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97화
태화는 이선영의 손을 맞잡았다.
“태화 씨. 오늘 너무 즐거웠어요.”
“그러시다니 다행입니다. 그리고 오늘일 다른 사람에게 알려서는 안 됩니다.”
“그야 당연하죠.”
“그럼 은행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지금 제가 가서 현장 확인을 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좋아요. 직접 확인하는 게 가장 빠르죠. 태화 씨 연락이 오면 그다음 진행하도록 하죠.”
“고맙습니다.”
태화는 이선영을 다시 회사에 바래다주고 나서 동화 은행 서구 지점으로 향했다. 태화는 차를 근처에 주차 시키고 나서 은행 1층으로 들어갔다. 동화 은행 서구 지점은 이선영의 말대로 규모가 꽤 큰 편이었다.
태화는 1층을 본 후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영감님. 이 정도면 촬영하는 데 큰 문제가 없겠어요.]
[나도 동감일세.]
[바로 진행해도 되겠는데요?]
[그렇게 하게.]
태화는 바로 이선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선영은 통화연결음이 들리자마자 바로 받았다.
-태화 씨.
이선영의 목소리는 처음과 다르게 밝았다.
“네. 대표님. 저 동화 은행 서구지점에 와 있습니다. 촬영 장소로 좋은 것 같습니다. 진행 시켜도 될 거 같습니다.”
-알겠어요. 그럼 그렇게 하죠.
“대표님. 이렇게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당연히 도와줘야죠.
“네. 고맙습니다.”
태화는 전화를 끊자마자 한재영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지금 가장 속이 타들어 가는 사람이 바로 한재영이기 때문이다.
-태화야. 어떻게 됐어?
한재영은 전화를 받자마자 일의 경과를 물었다. 그만큼 한재영은 속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야. 넌 내 안부 먼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냐?”
-별일 없으니까 전화했겠지. 안 그래?
“그렇다. 일단 은행 섭외는 어떻게 될 거 같다.”
-정말이야?
“응. 단점은 지방 촬영이라는 건데.”
-야. 그게 무슨 말이야, 장소 섭외된 게 어디냐? 무조건 찍어야지. 야. 근데 어떻게 섭외한 거냐?
“그냥 아는 분 도움을 좀 받았어.”
-하여튼 조심해서 올라와라. 신난다고 운전 함부로 하지 말고.
“그래. 알았어.”
#.
태화는 동화 은행 서구지점을 섭외하는 과정에 관해서 최수빈에게 설명했다. 태화는 한재영에게 설명했던 것처럼 박도봉 감독에 관한 이야기는 빼고 이선영을 자신의 지인으로 설명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아는 분이 사업을 하고 그분의 도움을 받았다는 거야.”
“그렇지.”
“서태화. 대단한데? 자신의 지인을 동원할 줄도 알고.”
“필요하면 해야지. 안 그래?”
“그렇긴 하지.”
“그런데 그 은행 찍어온 거 있어?”
“왜 불안하냐?”
“어설프면 안 되잖아.”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누가 보면 네가 감독인 줄 알겠다.”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 영화 잘되어야 한다고?”
“맞아.”
“잠깐 기다려봐.”
태화는 동화 은행 서구지점을 헌팅 당시 촬영했던 영상을 최수빈에게 보여주었다. 최수빈은 영상을 보고서 감탄했다.
“와. 이 정도면 규모가 꽤 크네.”
“어차피 이 공간을 풀 사이즈로 잡을 일은 없으니까 이 정도면 촬영해도 괜찮을 거야.”
“오케이.”
“근데 배고프지 않냐? 지금 몇 시지?”
“오후 한 시 조금 넘었어.”
“일단 좀 먹고 하자.”
“나도 배고프긴 한데 간단하게 먹자. 시간을 아껴야 하니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돼.”
“아니. 그래야 내가 마음이 편해.”
최수빈은 나름 책임감을 느끼고 임하고 있었다. 태화도 최수빈의 의견에 반대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좋아. 그렇게 하자.”
태화와 최수빈은 근처 패스트 푸드점에서 햄버거로 간단하게 점심을 먹은 후 다시 리허설 영상 분석에 들어갔다. 최수빈은 좀 산만한 분위기였음에도 집중력을 가지고 리허설 영상을 끝까지 봤다. 리허설 영상 분석은 앞서 진행했던 것처럼 태화가 최수빈이 질문하는 걸 대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태화는 최수빈의 태도를 보고 살짝 놀랐다.
