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92화
최수빈에 태화에게 말했다.
“전에 오디션 봤을 때 내가 만약 합격하면 윤주 언니가 자기하고 같이 이동하자고 했었어.”
“근데 윤주 누나하고는 연락했어?”
“아직. 이따가 해봐야지.”
그때였다. 최수빈의 스마트폰으로 전화가 왔다. 최수빈은 번호를 확인하더니 태화의 눈치를 봤다.
“왜?”
“며칠 전 오디션 봤던 곳이야.”
태화는 차를 이면도로에 세우며 말했다.
“받아 봐.”
최수빈은 통화 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최수빈 님 핸드폰이죠?
“네.”
-최수빈 님. 저 한동우 조감독입니다. 기억하세요?
“네. 조감독님.”
-이번에 오디션 결과가 나왔는데 최수빈 님. 합격하셨어요. 축하드립니다.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했던가? 태화가 최수빈을 만나러 가는 날이 하루만 늦었어도 최수빈의 캐스팅은 어려워질 수 있었다. 태화는 순간 가슴을 쓸어내렸다.
“저 근데 조감독님.”
-왜 그러시죠?
“제가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 그 작품에 참여 못 할 거 같습니다.”
-아……. 그런가요? 혹시 그 이유를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이유요?”
-네. 감독님이 물어보시면 대답해야 할 거 같아서요.
최수빈은 대답하기 전 태화를 바라보았다. 태화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다른 작품을 하게 됐습니다. 조감독님. 죄송하게 됐습니다.”
-아닙니다. 어쩔 수 없죠. 다른 작품에서 잘하시기를 바랍니다.
“네. 고맙습니다.”
최수빈은 통화를 마치고 태화를 향해 말했다.
“들었지?”
“응. 아주 똑똑히 잘 들었다.”
“나 이 작품 무조건 잘돼야 한다.”
“그건 걱정하지 마. 난 수빈이 너보다 몇 배는 더 우리 영화가 잘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자신 있어?”
“이건 자신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야.”
“그럼?”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문제야.”
“뭐?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래. 그러니까 잘될 거야.”
태화의 발언은 자신이 있다는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최수빈은 예전 같으면 태화의 이 말을 신뢰하지 않았을 게 뻔했다.
-입만 살아서…….
최수빈은 분명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방금 태화가 했던 이 말은 최수빈에게 묵직하게 들렸다.
‘태화 네가 어제 나한테 보여줬던 영화에 대한 집념이라면…….’
태화가 다시 자동차의 시동을 걸었다.
“늦었다. 빨리 가야겠다.”
“그래. 사람들 기다리겠다.”
#.
태화와 최수빈은 한재영의 옥탑방이 있는 집 앞에 도착했다. 태화는 차를 근처에 주차 시키고 차의 시동을 껐다.
“수빈아. 다 왔다. 내려.”
“응.”
태화와 최수빈은 차에서 내려 옥탑으로 향했다. 태화와 최수빈이 옥탑으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올라갔다. 태화가 앞장서고 최수빈이 그 뒤를 따라갔다. 계단을 올라가던 최수빈이 태화에게 말했다.
“이 계단에서 사고가 났다는 거지?”
“네가 지금 밟고 있는 그 위치일 거야.”
최수빈이 잠깐 발걸음을 멈췄다.
“이거 기분이 좀 묘하다.”
“왜? 찜찜하냐?”
“그렇지 뭐.”
“그래서 일단 계단 촬영은 제일 나중에 찍는 거로 하려고…….”
최수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또 사고 날까 봐?”
“안전하게 가야지. 안 그래?”
“…….”
“이번에 촬영 스케줄 다시 검토할 거야. 그래서 좀 위험한 건 다 뒤로 돌릴 거야. 너도 그렇게 알고 있어.”
“나야. 뭐 스케줄 나오면 그에 따라야지.”
“가자. 얘들 기다리겠다.”
“응.”
태화와 최수빈은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
태화와 최수빈이 계단을 다 오르자 넓게 트인 옥탑의 전경이 보였다. 이 모습을 본 최수빈이 한마디 툭 던졌다.
“이거 생각보다 괜찮네.”
“내가 그랬잖아. 생각보다 괜찮을 거라고.”
