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88화 (88/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88화

태화가 최수빈을 보며 말했다.

“좀 봐줘라.”

“봐 달라고? 그럼 안 하겠다는 거야?”

태화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하. 나 참.”

“뭐. 말투 보니까 안 하겠다는 거네.”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그럼?”

“시간을 좀 달라 이거지.”

“시간을 달라고?”

“솔직히 연인 사이도 어?”

“어. 뭐?”

“그러니까 평소에 애교를 부리지 않은 사람이 갑자기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태화 네 말은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 건가?”

“그렇지.”

태화로선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 시간 줄게. 대신 많이는 못 준다.”

“알았다.”

“시간 주는 대신 아주 잘해야 한다. 아주 내가 닭살이 올라오도록.”

“이건 말이 다르잖아!”

“지금 짜증 내는 거야? 아니면 화내는 건가?”

“내 말은 애교만 부리면 되는 거 아니었나 이 말이지.”

“시간을 줬잖아. 그러니까 조건이 붙는 거지. 안 그래? 그게 싫으면 지금 하든가.”

태화는 순간 속에서 욱하는 감정이 올라왔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태화 군. 난 최수빈이 왜 자네에게 애교를 부리라고 했는지 이해할 거 같네.]

[도대체 왜 저러는 겁니까? 너무 뜬금없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애교를 부리라니.]

[자네 최수빈에게 상냥하게 말한 적이 없지 않은가?]

[음……. 그랬던 거 같네요. 예전에 졸작 이후로 쭉 그랬던 것 같습니다. 주문진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도 그리고 오디션장에서 만났을 때도 그랬던 거 같네요……. 그럼 수빈이가 저에게 애교를 부리라고 한 건?]

[아마도 최수빈은 자네가 선뜻 하기 힘든 걸 하게 하려는 것 같네. 자네가 무릎을 꿇는 것보다 더욱더 하기 힘든 걸 요구하는 거로 보면 되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죠?]

[그걸 통해서 자네에게 쌓여 있었던 감정을 푸는 거라고 할 수 있네. 그러면서 동시에 자네의 의지를 확인하는 과정으로 보는 게 타당할 걸세.]

[저한테 쌓인 감정을 푸는 건 이해가 되는데 저의 의지를 확인한다고요?]

[그렇네. 자네가 최수빈에게 애교를 부린다는 건 자네의 자존심을 어느 정도 굽혀야 가능한 일이지 않은가?]

[그건 수빈이가 잘못 판단한 겁니다. 전 이곳에 올 때 이미 자존심 내세울 생각은 일도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전개될 줄은 누가 알았겠습니까? 제가 수빈이에게 단순히 연기자가 아니라 투자자라고 말했을 때 수빈이가 캐스팅 제안을 어느 정도 수락할 거로 판단했었는데……. 반응도 나쁘지 않았었고.]

[자네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네.]

태화가 박도봉 감독에게 되물었다.

[틀리지 않았다고요?]

[그렇네. 분명 최수빈은 자신이 캐스팅 제안을 수락하면 동시에 투자자가 된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꼈을 게 분명하네. 무엇보다 본인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니 말일세. 최수빈은 이성적으로 따졌을 때 자네의 제안을 따르는 게 맞네.]

[결국 감정이 그 이성적 판단을 막고 있다는 말이군요.]

[그렇네. 현재 최수빈은 이성과 감정의 괴리가 있는 상태일세. 자네가 선듯하기 힘든 걸 하게 하는 것도 바로 어찌 보면 그 괴리감을 좁히는 방법이기도 하네.]

[영감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겠어요. ‘나를 캐스팅하기 위해서 저것도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면 이성과 감정 두 개의 괴리감은 자연스럽게 좁혀지겠죠.]

[바로 그걸세. 나는 자네에게 이런 말을 했었네. 자네가 자네와 최수빈 사이에 있는 유리 벽을 깨부수어야 한다고……. 이미 유리 벽에 균열은 일어난 상황이네.]

[그 유리 벽을 깨버릴 마지막 한 방이 제 애교라는 말이군요.]

[좀 웃기지만 그렇네.]

[하지만 애교를 어떻게 부립니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해본 적이 없는데.]

[태화 군. 내가 방법을 알고 있네.]

[영감님이 알고 있다고요?]

[내가 그 정도도 모르겠는가? 수많은 여자 연기자들이 감독인 내 앞에서 애교를 부리곤 했었네.]

[빨리 말해주세요. 제가 지금 이것저것 가릴 때입니까?]

[그럼. 말하겠네. 애교를 부리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네. 자네를 3인칭화 하는 거네.]

[저를 3인칭화 한다고요?]

[자네가 자신을 지칭할 때 1인칭인 나를 쓰는 게 아니라 자네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네. 즉 ‘태화는요’ 이렇게 말일세. 거기에 약간의 비음만 섞이면 되는 것일세.]

[내가 나를 지칭할 때 이름을 부르고 거기에 비음을 섞으라고요? 생각만 해도 온몸에 닭살이 올라옵니다.]

[그래도 해야지 어쩌겠는가?]

[저도 그게 불만입니다.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게.]

[그리고 애교를 부리면서 할 대사는 자네가 적절하게 구사하면 되네. 표정도 귀엽게 하는 거 잊지 말고.]

[본인이 안 한다고 참 편하게 말하는군요.]

[태화 군. 그래도 자넨 과거 연기를 지망했던 사람 아닌가? 이왕 하는 거 즐기게. 혹시 모르지 않는가? 최수빈이 자네의 매력에 빠질지.]

