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90화
태화와 한재영은 거의 동시에 차에서 내렸다. 태화가 최수빈 혼자 계약서를 읽게 한 건 나름 배려하는 차원이었다. 계약서를 읽는 데 상대가 있으면 아무래도 불편해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태화와 한재영은 함께 동네를 걷기 시작했다. 한재영이 걸어가며 태화에게 말했다.
“고맙다.”
“뭘. 새삼스럽게.”
“그리고 미안하다.”
태화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한재영을 바라보았다. 한재영의 표정은 제법 진지했다.
“미안해? 네가 왜?”
“태화 네가 수빈이한테 애교 부리는 거 보고, 나 솔직히 울었다.”
“뭐? 울어?”
“그냥. 눈물이 나오더라고.”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가 그렇게 눈물이 날 정도로 내가 못 했냐?”
“아니. 네가 애쓰는 모습 보니까……. 나도 모르게 나오더라고.”
태화는 한재영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한재영은 항상 밝고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성격이지만 그 내면의 감수성은 누구보다 예민하다는 걸.
태화가 보기에 한재영은 충분히 울고도 남을 녀석이었다. 태화가 한재영의 어깨에 자기의 손을 살포시 얹었다.
“짜식. 착해 빠져서. 앞으로 험난한 프로듀서 어떻게 해나가려고.”
한재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가?”
“그래. 인마. 조금만 독해져 봐.”
“수빈이처럼?”
“걘 좀 많이 독하지 않냐?”
한재영이 살짝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하긴. 그렇긴 하지. 근데 넌 괜찮냐?”
“뭐가?”
“수빈이한테 애교 부리면서 자존심 상하거나 그러지 않았느냐고?”
“솔직히 나도 처음엔 막막하더라.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데?”
“다른 방법이 없더라고. 게다가 수빈이도 나한테 일부러 애교 부리라고 한 건데.”
“나도 그런 생각이 들긴 하더라. 그동안 네가 수빈이한테 딱딱하게 굴긴 했잖아. 보복 심리 같은 건가?”
“이유야 어떻든 어쩌겠어. 일단 해달라면 해줘야지.”
“참 너도 대단하다.”
“뭐가?”
“예전 같았으면 못 하겠다고 펄쩍 뛰었을 거 아냐?”
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마도 그랬겠지. 게다가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수빈인데.”
“그러니까.”
“근데 목표가 있으니 그냥 하게 되더라고.”
“그 목표는 당연히 수빈이 캐스팅이고.”
“맞아. 내가 자존심 부린다고 캐스팅되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수빈이는 다른 곳 오디션도 봤잖아. 급한 건 우린데 별수가 없겠더라고.”
태화는 별거 아닌 듯 말했지만, 한재영은 잘 알고 있었다. 자존심을 꺾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때였다. 태화의 스마트폰의 벨 소리가 울렸다. 태화가 스마트폰 화면을 확인했다.
바로 최수빈이었다.
발신자를 확인한 한재영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수빈이가 너한테 전화를 다 거냬.”
“당연히 그래야지. 앞으로 같이 작품 하게 될 텐데.”
“그래도 이렇게 빨리 연락할 줄은 몰랐는걸.”
태화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래. 수빈아.”
-지금 어디야?
“내가 살던 동네가 아니라서 어딘지는 잘 모르겠고…….”
-됐고. 빨리 와. 나 계약서 다 읽었어. 사인해야지.
“오케이. 가능한 한 빨리 갈게.”
태화는 통화를 끊었다. 한재영이 궁금한 표정으로 태화에게 물었다.
“계약서 다 읽었대?”
“응. 가자.”
#.
태화와 한재영은 동네를 한 바퀴 돌고서 다시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태화와 한재영은 도착하자마자 최수빈과 계약서를 체결했다.
최수빈은 계약서의 내용에 관해서 별도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한재영의 말대로 표준 계약서의 내용과 일치했고 N 분의 일 조항도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계약서 체결은 차 안에서 이루어졌다. 계약서는 두 부를 체결해서 한 부는 최수빈에게 주었고 다른 한 부는 한재영이 보관하기로 했다.
