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95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렇다고 지루한 느낌은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이선영 님 전화죠?”
-네. 맞는데요. 누구시죠?
이선영의 질문에 태화는 순간 막막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누군지 밝힌다면 이선영 님은 과연 어떤 반응을 할까? 과연 영감님 말처럼 나를 반길까? 아니면 나를 미친놈이라고 생각할까?’
하지만 이미 화살은 시위에서 떠난 상태였다. 이미 저지른 이상 결말을 봐야 했다.
‘어떻게든 영화는 완성해야 한다. 그럴 수만 있다면……. 이런 전화 수백 번도 더 할 수 있다.’
태화가 이선영의 질문에 답하기 시작했다.
“전 서태화라고 합니다.”
-서태화 씨요?
“네.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박도봉 감독님 장례식장에서 뵌 적이 있습니다.”
태화가 답변하고 나서 이선영은 기억을 더듬는 듯했다.
-음……. 아. 생각났다. 그 영화학도라는 분 맞죠?
“네. 절 기억하고 계셨네요.”
-아무래도 잊기 힘들죠. 그날 무열 오빠하고 싸울 뻔했잖아요.
“아. 네.”
-솔직히 저도 그날 이후 마음이 좀 안 좋았어요. 그래서 식사라도 같이해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연락처도 모르고…….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 식사 대접. 받을 수 있을까요?”
-뭐. 저야 좋죠.
이선영은 태화의 부탁에 고민 없이 바로 대답했다. 태화는 이렇게 된 이상 확실히 약속을 잡아야겠다고 판단했다.
“내일 괜찮을까요?”
-뭐. 저는 괜찮아요. 내일 점심 어때요?
“네. 괜찮습니다.”
-근데 여기 서울이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태화는 이선영 회사의 주소를 알고 있으면서도 짐짓 모른 척 말했다. 태화가 주소까지 알고 있다고 하면 이선영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주소 불러주시면 찾아가겠습니다.”
-제가 불러주는 것보다 회사 홈페이지 들어가는 게 나을 거예요. ‘도영 메디컬’로 검색해 보세요.
도영 메디컬은 박도봉 감독의 ‘도’와 이선영의 ‘영’을 따서 만든 회사 이름이었다.
“알겠습니다. 홈페이지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근데 제 연락처는 어떻게 아셨어요?
“그건 내일 만나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니 궁금하네요. 궁금해서라도 내일 태화 씨 만나야겠어요.
“이렇게 반갑게 전화를 받아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럼. 내일 뵙죠.
#.
태화는 도영 메디컬 정문에 도착했다. 정문에서 봤을 때 도영 메디컬은 2개의 건물이 있었는데 왼쪽에 보이는 건물이 물건 생산이 이루어지는 공장이고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일반 사무실로 쓰는 건물이었다.
태화의 차가 정문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입구에서 경비를 보는 직원이 차를 멈춰 세웠다.
“스톱!”
태화가 차를 세운 채 차 창문을 열었다.
“무슨 일로 오셨죠?”
“네. 이선영 대표님 뵈러 왔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서태화라고 합니다.”
“미리 연락하시고 방문하시는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경비 직원이 회사 내부 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여기 정문인데요. 서태화라는 분이 대표님을 찾아왔습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경비 직원이 통화를 마치고 태화에게 다가왔다.
“서태화 씨. 비서실에 방문 확인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세요. 오른쪽 건물입니다.”
“네. 고맙습니다. 수고하십시오.”
태화는 정문에서 확인 절차를 마치고 이선영이 있는 건물로 차를 몰았다. 태화가 건물 주차장으로 향할 즈음 건물 1층 출입문으로 이선영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선영은 네이비 컬러의 깔끔한 정장을 입었는데 언 듯 봐도 회사 대표의 기가 흘러나왔다.
[영감님. 저분이 맞죠?]
[맞네. 선영이가 맞아.]
[어떠세요?]
[오랜만에 보니 반갑구먼. 반가워.]
[목소리가 밝으시네요.]
