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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91화 (91/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91화

태화와 한재영이 옥탑과 연결된 계단에 오르기 시작했다. 태화가 다시 한번 한재영에게 주의를 주었다.

“너. 얘들한테 내가 수빈이한테 애교 부렸다고 말하면 안 된다.”

“그건 걱정하지 마라. 하지만…….”

“하지만 뭐?”

“내 입은 막을 수 있지만 수빈이는 모르겠다.”

“수빈이한테는 내가 따로 말할 테니까. 너만 입조심 해.”

“오케이.”

태화와 한재영.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계단 끝에 도착했다. 그러자 이우섭과 김현석이 평상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태화와 한재영을 발견한 건 김현석이었다. 김현석이 두 사람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서며 소리쳤다.

“태화 형! 재영이 형!”

김현석의 두 사람을 부르자 이우섭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진짜네.”

이우섭과 김현석은 하얀 이가 드러나도록 활짝 웃으며 태화와 한재영에게 다가왔다.

태화가 이우섭과 김현석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좀 늦었다. 저녁은 먹었고?”

태화의 질문에 김현석이 대답했다.

“네. 계속 입맛이 없다가 재영이 형한테 연락받고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형들은 먹었어요?”

“응. 우리는 먹고 왔어.”

“와. 정말 믿기지 않아요. 여주가 캐스팅되었다니. 근데 최수빈 님은 흔쾌히 하겠다고 하던가요?”

태화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뭐. 쉽지 않았지.”

“근데. 어떻게 한 거예요? 최수빈 님 성격이 보통은 아니라고 하던데.”

“누가 그래? 수빈이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고.”

“재영이 형이.”

태화가 한재영에게 눈길을 주자 한재영이 살짝 고개를 돌려 그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나야. 얘들이 궁금해하니까. 궁금증을 해소하게 해주자는 의미에서 말한 거지.”

태화는 대략 상황이 어땠을지 상상이 되었다. 이우섭과 김현석은 불안한 마음에 한재영에게 이것저것 물어봤을 게 뻔했다.

“성격이 보통이 아니니까 여주 제안을 수락한 거야.”

김현석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네? 그게 무슨…….”

“수빈이는 저번에 한 번 까였었잖아.”

“그랬죠.”

“수빈이는 욕심이 많아. 당연히 여주를 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고.”

“아. 그렇군요. 보통 한 번 까였으면 솔직히 한다고 하기 어렵죠.”

김현석은 더는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태화의 대답이 나름 합리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우섭이 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형들. 근데 맥주 한 캔씩 하시겠습니까?”

태화와 한재영이 거의 동시에 되물었다.

“맥주가 있었어?”

태화와 한재영은 말을 하고 나서 멋쩍었는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본 이우섭과 김현석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음이 잦아들자 이우섭이 말했다.

“아까 편의점에서 좀 사 온 게 있습니다.”

한재영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주는?”

“마른안주 있습니다.”

“이 녀석들. 감각 있는데?”

태화와 한재영, 그리고 이우섭이 대화하는 사이 김현석이 옥탑방으로 들어가 맥주와 안줏거리를 가지고 나왔다. 한 사람에게 맥주 한 캔이 돌아가자 태화가 입을 뗐다.

“자, 다들 수고 많았다. 여기까지 오는 데 너희가 없었으면 오지 못했을 거야.”

뒤이어 한재영이 발언했다.

“태화야. 네가 건배사 해라.”

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그래야지.”

태화가 자신이 손에 든 캔맥주를 높이 들었다. 그러자 한재영과 이우섭 그리고 김현석도 태화처럼 캔맥주를 높이 들었다. 이어서 태화의 건배사가 이어졌다.

“힘들게 다시 얻은 기회, 놓치지 말자. 이제 다시 뛰는 거다.”

“…….”

“자! 앞으로 달려보자!”

태화를 뺀 나머지 세 사람도 뒤이어 외쳤다.

“달려보자!”

#.

모두가 잠든 시간. 태화는 홀로 옥탑방을 나와 평상에 앉았다.

[태화 군. 잠이 오지 않는가?]

[좀 그러네요.]

[기분이 어떤가? 다시 살아난 느낌 말일세.]

