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94화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애교 부리는 목소리가 그렇게 좋았냐? 밤에 잠을 못 잘 정도로?”
최수빈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좋아서 그랬겠냐? 짜증 나서 그랬지.”
“언제든지 말만 해.”
“뭘?”
“애교. 한 번이 어렵지. 해보니까 할 만하던데?”
“서태화 너 한 번만 더 애교 부린다고 하기만 해.”
“…….”
“여주고 뭐고 다 때려치울 거니까!”
최수빈은 태화에게 화를 내고 다시 옥탑방으로 들어갔다. 태화가 최수빈을 보고 소리쳤다.
“최수빈! 내 폰은 돌려줘야지.”
“몰라. 바닥에 둘 테니까 가져가든지 말든지.”
“부수지만 마라.”
태화는 최수빈의 행동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최수빈은 여전히 화가 난 말투였지만 태화는 이내 안심했다. 최악의 경우 최수빈이 주연을 못 하겠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태화 군. 첫날부터 위기의 연속일세.]
[그러게, 말입니다. 휴. 그래도 다행입니다.]
[뭐가 말인가?]
[수빈이가 심수영 역을 계속할 생각인가 봅니다.]
[최수빈으로선 당연한 판단이네. 이미 최수빈은 상업영화 캐스팅 제의를 거절했네. 그건 돌아갈 다리를 끊은 거나 다름없지.]
[저도 그런 생각을 했지만 사람 감정이라는 게 어떻게 튈지 모르잖아요.]
[자네 말이 맞네. 사람 감정이란 변화무쌍하고 때론 이성을 마비시킬 정도로 강력하지. 어쨌든 자네의 그 애교 때문에 일이 잘 풀렸구먼.]
[네. 저도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결과입니다. 그냥 내 인생의 흑역사일 거로만 생각했었는데요.]
[최수빈이 자네의 애교에 잠을 설친 걸 보니 자네 애교가 꽤 괜찮았던 모양이구먼.]
[지금 놀리시는 겁니까?]
[허허. 난 그냥 사실을 말했을 뿐일세.]
잠시 후 최수빈이 옥탑방 문을 열었다.
“서태화!”
“왜?”
“나 물어볼 거 있는데?”
“알았어.”
#.
태화는 컴퓨터 모니터가 있는 책상으로 갔다. 최수빈은 태화에게 물어볼 영상 부분을 일시 정지한 채로 있었다.
“물어볼 게 뭔데?”
“이 장면에서 말이야…….”
최수빈이 태화에게 질문을 한 장면은 심수영이 복권을 들고서 돈을 찾기 위해서 은행으로 찾아가는 장면이다.
“내가 알기로는 복권 당첨금 찾아가려면 본점으로 가야 할 텐데. 섭외는 된 거야?”
“수빈이 너 별걸 다 신경 쓴다?”
“내가 강조했지만…….”
“우리 영화 잘되어야 한다고?”
“그래. 맞아. 게다가 나도 투자자잖아? 이건 작품의 퀄리티에도 중요하다고.”
“그럼. 대답할게. 안타깝게도 본점은 섭외하지 않았어.”
최수빈은 태화의 대답에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섭외하지 못한 게 아니라 섭외하지 않았다고?”
“응. 본점에선 내부 촬영을 못 하게 해서. 지금 생각해 보면 오히려 난 잘되었다고 생각해.”
“잘되었다?”
“그래. 너도 알다시피 우리 영화 원 씬 원 커트잖아.”
“그렇지.”
“원래는 본점 외부 촬영이라도 하려고 했었어. 그땐 원 씬 원 커트 원칙이 정해지지 않았을 때니까. 그런데 내부 촬영을 못 하게 되면 이 원칙이 훼손되니까 섭외를 그냥 안 하게 된 거지.”
실제 영화 촬영할 때 공간의 안과 밖이 다른 경우가 간혹 발생한다. 건물의 외관은 예쁜데 실내 공간이 너무 좁거나 혹은 촬영 콘셉트와 맞지 않은 경우가 그런 예이다. 이 경우 미술팀이 붙어서 촬영 콘셉트에 맞게 공사를 해야 하는데 보통 이걸 허락하는 경우가 드물다. 이럴 땐 건물의 외관이 나오는 장면을 따로 촬영하고 실내는 세트를 만들어 촬영하거나 다른 장소를 섭외해서 촬영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도 커트를 끊어서 가는 촬영에선 가능하지만 원 씬 원 커트로 촬영한다면 이를 구현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태화도 아깝지만, 본점에서 촬영하는 걸 포기한 것이다.
