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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89화 (89/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89화

최수빈이 태화의 애교 시전에 무표정이었던 건 태화의 애교가 형편없어서가 아니었다. 태화의 태도가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태화가 양 볼에 바람을 넣고 손가락으로 턱을 받치며 비음에 혀 짧은 소리를 내며 우스꽝스러운 애교를 전개하고 있었지만, 최수빈은 그걸 건성으로 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최수빈이 애초에 보려고 했던 건 태화가 애교를 잘 부리느냐가 아니었다. 태화가 최수빈의 요구에 얼마나 진지하게 임하느냐였다. 최수빈이 앞서 태화에게 애교를 잘 부려야 한다고 했던 건 일종의 페인트였다.

최수빈이 보기에 태화가 애교를 부리는 건 연기가 아니었다. 만약 태화가 연기한 거라면 최수빈은 연기자로서 금방 알아차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최수빈은 태화의 모습에서 연기라는 걸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만약 이걸 태화가 연기한 거라면 대단한 일이지만….’

태화의 연기력이 형편없다는 건 최수빈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결국 집념이야. 영화를 완성하겠다는 그 집념.’

최수빈은 태화의 이런 모습을 전에 한 번 봤었다.

바로 오디션장에서였다. 오디션장에서 봤던 태화는 묵직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최수빈은 자신에게 애교를 부리고 있는 태화에게서 그걸 느꼈다. 우스꽝스러운 모습 뒤에 감춰진 영화에 관한 집념.

한편 태화는 최수빈의 반응이 없자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보통 애교라는 게 그냥 귀여운 표정을 짓고 말투를 아이처럼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여기에 약간의 스킨십이 들어가야 한다. 태화는 이것에 관한 전략도 세워놓았다.

‘이왕 하는 거. 끝까지 간다.’

태화는 자기의 양손으로 최수빈의 왼팔을 잡았다. 그러자 최수빈도 반응이 왔다.

최수빈이 아무 말 없이 의아한 표정으로 태화를 바라보았다. 태화는 최수빈의 왼팔을 잡은 상태에서 자신의 볼을 최수빈의 왼팔에 갖다 대며 말했다. 당연히 비음과 혀 짧은 소리를 섞어서 발성했다.

“수빈아. 우리 영화 같이하자.”

태화는 발언하고 나서 자신의 볼을 최수빈의 팔에 비비며 다시 말했다.

“수빈아.”

태화는 최수빈의 반응이 없자 다시 최수빈의 이름을 불렀다.

“수빈아. 수빈아.”

그러자 지금까지 반응이 없었던 최수빈이 나직이 말했다.

“그만해라.”

하지만 태화는 애교에 집중한 나머지 최수빈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수빈아.”

최수빈은 태화가 자기의 말을 듣지 않고 다시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짜증 나는 말투로 말했다.

“야. 그만하라고!”

#.

최수빈이 짜증이 나는 말투로 말하자 태화가 정색하며 말했다. 인제 애교 말투가 아니라 정상적인 말투다.

“왜 그러냐?”

“뭐가?”

“너 버틸 수 있다며?”

“솔직히 너 레퍼토리도 다 떨어졌잖아. 팔에 볼 비비고 나면 할 것도 없었잖아. 안 그래?”

“아닌데?”

“뭐가 더 있었다고?”

최수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웃기시네. 내가 너 도와준 거야.”

“수빈이 너 말 한번 잘했다. 도와주는 김에 아까 약속한 거 지켜야지.”

“약속?”

“그래. 계약서 사인해야지.”

“지금? 여기서?”

“여기 올 때 계약서 가지고 왔어. 모든 게 다 세팅이 되어 있다 이거지.”

태화는 오늘 이곳에서 확실히 마침표를 찍고 싶었다. 특히 최수빈이 상업영화 오디션을 봤기 때문에 더 그랬다.

최수빈은 이미 태화의 제안을 속으로 수락한 상태였다. 최수빈은 태화가 애교를 부리는 모습에서 태화의 진지함을 봤고 집념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최수빈은 태화가 자신에게 애교 부리는 모습을 보면서 감정적으로 후련함을 느꼈다. 최수빈에게 수락의 이유는 그걸로 충분했다. 하지만 최수빈은 태화의 제안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유는 따로 없었다.