[당연히 좋죠.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그게 뭔가?]

[저하고 수빈이하고의 관계 말입니다. 어느 순간 앙금이 풀린 듯한 느낌입니다.]

[난 자네의 애교가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을 푸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보네만.]

[지금 저 놀리시는 겁니까? 여기서 애교 이야기를 꺼내시다뇨?]

[허허허. 흥분하지 말게나. 사람 사이의 감정 문제라는 게 솔직히 정답이 있는 게 아니네. 어떤 경우는 평생 가도 앙금이 풀리지 않지만 어떤 경우는 오늘처럼 한 번에 풀리기도 하지. 그런데 그 차이가 뭔지 아는가?]

[뭡니까?]

[자존심 때문이네.]

[자존심이요?]

[그렇네. 자존심이란 참 오묘한 녀석이네. 사람은 자존심 때문에 사람답게 살아가게 되지만 또 자존심 때문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기도 하지. 자네가 오늘 결정적으로 잘한 건 자존심을 부리지 않아야 할 타이밍에 그렇게 한 것이네. 자네가 자존심을 부리지 않으니 최수빈도 쌓였던 감정이 풀릴 수밖에 없었던 거지.]

[영감님 말을 들으니 자존심이라는 녀석. 정말 오묘한 녀석이군요.]

[그렇네. 특히 감독인 자네한텐 이 자존심이 아주 중요하네.]

[뭐. 작품을 만들려면 당연하지만……. 영감님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겠죠?]

[역시 자네는 눈치가 빨라. 내가 감독은 뭘 잘해야 한다고 했는가?]

[정무적 판단 아닙니까?]

[결국 정무적 판단의 바탕은 결국 사람일세. 그리고 사람에게 이 자존심이라는 녀석은 아주 중요하네.]

[그 말은 사람들의 자존심을 이용해야 한단 말입니까?]

[이용한다는 단어를 쓰니 어감이 좀 그렇군. 자존심은 그 사람의 본질과 연결되어있네.]

[본질과 연결이 되어 있다?]

[그렇네. 최수빈을 예로 들겠네. 최수빈은 자신이 당한 만큼 돌려주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네.]

[수빈이가 좀 그렇죠.]

[최수빈은 자존심을 버리고 오디션에 지원했었어. 하지만 자네의 선택을 받지 못했었지.]

[그래서 수빈이는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겠죠.]

[맞네. 최수빈은 자네가 쉽게 할 수 없는 애교를 부리라고 하면서 자신의 상처받은 자존심을 회복한 거네. 즉 자존심을 이용하라고 해서 꼭 나쁜 방향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는 걸세.]

[음.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어요.]

[때로는 자네가 자존심을 버리고 행동해야 할 때가 오기도 한다는 말일세.]

[이번 경우처럼 말이죠?]

[그렇네. 중요한 건 주변 상황이 자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하는 거네.]

[그게 정무적 판단의 핵심이죠.]

[그렇네.]

#.

다음 날 아침.

옥탑방의 하루는 다른 날보다 일찍 시작되었다. 태화와 한재영, 그리고 이우섭 김현석은 7시에 기상했다.

이들이 일찍 기상한 건 최수빈이 옥탑방으로 오기 때문이다. 태화는 가장 먼저 일어나서 씻고서 옷을 챙겨 입었다. 태화가 아침부터 서두르는 건 최수빈을 픽업하러 가기 위해서였다.

한재영이 태화에게 자동차 열쇠를 건넸다.

“운전 조심해라. 둘이 싸우다 사고 내지 말고.”

그때였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김현석이 소리치듯 말했다.

“안 돼요!”

태화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김현석에게 말했다.

“현석아. 왜 그래?”

“이제 사고라면 지긋지긋합니다.”

태화는 김현석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고로 이미 영화가 엎어질 뻔했고 간신히 살아난 상황이었다.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운전 중에는 꼭 참으셔야 합니다.”

“그래. 그렇게 하마.”

#,

얼마 후 태화는 최수빈의 집 앞에 도착했다. 최수빈은 아직 밖으로 나오지 않은 상태다.

태화는 차에서 내려 출입문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왜 아직도 안 나왔지? 혹시 자나?’

