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93화 (171/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93화

최수빈은 태화가 밀어준 의자에 앉았다. 태화는 최수빈이 의자에 앉았다. 태화는 팔을 책상에 댄 채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한 가지 주의사항.”

“뭔 데?”

“네가 봐야 하는 부분. 기분이 안 좋을 수도 있어.”

“알아. 저 영상엔 내가 아니라 선혜영인가 하는 사람이 연기하고 있을 거잖아.”

“맞아. 괜찮지?”

“어쩌겠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잖아.”

태화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해해 줘서 고맙다.”

“나 이 정도면 성격 괜찮지?”

태화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너 정도면 아주 괜찮은 거지.”

“재영이가 내 성격에 대해서 말한 거 맞지? 아까 네가 나선 건 분위기 잡으려고 한 거고.”

“수빈이 네 말이 맞아. 하지만 나도 네 성격에 관해서 말했던 것도 사실이야.”

아마도 과거에 최수빈이었으면

-이것들이 진짜! 둘이 나 없는 데서 뒷담화나 까고!

이렇게 발끈했을 것이다. 하지만 최수빈의 반응은 그때와 정반대였다.

“그래. 알았어. 나도 더는 이걸로 시간 낭비하고 싶지는 않아.”

“고마워.”

“뭐. 고맙다고까지 할 필요 있나?”

“…….”

“솔직히 날 위해서야. 괜히 마음에 담고 있어 봐야 나한테 득 될 게 없으니까. 촬영 시작되면 계속 볼 텐데……. 좀 불편하잖아.”

“잘 생각했다.”

태화는 순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영감님 말처럼 되었네요.]

[그렇군. 하지만 나도 이렇게 빨리 그 시기가 올 줄은 몰랐네. 최수빈이 의외로 쿨한 면이 있구먼.]

태화는 컴퓨터에서 전체 리허설 장면을 촬영했던 영상을 찾았다.

“전체 촬영했던 걸 편집했으니까 아마 실제 상영 시간하고 비슷할 거야.”

“오케이.”

“영상을 볼 때 두 가지 정도에 주안점을 두고 봐야 해.”

“두 가지?”

“응. 일단 전체 흐름과 분위기를 파악하는 거야.”

“오케이.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당연히 심수영이 나오는 장면이겠지.”

“맞아. 아마도 네가 해석한 부분하고 차이가 있을 수도 있어.”

“아무래도 그렇겠지.”

“중요한 건 저 영상에 있는 대로 굳이 따라 할 필요는 없다는 거야. 네 이미지와 스타일이 있는 거니까.”

“알았어.”

최수빈은 대답하고 나서 태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자 태화가 한마디 툭 던지듯 말했다.

“넌 왜 눈에서 레이저를 쏘고 그러냐?”

“신기해서.”

“뭐가 신기한데?”

“네가 내가 알고 있는 서태화가 맞나 싶어서.”

“맞으니까 그렇게 쳐다볼 필요 없어.”

“사람은 잘 안 변한다는데…….”

“너. 언제부터 나한테 그렇게 관심이 많았었냐?”

“음…….”

최수빈이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대답했다.

“어제부터?”

“뭐?”

“네가 감독이잖아. 주연 배우로서 당연한 거 아냐?”

“…….”

“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런 거지?”

“정말 궁금하냐?”

최수빈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태화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응.”

태화는 최수빈에게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영감님. 그냥 넘어가긴 글렀군요.]

[뭐. 못할 것도 없지 않은가?]

[그렇긴 하죠.]

[자네가 변하게 된 건…….]

[결국 성공에 대한 욕망 때문이죠.]

[그렇네. 내가 도와준다고 하더라도 결국 자네의 욕망이 자네를 변하게 한 거네.]

태화가 입을 뗐다.

“좋아. 대답할게.”

“…….”

“그냥 이제는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배우가 되고자 했던 내 미래는 암울했으니까.”

“그래서?”

“그게 다야.”

“뭐? 그게 말이 돼?”

“왜 말이 안 되냐?”

태화는 박도봉 감독 이야기는 뺐지만, 최수빈에게 거짓으로 대답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게 사실이었으니까.

“너도 지금 이 자리에 있잖아. 예전의 너 같으면 네가 내 제안을 받았겠냐?”