최수빈이 전경을 보며 웃으며 말했다.
“시야도 탁 트이고 좋네.”
그때였다. 옥탑방 문을 열고 한재영이 나왔다.
“이거 너무 늦게 온 거 아냐?”
태화는 본래 계획했던 시간보다 20분 정도 늦었다. 태화가 한재영에게 말했다.
“길이 좀 막히더라. 근데 정리 좀 끝났나?”
한재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아주 말끔하게 정리했지.”
“어디 보자.”
태화가 옥탑방으로 가 문밖에서 내부를 살펴보았다. 한재영의 말처럼 말끔하게 정리가 된 모습이었다. 방 이곳저곳에 어지럽게 놓여 있었던 각종 자료가 정리 정돈된 상태였고 옷가지들도 행거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야. 이거 완전히 다른 곳인데?”
“태화야. 그건 좀 오버 아니냐?”
최수빈이 옥탑방 안의 모습을 보고 발언했다.
“이 정도면 생각보다 깔끔하네.”
한재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수빈이 넌 뭘 상상한 거냐?”
“굳이 상상까지 할 필요 있니?”
한재영이 최수빈의 얼굴을 보며 발언했다.
“근데 너 얼굴이 왜 그렇게 퀭하냐?”
“잠을 좀 못 잤어.”
“왜? 설레서 그랬냐?”
최수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야. 설렐 게 뭐가 있냐?”
“이유야 많지.”
“뭔 이유?”
“너 장편영화 첫 주연인데. 설렐 만도 하지.”
“그런 거 아니다.”
“그럼. 뭐 악몽이라도 꿨냐?”
최수빈은 순간 움찔했다.
“뭐? 악몽?”
한재영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왜? 태화가 애교 부리는 모습이 꿈에 나오디?”
간혹 장난스럽게 하는 대화 중에 진실이 오갈 때가 있다. 방금 한재영이 그랬다.
최수빈은 한재영의 말처럼 태화의 애교 부리는 모습이 꿈속에 나온 건 아니지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야. 너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이상한 소리? 너 왜 이렇게 오버야?”
“뭐?”
“그냥 아니면 아닌 거지. 안 그래?”
“…….”
“너. 좀 수상해.”
“한재영. 너 말 그냥 막 던지는 건 예나 지금이나…….”
“뭐? 말을 막 던져? 이거 말이 좀 심한 거 아니냐?”
한재영과 최수빈의 대화를 듣던 태화가 끼어들었다.
“야. 그만해라. 우리 같이 일하기로 하고 처음 만난 날이다.”
한재영과 최수빈은 말없이 태화의 말을 들었다.
“좀 조심하자. 이 시간 이후로는 서로 자극하는 말은 좀 삼가자. 재영아?”
한재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았다.”
태화가 이번에는 최수빈을 보며 말했다.
“수빈아. 너도.”
“알았어. 내가 좀 예민했던 거 같아.”
“그만 싸우고 이제 일을 하자. 그런데 재영아.”
“왜?”
“우섭이하고 현석이는 어디 갔어?”
“커피 사 온다고 나갔어.”
“잘했다. 아무래도 커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는 게 낫지.”
#.
잠시 후 이우섭과 김현석이 커피를 사서 옥탑에 도착했다. 이우섭과 김현석은 최수빈의 얼굴을 보자마자 활짝 웃었다. 이우섭이 먼저 최수빈에게 인사를 건넸다.
“최수빈 님. 반가워요. 혹시 저 기억하세요?”
“아. 네. 저번 오디션장에서 봤었던 거 같아요. 그날 촬영하지 않았었나요?”
“네. 기억하시네요.”
이우섭이 커피를 최수빈에게 건넸다.
“그냥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통일해서 사 왔습니다. 괜찮으시죠?”
최수빈이 이우섭에게 커피를 건네받으며 대답했다.
“네. 괜찮아요.”
이우섭이 최수빈과 인사를 마치자 김현석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최수빈 님. 저는 기억하세요?”
“기억나요. 그때 대기실에서 진행하셨죠.”
“네. 기억하시네요. 최수빈 님 고맙습니다.”
“네?”
“최수빈 님이 우리 영화 살린 겁니다.”