태화는 최수빈에게 전화하기 위해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이거 첫날부터 늦잠 자고. 이거 안 되겠는데.’

태화가 최수빈에게 전화를 걸려는 순간 계단을 급하게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태화는 최수빈에게 전화하는 걸 잠시 보류하고 출입문 안쪽을 바라보았다.

태화의 눈에 최수빈의 모습이 보였다. 최수빈은 살짝 루즈한 청바지에 체크무늬 남방을 입었는데 깔끔한 느낌에 잘 어울렸다. 최수빈은 출입문 밖으로 나오자마자 태화에게 사과했다.

“어. 미안.”

“야. 넌 첫날부터…….”

태화는 말을 하려다가 멈췄다. 그 이유는 최수빈의 얼굴 상태 때문이었다.

“너. 얼굴이 왜 그렇게 퀭하냐?”

“몰라. 잠을 좀 못 자서 그래.”

“잠을 못 자? 왜?”

최수빈은 잠을 설친 게 태화의 환청 때문이라는 걸 말하고 싶지 않았다.

“뭐. 그냥. 잠이 안 와서.”

태화가 장난치듯 최수빈에게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태화는요…….”

“서태화! 하지 말라고!”

“야. 넌 무슨 화를 그렇게 내고 그러냐? 아침부터.”

“미안해.”

순간 태화는 뭔가 낌새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수빈. 너 뭔가 있지?”

“없어. 그냥 잠을 못 자서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그래.”

태화는 최수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최수빈은 태화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살짝 옆으로 돌렸다.

“아무튼 하지 마. 진짜야.”

“언제는 하라고 난리더니.”

“하지 말라면 하지 마.”

태화는 최수빈의 태도가 이상했지만 더는 최수빈에게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첫날부터 괜히 힘 뺄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차에 타라. 늦었다.”

“응.”

태화와 최수빈은 차에 올라탔다. 태화가 운전석에, 그리고 최수빈이 보조석에 앉았다.

“수빈아. 의외다.”

“뭐가?”

“난 네가 그 자리가 아니라 뒷자리에 앉을 줄 알았지.”

“그럼. 뒤로 갈까?”

“아니. 그래서 고맙다 이거지.”

“그런데 재영이는 같이 안 왔어?”

태화는 순간 억눌렀던 의심이 스멀스멀 다시 올라오기 시작했다.

“하. 이상하네. 네가 재영이 안부를 다 묻고.”

최수빈은 속으로 아차 싶었다. 최수빈은 태화의 관심사를 돌리려고 한 발언이었는데 그게 오히려 화근이 되고 말았다. 최수빈이 얼버무리듯 말했다.

“아니. 뭐. 프로듀서니까. 물어본 거지. 당연한 거 아냐?”

“그렇지. 당연하긴 하지.”

태화가 의심 어린 눈초리로 최수빈을 바라보았다.

“이거 뭔가 있는데.”

“있기는 뭐가 있냐고?”

“네가 말하고 싶어 하는 거 같지 않아서 더는 안 물어볼게.”

“정말 없다니까.”

“알았어. 재영이하고 얘들은 너 온다고 지금쯤 바쁠 거야.”

“왜?”

“지금 청소하고 있거든.”

“평소에 좀 하고 살지.”

“솔직히 그동안 시간이 없어서 청소 제대로 못 했거든. 이번 기회에 하는 거지.”

#.

태화와 최수빈이 탄 차는 한재영의 옥탑방이 있는 근처 전철역을 지나고 있었다.

“수빈아. 저 역에서 내려서 3번 출구로 나오면 마을버스 정류장 있어. 거기서 마을버스 타면 돼. 그러면 옥탑방 근처까지 와.”

“알았어.”

태화는 최수빈에게 대중교통 편을 알려주고 있었다. 태화가 최수빈의 집으로 픽업하러 가는 건 오늘만이기 때문이다. 태화를 비롯한 스태프는 일주일 후 재개될 촬영을 준비해야 했다. 태화가 최수빈에게 상황을 설명했고 최수빈도 거기에 수긍했다.

“그런데 촬영 시작되면 그땐 어떻게 올 거야? 윤주 누나하고 같이 올 거야?”

“아마도 그렇게 하지 않을까.”

“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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