[그렇게 들렸는가?]
[네. 장례식장에선 오래 못 봤지만, 오늘은 그래도 좀 볼 수 있겠네요.]
[그렇겠지.]
태화는 문득 박도봉 감독의 표정을 상상해 보았다. 아마도 박도봉 감독은 인자하면서도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을 터이다.
이선영의 옆에는 비서로 보이는 여성이 수행하고 있었다. 태화는 차를 살짝 돌려 임시로 차를 주차 시키고 나서 차에서 내렸다.
태화는 재빨리 차에서 내려 이선영을 불렀다.
“대표님!”
태화가 부르자 이선영은 소리가 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선영은 태화를 보자 미소를 지으며 태화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에 보지만 한눈에 알아보겠어요.”
“네?”
“훤칠해서 바로 알아보겠더라고요.”
태화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대표님 보자마자 알아봤습니다.”
“어머. 그래요?”
“혹시 제가 왔다는 연락받고 나오신 겁니까?”
이선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요. 나한텐 귀한 손님인데 내가 나와서 맞이해야죠.”
“오늘 불쑥 찾아온 것도 죄송한데 이렇게 맞아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뭐. 이런 걸로. 어쨌든 잘 왔어요.”
태화와 이선영이 인사를 나누는 사이 여비서인 우영인이 이선영에게 다가왔다.
“대표님. 차 준비시킬까요?”
이선영은 우영인에게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태화에게 물어봤다.
“태화 씨. 차 가져왔죠?”
“네. 그럼 제가 모실까요?”
“그럼 그렇게 해요.”
이선영은 우영인에게 지시했다.
“나는 태화 씨 차 타고 갈 테니까 장 기사님은 그냥 식사하시라고 해요.”
“알겠습니다.”
“우 비서도 식사하고.”
“네. 대표님.”
이선영은 우 비서를 보내고 태화의 차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태화가 이선영과 이동하면서 말했다.
“대표님이 제 차를 타신다고 하신 건 제가 불편할까 봐 그러신 거죠?”
“어머. 눈치챘어요? 가끔 제 차를 타고 가는 걸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있어서요.”
“…….”
“태화 씨는 젊은 사람이라 더 그럴 거고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자. 가요. 한정식집 예약했으니까.”
“네.”
#.
이선영은 태화의 바로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태화는 서먹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먼저 대화를 입을 열었다.
“대표님.”
“왜요?”
“대표님 되게 밝은 성격이신 것 같아요.”
“그렇게 보였나요?”
“네. 제가 어제 전화했을 때 목소리가 차분하셔서 실제 성격도 그럴 줄 알았거든요.”
“아.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구나. 태화 씨가 날 처음 본 게 장례식장에서였으니까. 게다가 내 전화 목소리도 차분했고.”
“네. 그렇습니다.”
“태화 씨. 나, 성격 밝아요.”
“아. 그러셨군요.”
“그런 거 있잖아요. 학교에서 친구들하고 밝게 잘 지내는 학생이 실제 가정 형편은 어려운 거.”
이선영이 박도봉 감독의 수양딸이 된 건 자신의 친부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네. 일부러 밝게 지내는 거잖아요.”
“내가 그런 경우였어요. 아빠가 힘들어도 밝게 지내라고 했어요. 그래야 살 수 있다고.”
“아빠라면 박도봉 감독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그 말 듣고 밖에서도 우울하게 보내면 안 될 것 같았어요. 그렇게 살았는데 그게 지금 내 성격이 된 거죠. 그리고 전화 목소리는 회사 대표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차분하게 말하는 거예요.”
“…….”
“대표가 목소리 상으로 가볍게 보이면 안 되는 거잖아요?”
“아. 그런 거였군요.”
“어제 태화 씨 번호도 모르는 번호였고.”
“전 대표님 밝은 모습이 보기 좋았어요.”
“그랬다면 다행이네요.”
“다 왔어요. 저기 사거리에서 좌회전하면 돼요.”
“네.”