모든 계약을 마치고 태화가 최수빈에게 손을 내밀었다.
“환영한다. 수빈아. 앞으로 잘해보자.”
최수빈이 웃으며 태화가 내민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나도 잘 부탁한다.”
태화와 최수빈은 맞잡았던 손을 놓았다.
“수빈아.”
“왜?”
“앞으로 일정이 좀 빡빡해.”
“아. 맞다. 일주일 정도라고 했지.”
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나마 다행인 건 수빈이 네가 시나리오의 내용에 관해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야.”
“그렇긴 하지. 그때 오디션 열심히 준비했었거든.”
“그런데 수빈이 네가 모르는 게 있어?”
“모르는 거? 그게 뭔데?”
“이번 영화 촬영. 원 씬 원 커트야.”
최수빈은 태화의 말에 깜짝 놀라며 말했다.
“뭐? 원 씬 원 커트? 그럼 롱 테이크 아냐?”
“그렇지.”
“나 그렇게 촬영해 본 적 없는데.”
이건 최수빈으로선 충분히 발언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영화의 편집 기술이 정교해지면서 원 씬 원 커트보다는 짧게 커트를 끊어서 촬영하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은 기간 거기에 대비해서 준비해야 해. 너라면 충분히 잘해 내리라 믿는다.”
“태화. 너 일부러 지금 이야기한 거지? 내가 계약 안 한다고 할까 봐.”
태화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건 아냐. 솔직히 그럴 정신이 없었다. 넌 아예 날 만나주려고 하지 않지. 게다가 수빈이 네가 애교 부리라고 하는 판에 잔머리 굴릴 여유도 없었어.”
“…….”
“그리고 난 수빈이 네가 이 정도로 계약을 안 하겠다고 하지는 않을 거로 생각한다. 수빈이 너 이 정도로 여주가 될 기회를 포기할 사람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
“그래서 말인데.”
“뭐?”
“내일부터 사무실로 나와.”
“사무실?”
“그래. 동선 맞춰봐야지.”
원 씬 원 커트로 이루어지는 촬영은 동선을 철저하게 계산하고 움직여야 한다. 최수빈은 태화의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어딨는데 사무실.”
최수빈의 질문에 한재영이 대답했다.
“내가 사는 옥탑방.”
최수빈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 네 옥탑방?”
“수빈아. 네가 그렇게 얼굴을 찌푸릴 정도로 나쁘지 않아. 지금도 사무실로 잘 쓰고 있고.”
한재영에 이어 태화가 발언했다.
“재영이 말이 맞아. 옥탑이라 공간이 넓어서 연기 연습하는 데도 나쁘지 않아. 시끄럽다고 뭐라고 할 사람도 없고.”
최수빈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 벌써 계약 물리고 싶다.”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내일부터 나와. 알겠지?”
최수빈은 별다른 이의 없이 태화의 요구를 수용했다. 이건 태화가 앞서 말한 것처럼 최수빈은 자신이 여주를 하는 게 중요했기 때문이다.
“어쩌겠냐? 촬영 준비하려면 해야지.”
“그래. 난 수빈이 네가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다.”
“그럼. 몇 시까지 나가야 해?”
“아침 9시까지 와. 아무래도 준비해야 할 게 많으니까.”
“그래. 알았어.”
최수빈은 대답하고 나서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시간이 11시를 넘고 있었다.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나, 가서 자야겠다.”
“그래. 오늘 나 때문에 고생했다.”
“그걸 아니 다행이다.”
“들어가서 푹 쉬고 내일 보자.”
“오케이. 내일 보자.”
최수빈은 차에서 내려 자신이 자취하고 있는 원룸으로 향했다. 한재영이 입을 뗐다.
“태화야. 수빈이 고분고분하던데?”
“뭐?”
“난 네가 옥탑방에 나오라고 했을 때 수빈이가 한번 난리 피울 줄 알았거든? 그런데 별말 없이 다 받더라.”