‘최수빈. 뒤끝이 없는 성격이네. 이런 성격이었나?’
솔직히 태화는 최수빈이 이런 성격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전엔 보기만 해도 으르렁대는 사이였으니까.
최수빈도 마찬가지였다. 태화의 진지한 모습은 최수빈에게도 꽤 신선하게 다가왔다.
최수빈의 머릿속에 태화의 모습은 대사도 제대도 못 치는 그래서 매일 오디션에 탈락하는 그런 어리바리 이미지였기 때문이었다.
‘서태화. 이제 제법 감독 같은데?’
리허설 분석은 어느새 마무리 단계로 가고 있었다. 리허설 영상이 끝나자 태화와 최수빈은 거의 동시에 기지개를 켰다.
“수빈아. 어때? 리허설 영상 본 소감이…….”
“확실히 영화의 분위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감이 오는 거 같아. 물론 동선을 익히는 데 좀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래서 말인데.”
“뭐 필요한 거 있어.”
“이 영상 나한테 메일로 보내줄 수 있어?”
“지금 상태는 용량이 커서 안 되고 용량 줄여서 보내 줄게.”
“오케이. 그럼 오늘은 퇴근해도 되는 거지?”
그때였다. 태화의 스마트폰으로 문자 메시지가 떴다. 태화가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고 나서 말했다.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뭔데 그래?”
“연락할 곳이 있어서 그래.”
태화는 옥탑방을 나섰다. 최수빈은 태화가 나가고 나서 홀로 옥탑방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10분 정도 시간이 지나자 최수빈은 엉덩이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얘는 무슨 통화를 이렇게 오래 하는 거야?”
또다시 몇 분이 흐르고 최수빈은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은 저녁 여섯 시를 지나고 있었다. 그런 후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에이. 몰라. 난 그냥 퇴근하련다.”
최수빈은 옥탑방을 나가기 위해 방문을 열었다. 최수빈은 방문 앞에 펼쳐진 장면에 깜짝 놀랐다.
“이거 뭐야?”
최수빈이 놀란 이유는 태화가 꽃바구니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수빈이 너 부르려고 했는데 그냥 나오네.”
“이게 뭐냐니까?”
“뭐긴 꽃이지. 파란 장미.”
“파란 장미?”
“그래. 다시 한번 우리 작품에 히로인이 된 걸 환영한다.”
태화가 파란 장미를 최수빈에게 건네며 말했다.
“파란 장미. 꽃말은 기적. 네가 우리 작품의 히로인이 된 게 기적이니까.”
실제 영화 현장에선 감독이 여주를 위해서 꽃다발 선물을 하기도 한다. 최수빈에게 꽃다발을 선물해 주자는 건 박도봉 감독의 아이디어였다.
-난 항상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주연을 맡은 여배우에게 꽃다발을 선물하곤 했네. 여배우는 감성적이라 아주 좋아하지. 자네도 최수빈에게 꽃다발을 선물해 보게.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아이디어를 큰 불만 없이 받아들였다. 태화에게 있어서 최수빈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태화는 다만 실용적인 면에서 꽃다발보다는 꽃바구니가 낫다고 판단했다. 꽃바구니는 집안에 장식용으로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파란 장미는 드라이한 상태에서도 꽤 멋졌기 때문에 태화는 꽃바구니를 선택했다.
“원래는 얘들하고 같이하려고 했는데 오늘따라 좀 늦네. 그래서 나 혼자 수빈이 너한테 주는 거야. 실망하기 없기다?”
“실망은 무슨 실망이냐?”
“그럼 다행이고. 그리고 한 가지 더.”
“뭐?”
“선혜영 님한테는 꽃 선물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이다.”
“그야 당연하지. 다쳐서 병원에 입원까지 했는데 얼마나 서운하겠냐?”
최수빈은 순간 꽃바구니를 든 채 감정이 복받쳐 올라왔다. 태화가 최수빈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수빈아. 지금 우는 거야?”
“그래. 운다.”
“…….”
“나 처음이란 말이야. 감독한테 꽃 선물 받는 거……. 다른 사람이 꽃 선물 받는 건 많이 봤어도.”