이선영의 말대로 사거리에서 좌회전하고 나서 얼마 가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태화 씨. 여기예요.”
“네.”
이선영이 예약한 한정식집은 전통 한옥 건물에 꽤 고급스럽게 보였다.
태화는 바로 차를 주차장에 주차 시켰다.
“태화 씨. 운전하느라 수고 많았어요.”
“아닙니다. 식당이 참 분위기 있어 보입니다.”
“그렇죠?”
“네.”
태화와 이선영은 차에서 내려 한정식집으로 들어갔다.
#.
이선영이 한정식집으로 들어가자 개량 한복을 입은 식당 매니저가 웃으며 다가왔다. 식당 매니저는 40대 초반의 단아한 인상이다.
“이 대표님. 반가워요.”
“매니저님 잘 지내셨어요?”
“네. 예약한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한정식집은 여러 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구조로 되어 있다. 태화와 이선영은 매니저가 안내에 따라 걸어갔다.
매니저는 가장 끝에 있는 방 앞에 섰다.
“대표님. 이 방입니다.”
매니저가 말하고 나서 방문을 열었다. 방문을 열자 꽤 큰 방에 큰 상이 방바닥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밥상에는 음식이 어느 정도 세팅되어 있었다.
“대표님. 식사 맛있게 하세요.”
“네. 고맙습니다.”
매니저는 시선을 돌려 태화에게 말했다.
“손님도 식사 맛있게 하세요.”
“네. 고맙습니다.”
매니저는 안내를 끝내고 카운터로 돌아갔다.
“자. 태화 씨. 들어가죠.”
“네. 대표님.”
태화와 이선영은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갔다.
#.
이선영은 한정식을 특별 코스로 주문했는데 정말 산해진미가 모두 모인 듯했다. 이선영이 태화에게 말했다.
“태화 씨. 많이 먹어요.”
“네. 맛있게 먹겠습니다.”
태화의 대답에 이선영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태화 군. 오늘이 날이구먼.]
[그런 거 같습니다.]
[많이 먹겠나.]
[누가 들으면 영감님이 사는 줄 알겠습니다.]
[어쨌든 맛있게 먹게. 그게 식사를 대접하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예의니, 말일세.]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태화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정식을 제대로 먹어보는 듯했다. 윤기가 흐르는 밥과 씹을 때마다 느껴지는 음식의 식감과 다양한 맛.
태화는 음식을 먹는 거로 행복할 수 있다는 걸 느꼈다.
식사가 끝나자 이선영이 태화에게 말했다.
“식사 잘하셨어요?”
“네. 정신없이 먹었던 거 같습니다.”
“그랬다니 다행이군요.”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매니저가 차를 가지고 왔다. 매니저가 태화와 이선영의 잔에 차를 따라주고 난 후 다시 밖으로 나갔다.
이선영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입을 열었다.
“전 태화 씨한테 궁금한 게 많아요.”
“그러셨나요? 저도 대표님에게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태화의 말에 이선영이 정색하며 말했다.
“그 부탁이 뭔지도 아주 궁금해지는군요.”
“대표님이라면 제 부탁 어렵지 않게 들어주실 수 있습니다.”
“쉽고 어렵고는 일단 들어봐야 아는 거고.”
“…….”
“일단 내 궁금증 먼저 풀어줘야 할 거 같아요. 어제 태화 씨에게 전화 받고 나서 무슨 일일까? 의문이 들더군요. 솔직히 저와 태화 씨. 그냥 무시하고 살아도 되는 사람들이잖아요.”
“네. 그러셨을 겁니다. 저라도 그랬을 테니까요. 솔직히 제가 대표님에게 전화한 거……. 어찌 보면 뜬금없잖아요.”
“잘 아시네요. 분명 목적이 있어서 그랬겠죠.”
“맞습니다. 그게 제가 말할 부탁이고요.”
이선영이 순간 정색하며 말했다.
“혹시라도 태화 씨 그 잘난 외모로 날 어떻게 하려는 거면 포기해요. 남자 외모에 흔들릴 정도는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