못했다.

“현석아. 연기하지 말고 그냥 시나리오 읽어도 된다.”

“그렇게 해도 돼요?”

“그렇게 해도 돼. 너는 연기자가 아니잖아.”

“…….”

“그런 걸 고려해서 한 거야.”

태화가 평상에 앉아 있는 최수빈을 불렀다.

“수빈아.”

“왜?”

“잠깐만.”

최수빈이 태화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

“네 상대해 주는 거 그냥 시나리오만 읽어도 상관없지?”

최수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크게 상관없어. 어차피 주목적이 동선을 맞춰보는 거니까.”

최수빈이 김현석을 향해 말했다.

“현석 씨.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요. 정말 시나리오 대사 읽기만 해도 돼요.”

태화가 최수빈의 대답을 들은 후 김현석에게 말했다.

“현석아.”

“네.”

“넌 많은 장점이 있는 녀석이야. 이거까지 잘해야 할 필요는 없어. 난 이미 너한테 만족하고 있거든.”

태화의 발언에 김현석은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이미 나한테 만족하고 있다고?’

순간 김현석은 전투력이 상승하는 걸 느꼈다. 그 증거로 김현석의 표정이 달라졌다.

김현석은 이전까지 주눅이 들었던 표정에서 결연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알겠어요.”

“오케이. 바로 그거야.”

태화는 카메라를 들기 위해서 평상으로 향했다. 태화의 뒤를 최수빈이 따라오며 말했다.

“제법이야.”

“뭐가?”

“자기 사람 다루는 거. 그거 정말 어려운 건데.”

“난 사실을 이야기했을 뿐이야. 현석이는 정말 장점이 많은 녀석이거든.”

최수빈이 태화의 말투를 흉내를 내며 말했다.

“난 이미 너한테 만족하고 있거든.”

태화가 최수빈의 흉내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만해라.”

“나 하나만 물어봐도 돼?”

“뭐가 또 궁금한데?”

“너 요즘 학원 다니냐?”

“뭐?”

“태화. 너 요즘 멋있는 말을 좀 하는 거 같아서.”

태화가 혀를 차며 말했다.

“어째 너는 수준이 재영이랑 똑같냐?”

“뭐? 내가 어딜 봐서…….”

“방금 네가 한 질문 재영이가 벌써 했다.”

“뭐?”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말고 연기에 집중해.”

이후 김현석이 대사를 치는 부분은 그럭저럭 넘어갔다. 물론 정말로 시나리오를 읽는 것에 불과했지만…….

#.

며칠 후.

최수빈은 요즘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태화가 강하게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특히 최수빈을 지치게 한 건 계속되는 반복이었다. 태화는 최수빈이 제대로 못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될 때까지 반복했는데 그게 사람을 미치게 했다.

-그거 아니야.

-다시 가자.

-한 번 더 가자.

-정말 이게 마지막이야.

하지만 태화의 말대로 정말 이게 마지막이 마지막은 아니었다. 최수빈이 제대로 해야 마지막이었다.

다른 영화처럼 커트를 끊어서 가는 영화라면 최수빈은 덜 지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커트가 롱 테이크이다 보니 최수빈은 더 지칠 수밖에 없었다.

최수빈도 태화가 강하게 밀어붙이는 것에 관해서 불만이 있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이제 며칠 후면 다시 촬영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때 여주 제안을 수락한 내가 바보지. 암. 그렇고말고. 이럴 줄 몰랐냐고!

최수빈은 이런 생각이 들다가도 막상 태화를 만나면 이런 생각이 다시 쏙 들어갔다. 현재까지 태화가 보여준 모습은 최수빈에게 신뢰를 주기에 충분했다. 태화가 지시하는 연출은 최수빈이 보기에도 기존의 영상 문법과는 달랐다. 특히 카메라가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며 인물을 따라가며 찍는데 최수빈이 그동안 해왔던 정적인 연기와는 차별성이 있었고 그 때문에 재미가 있었다.

최수빈은 옥탑 계단을 다 올라왔다.

“어. 뭐지? 아무도 없네.”

최수빈의 이런 반응은 당연했다. 그동안 최수빈이 옥탑에 오면 옥탑방에서 합숙하고 있던 멤버들이 최수빈을 반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옥탑에는 고요함만이 있었다.

최수빈은 의아함을 품고 옥탑방 문을 열었다.

“저 왔어요.”

최수빈은 인사를 했지만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태화만이 방에 누워서 잠을 자고 있을 뿐이었다.

“뭐야? 자는 거야?”

최수빈은 다시 평상으로 가려다 태화 주변이 어지럽혀진 걸 보았다.

‘저건 뭐지?’

최수빈은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왔다. 방바닥을 어지럽힌 건 태화가 직접 종이에 작성한 연기 동선이었다.

태화는 자필로 인물의 동선을 커트별로 작성하고 있었다. 종이에는 간단한 그림과 화살표, 그리고 글로 표현이 되어 있었다. 태화가 최수빈의 연기를 보고 나서 수정 작업을 한 결과물이었다.

최수빈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종이 한 장을 주었다. 그리고 최수빈은 종이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서 순간 빵 터졌다.

최수빈을 간단한 그림으로 표현했는데 그림 수준이 거의 초등학생 수준이었다. 특히 웃긴 건 최수빈의 표정이었는데 눈과 눈썹을 치켜뜬 것처럼 그려놓았다.

“진짜. 그림 수준 봐라.”

최수빈이 자는 태화를 한 번 쳐다본 후 나직이 말했다.

“내가 무슨 마녀냐?”

최수빈은 어지럽혀진 방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에휴. 정리 좀 하지.”

최수빈은 깔끔한 성격으로 뭔가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성격이다. 최수빈은 방 여기 널려 있던 종이를 손으로 집어서 정리했다. 그런 후 방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놔두었다.

최수빈은 종이를 정리하고 나서 다시 태화에게 다가갔다.

“지금 깨워. 말아?”

최수빈은 태화의 얼굴을 보자마자 깨울 생각을 잠시 잊어버렸다. 태화는 피곤한 상태로 잠을 자서 표정이 천진난만했다. 그런데도 태화의 얼굴에선 못생김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적당히 앞으로 나온 이마와 짙은 눈썹 오뚝한 콧날, 그리고 적당한 두께의 선홍색 입술. 그리고 날렵한 턱선.

“서태화. 너 잘생긴 건 인정.”

태화의 이목구비 중 최수빈의 눈길을 끈 건 의외로 태화의 긴 속눈썹이었다. 태화는 남자임에도 긴 속눈썹을 지니고 있었다. 잠을 자기 위해 눈을 감은 지금 그 긴 속눈썹이 더 길어 보였다.

“무슨 남자가 속눈썹이 나보다 길어? 할 수 있으면 내 것이랑 바꾸고 싶네.”

속눈썹이 무슨 대단한 거냐고 물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긴 속눈썹은 실제 조명을 쳤을 때 눈에 명암을 더해줘서 눈동자의 깊이감을 준다. 카메라에 찍히는 대상인 최수빈으로선 태화의 긴 속눈썹이 부러운 건 어쩌면 당연했다.

그때였다. 태화의 입에서 옅은 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아. 흠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