“당연히 안 받았겠지.”

“너도 배우로서 성공하고 싶으니까 내 제안을 받아들인 거잖아.”

“뭐. 그렇긴 하지. 그러니까 성공하겠다는 의지가 널 변화시킨 거다?”

“그래. 목표가 생기니까 나도 변한 거야. 그 목표를 이루어야 하니까.”

“근데 왜 감독이야?”

“뜬금없이 낯선 분야를 선택할 순 없잖아.”

최수빈은 태화의 대답을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내 대답은 여기까지.”

“오케이.”

“혹시 보다가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물어보고.”

“응. 알았어.”

“그럼. 시작한다.”

태화는 전체 리허설 영상을 클릭하자 모니터 화면에 영상 플레이어가 나타났다. 태화가 플레이 버튼을 클릭해서 전체 리허설 영상을 재생시켰다.

#.

최수빈이 차분하게 전체 리허설을 보기 시작했다. 최수빈이 영상을 보면서 태화에게 궁금한 점을 물어보면 태화가 대답해 주는 방식이었다.

최수빈이 주로 물어본 건 아무래도 자신이 맡은 배역인 심수영 부분이었다. 전체 리허설은 한 공간에서 이루어진 까닭에 최수빈은 연기의 느낌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 태화는 자신의 태블릿으로 실제 촬영이 이루어질 장소를 사진 자료로 보여주었다. 태화는 사진 자료에 펜으로 실제 움직일 동선을 화살표로 그려가며 최수빈에게 설명해 주었다. 가끔 사진 이미지로 잘 설명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었는데 공간이 이어지는 곳이 그랬다. 가령 골목에서 건물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건물에서 골목으로 나가는 공간들이 그랬다.

이렇게 이어지는 공간들도 커트를 나누지 않고 촬영이 이어지기 때문에 연기자로선 공간을 확실히 이해하고 연기를 펼쳐야 한다.

이 경우엔 단순히 사진만 봐서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최수빈이 태화에게 물었다.

“혹시 동영상으로 촬영해 놓은 건 없어?”

“당연히 있지.”

“오. 정말?”

“잠깐 기다려 봐.”

태화는 대답하고 나서 컴퓨터에 있는 헌팅 폴더를 클릭했다. 그러자 헌팅한 장소별로 동영상으로 촬영한 영상이 있었다.

태화가 그중 최수빈이 물어봤던 영상을 클릭했다. 그러자 입체적으로 이어진 공간이 커트 없이 촬영된 영상이 플레이되었다. 태화는 영상을 보면서 최수빈에게 설명을 곁들였다.

“음. 확실히 사진으로만 볼 때와 느낌이 다른데? 확실히 이해돼.”

“그렇지? 동선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감이 오지?”

그때였다. 태화 스마트폰의 벨 소리가 울렸다. 태화는 바닥에 놓았던 스마트폰을 집어서 발신자를 확인했다.

바로 송윤주였다. 태화는 최수빈 앞에서 송윤주의 전화를 받을 수가 없었다.

“나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 리허설 영상 보고 있어.”

“알았어.”

#.

태화는 옥탑방을 나와 송윤주의 전화를 받았다.

“네. 누나.”

-그래. 태화야. 어떻게 됐니? 연락이 없어서 궁금해서 전화했어.

태화는 송윤주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최수빈 캐스팅에 관해서 가장 궁금해할 사람이 다름 아닌 송윤주였다.

“누나. 미안해요. 제가 먼저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그러니까 어떻게 됐는데? 된 거야? 응?

“수빈이. 우리 작품 한대요.”

-정말? 그럼 캐스팅된 거네.

“네. 누나. 지금 재영이 옥탑방에 와 있어요.”

-아. 그래? 정말 잘됐다. 근데 이 기집애는 캐스팅됐으면 연락을 해야지.

“아마 그럴 시간이 없었을 거예요. 촬영 재개 며칠 안 남았잖아요.”

-그럼. 지금 옥탑방에서 뭐 해?

“지난번 촬영해놨던 리허설 영상 보고 있어요. 수빈이가 롱 테이크 경험이 없다고 해서요.”