“아마도 촬영할 땐 은행이 본점인지 아닌지 크게 티가 나지 않을 거야. 어차피 카메라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따라갈 테니까.”
태화의 말대로 은행이 본점인지 아닌지 보이려면 화면 사이즈를 풀 샷으로 가야 한다. 그래야 건물의 규모 같은 것이 화면으로 보이고 관객에게 전달이 된다. 하지만 인물을 중심으로 카메라가 따라가면 건물을 풀 샷으로 찍을 수가 없다.
“네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럼 다른 은행은 섭외가 된 거지?”
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섭외했지. 당연히 내부에서 촬영도 가능하고.”
“그래도 촬영 장소로 은행 섭외하는 건 쉽지 않을 텐데.”
“그렇긴 하지.”
최수빈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 서태화. 능력 있는데? 아니지. 재영이가 능력이 있는 건가?”
“은행 섭외는 내가 한 건데?”
최수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굳이 자기가 했다고 정보를 밝히네?”
“뭐. 내가 한 건 한 거니까.”
“와. 어쨌든 대단한데.”
최수빈은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속으론 태화를 다시 보고 있었다. 결국 누군가를 다시 보게 되는 건 남들이 봐도 어려운 일을 해냈을 때이다.
“어떻게 은행을 섭외한 거야?”
“뭐. 나의 노력과 정성이라고 봐야지.”
“은행 가서 점장한테 빌기라도 한 거야? 아님, 무릎이라도 꿇으셨나?”
“너한테 애교도 부렸는데 그 정도 못 하겠냐?”
최수빈이 발끈하며 말했다.
“아이 진짜! 너 애교라는 말 하지 말랬지?”
“이건 내가 하려고 해서 한 거 아니다. 네가 질문한 것에 답하느라 그런 거지.”
태화가 은행을 촬영 장소로 섭외할 때 점장에게 무릎을 꿇지도 애걸도 하지 않았다. 태화가 은행을 촬영 장소로 섭외할 때 박도봉 감독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
촬영 시작 몇 주 전.
태화와 한재영, 그리고 이우섭과 김현석은 스태프 회의를 했다. 이날 회의의 중심은 촬영 장소인 은행에 관한 것이었다.
한재영이 입을 열었다.
“오늘 본점에 가서 최종적으로 이야기를 해봤는데 내부 촬영은 불가라고 하네.”
한재영의 말에 태화를 비롯한 이우섭과 김현석의 얼굴엔 아쉬운 표정이 가득했다.
김현석이 발언했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기대했었는데.”
“나도 상업영화 경험하면서 느낀 건데 은행 내부 촬영 협조를 받는 건 정말 어려워.”
태화는 한재영이 그간 노력해 온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태화는 이러한 결과에 대해서 한재영을 탓할 생각이 없었다.
“재영아. 그동안 수고 많았다.”
“수고는 무슨. 결과가 이런데.”
“아냐. 어쩔 수 없었잖아. 솔직히 우리 제작비가 넉넉했으면 세트 촬영을 해도 되는 건데……. 일단 외부 촬영이라도 해야지. 본점은 일단 킵(keep) 해놓자.”
이우섭이 이어서 발언했다.
“본점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일단 은행 섭외는 해야 하잖아요.”
태화가 대답했다.
“그렇지. 해야지.”
“근데 본점이 아닌 은행이 쉬울까요? 저희는 제작비가 부족해서 결국 은행 내부에서 촬영할 수밖에 없는데.”
“우섭이 너 꽤 뼈 때리는 말했다?”
“그랬습니까? 저도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닌데.”
“자. 아직 시간 있으니까 좀 더 노력해 보자.”
이우섭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태화 형. 잘 될까요?”
“잘 되게 해야지. 어쨌든 난 우리 영화가 완성되게 할 거다. 그러니까 다들 걱정하지 마.”
태화는 이렇게 말했지만 속으로 불안감이 몰려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오늘 회의는 종료다.”
#.
늦은 시간.
태화는 홀로 옥탑 평상에 앉았다.