“그렇게 봐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성격이 좋으신 거 같습니다.”
순간 한재영이 김현석을 보며 손사래를 쳤다. 더는 말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네? 그게 무슨?”
“아닙니다. 제가 잘못 말한 거 같습니다.”
최수빈은 김현석이 한재영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걸 시선을 한재영에 돌렸다.
“재영이. 너지?”
“뭐가?”
“내 성격에 대해서 말한 거.”
“아니. 그게…….”
태화는 최수빈과 한재영이 다시 티격태격하자 본인이 나섰다. 태화는 무엇보다 산만한 분위기를 다잡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수빈아. 내가 말했어.”
그러자 최수빈이 당황하며 말했다.
“뭐? 태화 네가?”
“그래. 내가 말했었다고. 전에 캐스팅하는 과정에서 이것저것 이야기하다가 내가 말한 거야.”
“…….”
“너도 알잖아. 캐스팅 과정에서 이런저런 이야기 오가는 거.”
실제 캐스팅 과정에선 태화의 말처럼 단순히 연기력과 이미지만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 연기자가 캐스팅되고 나서 원만하게 촬영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도 함께 고려한다. 그래서 캐스팅 단계에선 연기자의 성격도 고려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위해서 그 연기자와 일해본 적이 있는 사람과 접촉해서 알아보기도 한다.
최수빈이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태화에게 물었다.
“진짜야?”
“그래. 감독인 나로선 이것저것 고려해야 하니까. 네가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하마.”
최수빈은 여전히 한재영이 의심스러웠지만 더는 추궁하기 어려웠다.
‘태화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이걸로 더 말해봐야 소용없겠지.’
최수빈은 태화의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굳이 사과까지 할 필요는 없어.”
“알았다.”
태화는 확실히 분위기를 다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자. 다들 주목.”
태화의 말에 옥탑에 있던 사람들이 태화에게 집중했다.
“지금 보니까 다들 들떠 있는 거 같다.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차분하게 해야 한다. 현석아.”
“네. 형.”
“네가 기쁘고 좋은 건 알겠지만 마음을 차분하게 다스려라. 알겠니?”
“네. 알겠습니다.”
“우섭이도 너무 들떠있지 말고.”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태화가 이번엔 한재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제영아.”
“그래. 무슨 말 하려는지 알겠다. 조심할게.”
마지막으로 태화가 최수빈에게 말했다.
“수빈아.”
“알았어. 나도 너무 예민하게 굴지 않을게.”
“다들 여기까지 오는 데 고생 많았다. 하지만 앞으로 할 일이 더 많아.”
“…….”
“들뜬 기분은 나중에 촬영 끝나고 풀기로 하고 차분하게 집중하자.”
태화의 말에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당연히 옳은 말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가를 생각하면 들뜬 기분에 젖어 있을 수가 없었다.
[태화 군. 자네가 한재영과 최수빈의 말싸움에 개입한 건 아주 적절했네.]
[하지만 한 가지 염려는 남는군요. 수빈이가 제 말을 완전히 믿는 눈치는 아니었어요.]
[그건 너무 걱정하지 말게. 아마 최수빈도 이 일을 너무 걸고넘어지지는 않을 걸세. 결국 자신한테도 손해니까.]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꼭 그렇게 될 걸세.]
#.
태화와 최수빈은 옥탑방에 있는 책상 컴퓨터 모니터 앞에 서 있었다. 한재영과 이우섭, 그리고 김현석은 밖에 나가 있는 상태다. 태화는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뭐 하는 거야?”
“너한테 보여줄 게 있어서.”
“나한테 보여줄 거?”
“응. 저번에 전체 리허설 찍었던 영상이 있거든.”
“전체 리허설?”
“그때 원 씬 원 커트로 촬영하는 거에 대해서 한철이 형이 반대 의견을 냈었거든. 그래서 테스트 겸 찍어놓은 거야. 촬영 끝나고 한철이 형은 내 의견에 따르기로 했고.”
“…….”
“이 영상을 보면 네가 동선을 잡는데, 도움이 될 거야.”
태화는 의자를 최수빈에게 살짝 밀어주었다.
“영상이 좀 기니까 앉아서 봐.”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