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96화
이선영은 태화가 외모를 무기로 자신을 꾀러 온 걸 하나의 가능성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태화는 이선영의 이런 생각을 한편으론 이해가 갔다. 태화와 이선영이 만난 건 장례식장 한 번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선영이 태화를 만난 건 빚지고 못사는 성격에 궁금해서였다. 이선영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입을 뗐다.
“먼저 제 핸드폰 번호 어떻게 아셨죠?”
“제가 앞으로 할 대답 믿으셔야 합니다.”
이선영이 태화의 대답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무슨 꿈속에서 누군가 알려줬다. 그런 건 아니겠죠?”
“당연히 대표님이 말한 그런 대답 아닙니다. 하지만 좀 비현실적이기도 하죠.”
“좋아요. 대답해 봐요. 하지만 그 대답이 장난스럽지는 않겠죠?”
“좋습니다. 대답하겠습니다.”
“좋아요. 말해봐요.”
이선영은 태화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태화는 이선영의 이런 행동이 이해가 갔다. 태화가 거짓을 말하는지 직관적으로 판단하기 위해서다.
[태화 군. 밝히게. 내 존재를…….]
[알겠습니다. 영감님.]
태화도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표님의 전화번호는 대표님을 아주 잘 아는 사람이 알려주었습니다.”
이선영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를 아주 잘 아는 사람?”
“네.”
태화의 이 대답은 이선영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존재는 이선영 자신을 잘 알면서 동시에 태화와도 아는 사이여야 한다. 게다가 이선영 자신에게 부탁하라고 말할 정도라면 태화와도 꽤 친밀한 관계여야 한다.
‘그런 사람이 누구지?’
이선영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태화 씨. 말 돌리지 말고…….”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대표님 핸드폰 번호를 알려준 사람.”
순간 이선영은 태화를 더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말해봐요.”
“대표님 연락처를 알려준 사람은 바로 박도봉 감독님이십니다.”
“뭐…… 뭐라고요?”
이선영은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태화 씨. 지금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말이 되지 않지만 사실입니다.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제 대답이 비현실적이라고.”
“아무리 비현실적이라고 해도 고인을 이런 식으로 모독하는 건 용서할 수가 없네요!”
순간 이선영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태화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만약 이선영이 이대로 방을 나간다면 돌이킬 수 없음을……. 이건 박도봉 감독도 알고 있었다.
[태화 군, 빨리 선영이를 잡게. 이대로 방을 나가게 해서는 안 되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태화는 이런저런 걸 잴 시간이 없었다. 태화는 재빠르게 행동했다.
태화는 이선영의 팔을 두 손으로 잡았다.
“잠깐만요. 대표님.”
이선영이 태화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그 표정이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이었다.
태화로선 굴욕이었다. 태화의 인생에서 여성의 팔을 붙잡고 애걸하는 모습은 없었다. 하지만 현재 태화의 머릿속엔 영화 제작이라는 것만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대표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영화를 완성할 수 있어.’
이선영은 태화가 잡은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태화 군.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그대로 선영이에게 전하게.]
[알겠습니다.]
태화가 이선영에게 말했다.
“잠깐만 대표님. 박도봉 감독님이 할 말이 있으시답니다.”
태화의 말을 들은 이선영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태화 씨. 이거 너무하는 거 아닌가? 지금 잡은 내 팔 안 놓으면 사람 부르겠어요.”
그때였다. 박도봉 감독이 이선영에게 할 말을 태화에게 전하기 시작했다.
[선영아. 미안하다.]
태화가 박도봉 감독이 자신에게 말하는 내용을 그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선영아. 아빠다.”
“…….”
“미안하다. 너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그렇게 떠나버려서.”
하지만 이선영의 반응은 아직 냉담했다.
“하다 하다 이제…….”
“내 장례식장에서 서럽게 울던 네 모습에 무척 가슴이 아팠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고마웠다. 그래도 내가 인생 헛살지 않았다고 느끼게 해줘서.”
하지만 이선영은 아직도 태화가 박도봉 감독을 대신해서 한 말을 믿지 않았다.
“아빠가 사고로 돌아가신 현장 그리고 장례식장. 이곳에 모두 태화 씨가 있었어. 얼마든지 이건 지어낼 수 있는 거 아냐?”
“저기 대표님.”
“…….”
“박도봉 감독님이 끝까지 들으랍니다.”
“…….”
“이제부터 대표님이 궁금해하는 걸 대답하신다고.”
“좋아요. 일단 들어는 보죠.”
태화가 다시 박도봉 감독이 말하는 걸 대신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태화 군에게 선영이 네 핸드폰 번호를 알려준 건 사실이다. 사실 내가 선영이 네 번호를 잊을 리가 없잖아.”
“…….”
“선영이 네 핸드폰 번호는……. 내가 선영이 너에게 언젠가 핸드폰을 선물했었지. 힘들면 언제든지 나한테 연락하라고. 그때 나랑 같이 대리점 가서 만들었던 번호였었지.”
태화가 말을 마치자 이선영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어떻게 그걸…….”
“알고 있냐고요?”
이선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저도 그 사실은 방금 알았습니다. 박도봉 감독님이 말해주셔서.”
확실히 이선영의 기세는 조금 전과 비교해서 많이 누그러진 상태였다. 태화는 방금까지 이선영이 밖으로 나가려는 걸 막기 위해서 팔에 힘을 주었는데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태화는 이선영을 잡고 있던 팔을 조심스럽게 놓았다.
“하.”
이선영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대표님 괜찮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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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영은 주저앉은 채 태화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선영은 아직 경계심을 푼 상태가 아니다.
“아니. 어떻게?”