“그만큼 수빈이도 여주를 하고 싶었던 거지. 그리고 계약한 이상 책임감도 느꼈을 거고.”
“어쨌든 다행이다. 잘 마무리돼서. 그런데 우섭이하고 현석이에게 연락해 줘야겠지?”
“그러는 게 좋겠다. 지금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텐데.”
“오케이.”
한재영은 자기의 스마트폰을 꺼내 이우섭에게 전화했다. 통화연결음이 울리자마자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렸다.
-재영이 형. 어떻게 됐어요?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이우섭의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잔뜩 묻어 있었다. 태화와 한재영은 이우섭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우섭아. 현석이는?”
-지금 제 옆에 있어요. 근데 어떻게 됐어요? 최수빈 님. 여주 한대요?
“야, 진정해. 숨넘어가겠다.”
-지금 숨 안 넘어가게 생겼어요? 오늘 저하고 현석이 미치는 줄 알았다고요. 일이 손에 잘 잡히지도 않고…….
한재영은 순간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래. 너네 두 사람 앞으로 더 미쳐야겠다.”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혹시 안 된 거예요?
“하. 그게 말이지.”
-재영이 형. 왜 그래요?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이우섭의 목소리는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이우섭의 목소리를 들은 태화가 나직이 한재영에 말했다.
“야. 장난 그만해라. 정말 얘들 울겠다.”
“알았어.”
한재영이 이우섭에게 말했다.
“내가 더 미쳐야겠다고 말한 이유는.”
-네.
“앞으로 일을 더 미쳐서 하자는 말이었어.”
-일을 더 미쳐서 하라고요? 재영이 형. 그럼?
“그래. 수빈이 캐스팅됐다. 방금 계약서에 사인했어.”
-형. 정말이에요?
“그래. 내가 너희한테 거짓말해서 뭐 하겠니?”
-이야호!
전화기 너머로 이우섭과 김현석의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환호하는 소리가 잦아들고 이우섭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정말 잘됐어요. 이제 다시 촬영 들어가는 거죠?
“그래. 이제 다시 달려보자.”
-네. 형.
“그럼. 이만 끊자.”
-네.
한재영은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동안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건 태화도 마찬가지였다.
“태화야. 저렇게 좋을까?”
“그야 당연한 거 아니냐?”
“그런데 윤주 누나한테는 언제 알려줄 거야?”
“오늘은 시간이 늦었잖아. 내일 알려주지 뭐.”
“자. 그럼. 우리도 퇴근하자.”
“응.”
#.
최수빈은 잠자리에 들기 위해 침대 위에 누웠다. 최수빈은 몸은 피곤했지만 잠은 잘 오지 않았다.
여주인공이라는 타이틀이 이제 최수빈 자신의 품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수빈이 잠을 잘 이루지 못한 건 이거 하나 때문만은 아니었다.
태화가 최수빈 자신에게 애교를 부렸던 장면이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다. 최수빈이 똑바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자 마치 극장 스크린처럼 태화가 애교를 부렸던 모습이 보였다.
-태화는요.
-음……. 수빈이가 우리 영화의 여주를 맡았으면 좋겠어요.”
최수빈은 태화가 애교를 부리던 모습을 떠올리며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서태화. 제법 귀여웠어. 물론 애교는 형편없었지만.’
돌이켜보면 오늘 하루, 아니, 몇 시간은 정말 드라마틱한 시간이었다. 여느 때 같으면 이 시간을 천천히 음미하겠지만 최수빈은 자야만 했다.
‘이제 자자. 피부 관리를 위해서도.’
최수빈은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여러 생각들을 억제하고 잠을 자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조금씩 잠이 들려는 순간!
-태화는요.
최수빈은 태화가 애교 부리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최수빈은 머리를 흔들며 태화의 목소리를 떨쳐내려 애썼다. 최수빈은 자기의 귀를 손으로 막기도 하고 머리를 헤드뱅잉 하듯 돌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태화가 애교 부리던 그 목소리가 최수빈의 귀에 더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태화는요.
-태화는요.
-태화는요.
최수빈은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다시 자기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으아아! 짜증 나. 미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