그냥 태화의 제안에 바로 응하면 자신이 너무 쉬워 보일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최수빈이 바로 대답하지 않자 태화가 다시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태화가 양 볼에 바람을 채우더니 비음과 혀 짧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태화는요……. 수빈이가 계약서에 사인했으면 좋겠어요.”

최수빈은 태화가 다시 애교를 부리자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야. 야. 그만해!”

하지만 태화는 여기서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최수빈의 확답을 들어야 했다.

“태화는요. 수빈이가…….”

태화가 다시 애교로 들이대자 최수빈이 질색하며 말했다.

“아. 알았어. 계약서 사인할게.”

태화가 여전히 애교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수빈이 정말이죠?”

최수빈이 정색하며 말했다.

“알았다고! 인제 정말 그만하자.”

최수빈이 태화를 보았다. 태화는 아직 양 볼에 넣었던 바람을 빼지 않은 상태였다.

“한 번만 더하면 계약이고 나발이고 나 그냥 들어가 버릴 테니까.”

태화는 최수빈의 확답이 떨어지자 다시 정상적인 말투로 돌아왔다.

“고맙다. 최수빈. 네가 우리 영화 살린 거야.”

“늦었어. 빨리 계약서나 가져와.”

태화가 계약서를 가지러 한재영의 차로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한재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와. 대박!”

#.

한재영이 태화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이거 역사적인 순간인걸. 서태화가 최수빈에게 애교를 부리다니. 태화야.”

“왜?”

“깜찍했다. 아주 깨물어주고 싶더라.”

최수빈이 한재영에 말에 반발하듯 말했다.

“깜찍? 끔찍한 게 아니고?”

한재영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넌 애교를 받는 처지라서 끔찍했을지 모르지만 구경하는 나로서는 아주 깜찍했다.”

태화가 한재영에게 대꾸했다.

“재영아. 그건 캐스팅을 위해서…….”

“알아. 굳이 변명 안 해도 돼.”

“뭐? 너 언제부터 보고 있었냐?”

“수빈이가 나오고 얼마 안 돼서. 그냥 눈이 떠지더라고. 딱 그 타이밍에.”

한재영은 자기의 말처럼 귀신같이 그 타이밍에 눈이 떠졌다. 한재영은 눈을 떠서 운전석에 없는 태화가 어디 갔는지 궁금했고 주변을 둘러보려다 태화와 최수빈이 만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다.

‘태화 말대로 수빈이가 진짜로 나왔네.’

한재영은 태화와 최수빈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궁금했고 조심스럽게 차에서 내려 두 사람을 관찰할 수 있는 벽 뒤에 몸을 숨겼다.

일명 벽치기.

한재영은 귀를 쫑긋 세워 태화와 최수빈의 대화를 들었다. 그리고 최수빈이 태화에게 애교를 부려보라고 말한 부분도 들을 수 있었다.

“서태화. 너 뭐든 할 수 있다고 했지?”

“그래.”

“그럼 애교 부려봐.”

“뭐. 애교?”

한재영은 최수빈의 제안에 처음엔 말도 안 된다고 생각을 했었다.

‘태화가 애교를? 그것도 수빈이한테? 이게 말이 돼?’

한재영은 최수빈이 태화의 캐스팅 제안을 퇴짜 놓기 위해서 한 발언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태화가 최수빈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로 생각했었다.

‘태화와 수빈이 두 사람의 분위기가 너무 팽팽해. 아무래도 분위기를 풀어줄 필요가 있겠어. 여기서 나서야 하나.’

한재영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프로듀서의 책임감 때문이었다. 실제 영화 현장에선 프로듀서가 연기자의 캐스팅 과정에 감독과 함께 개입한다.

하지만 한재영은 곧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받아들일 것 같지 않았던 태화가 최수빈의 제안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물론 시간을 좀 달라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태화가 최수빈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한재영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태화 녀석. 정말 할 작정이야. 평생 애교라는 걸 해본 적이 없는 녀석이.’