“아직도 못 믿냐고 박도봉 감독님이 물으시는군요.”
“이게 말이 되냐고…….”
“제가 그래서 비현실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대표님이 혹시 믿지 못한다면 다른 걸 말하겠다고 하네요.”
“뭐요?”
“네. 대표님. 남편에 관해서 말씀하신다고 하시네요. 내가 선영이…….”
이선영은 태화가 말하려 하자 손사래를 치며 말렸다.
“아. 그만해요. 알았으니까.”
“…….”
“믿어요. 난 태화 씨가 한 말 믿는다고.”
이선영이 태화가 말하려 하는 걸 막았다. 그 이유는 이선영의 이혼한 남편 손명훈 때문이다.
이선영은 박도봉 감독에게 손명훈을 자신과 결혼할 남자라고 소개해 주었지만, 박도봉 감독은 이선영에게 반대 의사를 밝혔었다.
그 이유는 박도봉 감독이 손명훈에게 바람기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선영은 연애 경험도 부족하고 눈에 콩깍지가 쓰인 상태라 박도봉 감독의 말을 듣지 않았고 한동안 박도봉 감독과 이선영은 한때 사이가 소원해지기도 했었다.
태화가 이선영에게 말했다.
“대표님. 그럼 믿으시는 거죠?”
“믿는다니까. 그런데 지금 아빠는 어디에 있는 건가요? 혹시 태화 씨 등에 붙어 있는 건가요?”
“혹시 귀신을 말하는 겁니까?”
“네.”
“하하. 그건 아닙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그럼?”
“그게…….”
태화는 자신과 박도봉 감독 사이에 일어났던 일들에 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박도봉 감독이 태화의 머릿속에 들어온 일과 태화가 박도봉 감독의 뜻을 이어받아 영화감독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까지 말했다. 태화의 설명을 듣던 이선영은 놀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그러니까 태화 씨 머릿속에 아빠가 있다는 말이죠? 귀신 같은 게 아니라.”
“네. 저도 처음엔 믿을 수 없었는데……. 뭐. 현실이잖아요. 엄연히 나한테 일어난 현실. 그래서 받아들였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대단하군요. 그걸 현실로 받아들이다니.”
“뭐. 솔직히 영감님이…….”
“네? 영감님이요?”
“아. 제가 박도봉 감독님을 줄여서 그렇게 부릅니다. 영화감독님을 줄여서 영감님이라고,”
“재밌네요.”
“그럼 제가 앞으로 영감님이라고 말해도 되겠습니까? 저한테 입에 붙어서 이 호칭이 편하거든요.”
“뭐. 그렇게 하세요. 그런데 나한테 부탁할 게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네. 지금부터 그걸 말씀드리겠습니다. 실은 제가 영화 촬영 장소로 은행을 섭외해야 합니다.”
“은행이요?”
“네. 그런데 그 섭외가 쉽지 않았습니다. 고민하던 중에 영감님이 대표님을 찾아가 보라고 하셨습니다.”
태화는 이선영을 바라보았다. 이선영은 아직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태화의 설명이 이어졌다.
“영감님은 대표님이 운영하는 회사가 건실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주거래 은행에 나름대로 영향력이 있다고 하셨고요.”
이선영은 태화의 설명에 이제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태화 씨가 아빠의 뜻을 이어받아서 한다는데 내가 도와야죠.”
이선영의 대답에 태화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정말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영감님이 고맙다고 전해달랍니다.”
이선영은 태화를 아무 말 없이 쳐다보았다. 태화는 이선영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선영은 태화를 보고 있지만, 실제론 박도봉 감독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태화를 바라보던 이선영이 입을 열었다.
“기분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태화 씨에게서 아빠의 모습이 겹쳐요.”
“그런가요?”
“네. 아빠도 태화 씨처럼 눈빛이 맑았어요. 나이가 드셔도 마찬가지셨고요.”
“영감님은 영화에 관한 마음은 순수하셨으니까요.”
“맞아요. 아빠는 그랬어요. 영화를 대할 때만큼은 어린아이 같으셨으니까. 지금도 생각나요. 영화 촬영이 있을 때 얼마나 설레하셨는지.”
“그러셨군요. 그런데 하나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네. 물어봐요.”
“그 은행 지점. 규모는 어느 정도 됩니까?”
“작지는 않아요. 그래도 이 지역에서는 가장 큰 편에 속하니까.”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시겠습니까? 한번 가서 눈으로 확인을 해봐야 하니까요.”
“그렇게 해요. 동한 은행 서구지점이에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영감님이 물어보시는군요.”
“뭘 말인가요?”
“자신과 했던 약속 잊고 있는 건 아닌지.”
태화의 말에 이선영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연히 잘 기억하고 있어요.”
“…….”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새겨 놓은 거니까.”
태화는 이선영의 대답이 매우 인상 깊게 다가왔다. 도대체 어떤 약속이길래.
태화는 박도봉 감독과 이선영이 했던 약속이 무엇인지 더 궁금해졌다.
“그 약속이 뭡니까?”
“아빠가 마지막으로 영화가 흥행에 참패하고 어려워지셨어요. 그래서 내가 모시려고 했는데……. 아빠가 거부했어요.”
“거기까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때 아빠가 저에게 약속하나 해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 말을 지금 여기서 하면 안 될 것 같은데요?”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역시 부녀지간이시군요. 영감님도 저에게 지금 알 필요 없다고 하시네요. 나중에 시기가 되면 알게 될 거라고.”
“…….”
“그렇다면 저도 굳이 지금 알고 싶지 않습니다.”
이선영이 자기의 손을 태화에게 건넸다. 악수하자는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