최수빈은 다른 여배우가 감독한테 꽃 선물 받는 걸 지켜보며 서러움을 많이 느꼈었다.
-나는 언제쯤 저런 대우를 받을 수 있을까?
그런데 오늘 감독인 태화가 최수빈에게 꽃 선물을 해주었다. 최수빈으로서는 감정이 복받쳐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태화가 최수빈을 향해 말했다.
“수빈아. 우리 영화 선택한 거 잘한 거 같지?”
최수빈이 손으로 자기의 눈가를 훔치며 말했다.
“몰라. 나, 갈 거야.”
“잠깐!”
“왜?”
“너 그 꽃바구니 들고 버스 타고 전철 타고 갈 거야?”
최수빈은 태화가 선물해 준 파란 장미를 쳐다보았다.
“사람들이 쳐다볼 텐데? 그게 좋으면 그냥 가든가.”
태화의 말에 최수빈은 순간 망설였다. 최수빈이 봐도 파란 장미는 튀어도 너무 튀었다.
최수빈이 가려고 한다면 택시를 타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최수빈도 한 푼이 아쉬운 처지다.
“태화. 그럼 네가 바래다주는 거야?”
“왜? 그냥 가지?”
최수빈은 태화에게 좀 뻔뻔해지기로 했다.
“꽃다발을 안겼으면 책임을 져야지. 안 그래?”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가 책임지라고 안 해도 오늘은 네 집까지 바래다주려고 했어.”
“어머. 정말?”
“그래. 하지만 오늘만이다. 오늘은…….”
“첫날이니까 인심 쓴다고?”
“그렇지.”
태화와 최수빈은 차를 타기 위해 옥탑을 내려갔다.
#.
태화는 최수진의 집 앞에 차를 세웠다. 최수빈이 차에서 내리기 전 태화를 향해 말했다.
“오늘 고맙다.”
“말로만?”
태화의 발언에 순간 최수빈은 살짝 당황했다.
“뭐?”
“뭘 그렇게 당황해.”
“내가 뭘 당황했다고 그러냐? 네 대답이 이상하니까 그랬지.”
“뭐가 이상한데?”
“고맙다고 했으면 그냥 알았다고 하면 되지.”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상한 거 상상하지 말고.”
“내가 무슨 이상한 거 상상했다고 그러냐?”
“수빈이 넌 고마우면 연기 열심히 해라. 그게 고마운 걸 갚는 방법이다.”
“그건 네가 말하지 않아도 당연히 할 일이야.”
“한 번 좌초할 위기가 있어서 그런지 다들 기대가 커.”
“아주 잘 알고 있어.”
“그래. 너라면 잘할 거야.”
“내가 잘할 건지 어쩔 건지 네가 어떻게 알아?”
“너도 욕심이 많잖아.”
최수빈은 태화의 말 중에 ‘너도’라는 단어에 집중했다.
“너도라니?”
“나도 욕심이 많거든. 우리 영화 비록 저예산 영화지만 난 이 영화로 뭔가 이루어낼 거야.”
“뭔가 이루어낸다?”
“그래. 수빈이 네가 생각한 것보다 우리 영화 준비가 잘 되어 있어. 참여하는 스태프들 실력도 나름 괜찮고.”
최수빈은 고개를 돌려 태화를 바라보았다. 태화의 옆 모습이 최수빈의 눈에 보였다.
단정한 이마와 날카로운 콧날 그리고 꽉 다문 입이 보였다. 태화의 옆모습은 마치 태화의 의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예전 같으면 태화의 이 말을 헛소리라고 했겠지만……. 이젠 이 말에 어느 정도 신뢰가 간다.’
태화가 고개를 최수빈에게 돌렸다. 순간 태화와 최수빈의 눈이 마주쳤다.
태화의 눈빛은 이 순간 뭐든 태울 듯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물론 이 눈빛은 최수빈을 향한 것이 아닌 영화에 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태화의 심경을 모르는 최수빈은 착각할 수밖에 없었다.
최수빈은 태화와 눈이 마주치자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왜? 내 말이 신뢰가 안 가?”
“아. 아니.”
“아마. 내일부터 빡셀 거야. 각오는 되어 있지?”
“으, 응, 그럼. 당, 당연히 준비되어 있지.”
“너 오늘 힘들었냐?”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