-그런데 너랑 수빈이 서로 으르렁대는 건 아니고?

“아뇨. 그렇지 않아요. 잘 지내고 있어요.”

-당연히 그래야지. 학교 동기를 떠나서 네가 감독인데.

“근데 누나. 촬영 시작되면 수빈이랑 같이 촬영장에 올 건가요?”

-아. 수빈이 픽업하는 거 때문에 그러니?

“네.”

-그건 걱정하지 마. 수빈이는 내가 픽업할게.

“근데 수빈이가 이따가 누나한테 연락할 거 같아요.”

-무슨 말인지 알아. 어제 너하고 계획 짠 거 비밀로 하라 이거지?

“네. 그게 좋겠어요. 아무래도 수빈이가 알면 좋을 것 같지 않아서요.”

-알았어. 그건 걱정하지 마.

“알았어요. 그만 끊을게요.”

태화는 전화를 끊고서 입가에 미소가 절로 감돌았다. 활짝 웃고 있을 송윤주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태화는 등 뒤에서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

“근데 내가 알면 좋을 것 같지 않은 건 뭐니?”

태화는 최수빈의 목소리가 들리자 화들짝 놀랐다.

“뭐?”

“태화. 너 왜 이렇게 놀라? 방금 누구랑 통화한 거야?”

“수빈이 너 왜 여기 있어? 리허설 영상 보고 있어야지.”

“너 왜 내가 묻는 말에 대답 안 하고 말을 돌려? 너 좀 수상한데?”

태화가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수상할 거 없는데?”

최수빈은 재빨리 태화가 손에 쥐고 있는 스마트폰 뺏으려고 달려들었다. 최수빈이 꽤 날렵하게 움직였고 태화는 미처 대처하지 못했다.

태화는 자신의 스마트폰을 최수빈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그 폰 잠금 상태야.”

“오. 그래?”

최수빈은 재빨리 스마트폰을 태화의 얼굴에 갖다 대었다. 그러자 태화 스마트폰의 잠금 상태가 풀리고 말았다.

“이런 젠장.”

태화는 최수빈에게 빼앗긴 자기의 폰을 되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최수빈이 통화 기록 목록을 본 상태였다.

“윤주 언니하고 통화했네?”

“야. 그거 사생활 침해다?”

“윤주 언니하고 통화했고 내가 알면 좋지 않을 거.”

“그게 뭐?”

“둘이 어제 짰지?”

“그거 오버 아니냐?”

태화는 발뺌했지만, 최수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어쩐지 이상했어. 윤주 언니가 내 전화를 그렇게 받지 않는 경우가 없었는데. 태화 너 어제 윤주 언니한테 내 전화 받지 말라고 한 거지?”

“그게…….”

“말해봐. 뭐야?”

이렇게 된 이상 태화도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사실대로 말할게.”

태화는 송윤주와 짰던 계획에 관해서 최수빈에게 털어놓았다. 태화의 말을 들은 최수빈은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정말 너무 하는 거 아냐? 아이. 진짜!”

순간 최수빈은 여주고 뭐고 다 때려치우겠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그녀는 이 말을 쉽게 내뱉을 수 없었다. 최수빈은 이미 다른 작품의 캐스팅 제안을 거절한 상태이기 때문이었다.

최수빈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당장 참을 수밖에 없었다.

“수빈아. 솔직히 어쩔 수 없었어.”

“뭐?”

“어제 그렇게 안 했으면 네가 날 만나주지도 않았을 거 아냐?”

“뭐? 그걸 핑계라고…….”

“핑계가 아니야. 너 어제 나 보자마자 그냥 집으로 들어가 버렸잖아. 그런데 네가 우리 상황을 알았다면…….”

“알았으면 뭐?”

“애교로 끝났겠냐?”

최수빈은 순간 태화의 입에서 애교라는 말이 나오자 발끈했다.

“야. 애교라는 말 꺼내지도 마. 내가 너 애교부리는 목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잤다고!”

“뭐? 잠을 못 자?”

“헉.”

최수빈은 자신이 흥분한 나머지 말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계속 수세에 몰리던 태화는 분위기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고 판단했다.

“수빈아. 그게 무슨 소리야?”

최수빈이 자기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말했다.

“아아. 몰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