솔직히 태화는 애교라는 걸 부릴 필요가 없었다. 외모 자체가 최강의 무기였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무기가 훌륭해도 통하지 않는 상대가 있기 마련이다. 바로 그 상대가 최수빈이었다.

‘태화가 다른 건 몰라도 빈말로 뭘 하겠다고 말을 하는 녀석은 아니니까.’

한재영은 벽 뒤에 숨어서 태화의 애교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태화의 애교가 시작되었다.

-태화는요.

한재영은 태화의 애교를 지켜보며 속에서 짠한 감정이 올라왔다.

‘태화야. 너의 그 집념이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고 앞으로도 우리 영화가 완성되게 할 거다. 정말 고맙고 미안하다. 너한테 너무 큰 책임을 지게 하는 거 같다.’

한재영은 태화의 애교를 지켜보며 자신도 모르게 두 눈에서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태화야. 정말 이번 영화 잘 만들어서 극장에 걸자.’

태화의 애교가 끝나고 한재영은 자신의 눈가를 손등으로 훔쳤다. 그리고 언제 태화와 최수빈 두 사람 앞에 등장할지 그 타이밍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 타이밍은 바로 한재영 자신을 필요로 하는 시점이었다.

-고맙다. 최수빈. 네가 우리 영화 살린 거야.

-늦었어. 빨리 계약서나 가져와.

한재영은 자신이 등장할 타이밍이 되었다는 걸 알아챘다.

‘이제. 슬슬 나가볼까?’

한재영은 태화와 최수빈 앞에 등장하기 전 다시 한번 자신의 눈물 자국을 확인했다.

#.

한재영은 태화에게 벽 뒤에 숨어서 자신이 가졌던 생각을 말하지 않았다. 이건 한재영이 현재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정확히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최수빈과 계약을 하기 전 분위기를 띄울 필요가 있었다. 애써 분위기를 진지하게 할 필요가 없었다.

여기서 한재영의 장기인 재치와 입담이 충분히 발휘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이 역사적인 현장의 증인이 되라는 하늘의 배려겠지.”

한재영이 장난스럽게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하늘이시여. 감사합니다. 제 인생에서 평생 기억에 남을 추억을 선물해 주시는군요. 게다가 이건 평생 써먹을 안줏거리입니다. 하늘이시여. 감사합니다.”

태화가 한재영에게 정색하며 말했다.

“재영이. 너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알지?”

한재영이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뭐. 너 하는 거 봐서.”

태화는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한재영의 페이스에 말려봐야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게 없기 때문이었다.

“재영아. 계약서 가져왔지?”

“지금 말 돌리기냐?”

“야. 지금 이럴 때 아니다. 빨리 수빈이랑 계약해야지.”

한재영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한재영은 태화를 좀 더 놀려주고 싶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만 접기로 했다.

“당연히 가져왔지. 차에 있어.”

“오케이.”

태화가 최수빈을 향해 말했다.

“수빈아. 차로 가자.”

“차로?”

“응. 계약서가 차에 있대.”

한재영이 최수빈을 향해 말했다.

“어서 가시죠. 우리 영화의 새로운 히로인.”

한재영은 말을 마치고서 허리를 숙였다. 최수빈은 한재영의 모습을 보자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한재영. 오버 좀 하지 마.”

최수빈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론 기분이 좋았다. 히로인. 이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이던가.

#.

태화와 한재영, 그리고 최수빈은 한재영의 차에 올라탔다. 자리 배치는 운전석에 한재영 그 옆 보조석은 태화 그리고 뒷좌석에는 최수빈이 자리를 잡고 앉은 상태였다.

한재영이 자기의 가방에서 계약서와 펜을 꺼내 뒷좌석에 앉은 최수빈에게 건넸다.

“계약서는 표준 계약서에서 따왔어. 거기에 N 분의 일 조항만 추가된 거고.”

“알았어. 잠깐 읽어봐도 되지?”

태화가 최수빈에게 대답했다.

“천천히 얼마든지 읽어봐. 나하고 재영이는 잠깐 나가 있을 테니까.”

“어디 가려고?”

“동네 한 바퀴 돌고 오지 뭐.”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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