[태화 군. 고민이 되는가?]
[네. 은행은 영화에서 중요한 장소인데. 섭외가 되지 않으니.]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하네.]
[역시 영감님이십니다. 그게 뭡니까?]
[자네. 내 장례식장에서 봤던 상주 기억하나?]
[그분 성함이 이선영 님. 이었나요?]
[맞네. 자네 기억력이 꽤 괜찮구먼.]
[영감님이 수양딸로 삼았던 분 아닙니까?]
[그렇네. 선영이가 이번 일에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네.]
[어떻게요?]
[선영이가 그래도 어엿한 회사의 사장일세.]
[회사의 사장이요? 어떤 회사입니까?]
[혈당 체크기가 주 업종일세. 매출도 꽤 규모가 있고.]
[이선영 님이 건실한 중소기업 사장님이라는 말인데. 그런데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말입니까?]
[회사는 대부분 주거래 은행이 있게 마련이네. 당연히 은행에서도 매출 규모가 있는 회사는 주요한 고객일 수밖에 없네. 게다가 선영이의 회사는 지방에 있는 회사일세. 그만큼 메리트가 있는 거지.]
[영감님 전략이 이해가 갑니다. 그러니까 영감님 말은 이선영 님을 움직여서 은행을 섭외한다는 전략인가요?]
[그렇네.]
[영감님 전략은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이선영 님을 움직입니까? 딱 한 번 장례식장에서 봤을 뿐입니다.]
[자네 말처럼 자네가 선영이를 장례식장에서 딱 한 번 본 거라면 말이 안 되지.]
[그러니까요. 아마도 절 미친놈 취급할 겁니다.]
[그건 걱정하지 말게. 나에게 방법이 있으니.]
[방법이 있다고요?]
[선영이에게 존재를 밝히게.]
[존재를 밝혀요? 그럼 영감님의 존재를 이선영 님에게 밝히라는 말입니까?]
[그렇네.]
[그런데 영감님의 존재를 밝힌다고 믿어줄까요?]
[어쨌든 방법은 그것뿐이네. 현재로선 다른 방법이 없어. 내가 볼 땐 특별한 연줄이 없는 한 은행을 촬영 장소로 섭외하기 어렵다고 봐야 하네.]
#.
태화는 며칠 후 대전으로 향했다. 이선영의 회사가 대전에 있기 때문이었다.
태화는 한재영의 차를 빌려 손수 운전했다.
-재영아. 네 차 좀 쓰자.
-너 어디 가려고?
-지금은 묻지 말아줘. 갔다 와서 이야기할 테니까.
-그래. 알았어. 대신 운전 조심해야 한다?
-오케이.
태화가 이선영의 회사 위치를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박도봉 감독이 이선영 회사의 이름을 알고 있었고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그 주소를 쉽게 알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태화는 대전으로 출발하기 전날 이선영에게 전화를 걸어 보기로 했다. 다행히 이선영의 전화번호를 박도봉 감독이 기억하고 있었다.
[이선영 님이 제 전화를 받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뜬금없다고 하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선영이는 자네를 박대하지는 않을 걸세.]
[박대하지 않는다고요?]
[그렇네. 선영이는 작은 거라도 상대에게 호의를 받으면 갚으려고 하는 성격일세.]
[음. 그런가요?]
[특히 내 장례식 날 자네가 무열이와 싸울 뻔하지 않았는가?]
[그랬었죠.]
[아마도 그게 마음에 걸렸을 걸세. 어떻게 보면 자넨 내 장례식장에 온 손님인데……. 그것도 아주 귀한 손님.]
[그러고 보니 제가 그때 영감님 말 듣지 않고 제 고집대로 했던 게 맞았군요.]
[그렇네. 자네가 그래도 선영이에게 내 마지막 모습을 말해주었으니 그나마 선영이도 마음의 응어리가 크게 지지 않은 걸세. 그런데 자네가 무열이와 싸울 뻔하고 장례식장을 떠나 버렸으니…….]
[당연히 제게 마음의 빚이 있겠군요.]
[그렇네.]
[그럼. 당장 전화하죠.]
태화는 자기의 스마트폰을 꺼냈다. 박도봉 감독이 태화에게 이선영의 전화를 번호를 불러주었다.
통화 연결음이 몇 번 울리고 전화 받는 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