[한가한 소리는 인제 그만하시죠.]

[알았네. 자네의 건투를 빌겠네. 아참. 한 가지 중요한 걸 빼먹었군.]

[그게 뭡니까?]

[혀 짧은 소리.]

[영감님!]

[허허. 그렇게 화내지 말게. 애교에 아주 중요한 요소니까 말해주는 걸세.]

#.

최수빈은 태화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지만, 태화는 아직도 움직일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

‘서태화. 네가 애교를 부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겠지. 게다가 나한테 하는 거라면 더 그럴 거야. 그래도 넌 해야 해. 그래야 내가 네 제안을 온전히 받을 수 있어.’

최수빈은 박도봉 감독의 말처럼 이성적으로는 태화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감정적으로는 머뭇거리고 있었다. 태화는 최수빈의 이러한 감정적 머뭇거림을 풀어야 한다.

한편 태화는 잠시 두 눈을 감은 채 각오를 다졌다.

‘어차피 나한테 다른 길은 없다.’

태화는 순간 이우섭과 김현석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도 두 사람은 태화가 최수빈을 캐스팅해 오길 기대하고 있을 게 뻔했다. 그런데 태화가 아무 성과 없이 돌아간다면 그 두 사람은 실의에 빠질 게 분명했다. 그리고 뒤이어 떠오른 얼굴이 있었다.

바로 선혜영.

선혜영은 예기치 않은 사고를 당했지만, 그녀는 태화를 지지해 주었다. 그리고 오늘 태화를 적극적으로 도와준 송윤주와 이한철, 그리고 이 작품에 참여한 스태프와 다른 연기자들의 얼굴이 태화의 머릿속에서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여기서 태화가 최수빈을 캐스팅하지 못한다면 태화는 그들과 이 작품을 함께 할 수 없게 된다.

‘수빈이가 캐스팅돼서 다시 영화 촬영을 재개할 수만 있다면……. 그거면 된다. 어차피 여기 올 때 자존심은 이미 두고 왔으니까 쪽팔릴 것도 없다. 정말 쪽팔린 건 수빈이를 캐스팅하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가는 거야.’

태화는 눈을 떠 최수빈을 보았다. 최수빈이 팔짱을 낀 채 태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태화. 너무 시간 끄는 거 아냐? 그럴수록 너한테 불리해. 그만큼 퀄리티를 올려야 하니까.”

“최수빈. 보채지 마라.”

“그럼. 이제 시작하는 건가?”

“그래.”

“이거 기대되는걸. 서태화가 애교를 다 부리고.”

태화는 ‘네가 하라고 했잖아!’라고 최수빈에게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일단 참을 수밖에 없었다. 현재 태화의 머릿속에는 영화 촬영 재개밖에 없었다.

태화는 한숨을 쉬고 나서 최수빈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최수빈이 당황하며 살짝 뒷걸음질 쳤다.

“너……. 너. 갑자기 왜 이래?”

“왜? 애교부리라며?”

“그런데?”

“당연히 가까이 가야 하는 거 아니냐? 애교부리는데 떨어져서 하는 거 봤냐?”

“당연히 못 봤지.”

“그러니까.”

태화는 말을 마치고 나서 최수빈에게 가깝게 다가갔다. 최수빈도 더는 뒷걸음질 치지 않았다. 자신이 애교를 부리라고 해놓고 뒷걸음질 치는 건 자신이 생각해도 웃겼기 때문이었다.

태화는 최수빈에게 조금씩 다가갔다. 이제 태화와 최수빈의 거리는 반걸음 정도로 가까워졌다.

태화가 최수빈을 보며 말했다.

“수빈이 너. 감당할 수 있겠냐?”

“뭐? 네 애교?”

최수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건 걱정하지 마. 나 그렇게 약하지 않아. 나 고어 영화도 아주 좋아하거든.”

고어 영화는 낭자한 피와 잔혹한 살육 장면을 서슴없이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영화로 비위가 약한 사람은 이런 장르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최수빈은 태화가 어떻게 애교를 부리든지 버틸 수 있다고 말한 것이지만 듣기에 따라 태화를 비꼰 거라고 할 수도 있었다.

-네 애교가 다소 비위에 거슬리더라도 난 버틸 수 있다.

하지만 태화는 최수빈의 이런 발언에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예전 같았으면 발끈했겠지만.

지금 태화의 머릿속엔 최수빈 캐스팅이라는 목표만 있을 뿐이었다.

“너. 계약서에 사인할 준비 해라.”

“아주 자신 있나 보네?”

“나중에 딴소리하지 마라.”

태화는 최수빈의 마지막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서태화. 큰소리치더니 역시 망설이는 거니?’

하지만 태화는 최수빈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망설이고 있는 게 아니었다. 태화는 머릿속으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마지막으로 정리하는 중이었다.

‘3인칭화, 비음, 귀여운 표정. 그리고 혀 짧은 소리.’

태화는 최수빈을 향해 쳐야 할 대사도 정리한 상태였다. 태화는 최수빈에게 애교를 부리기 전 상대인 최수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최수빈. 넌 우리 영화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그러므로 아주 소중한 존재다.’

태화는 자기 암시를 걸었다. 태화가 이런 생각을 한 건 상대가 미운데 애교가 나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상황을 넘어가려면 연기라도 해야 하니까.

하지만 태화는 이 생각을 바로 접었다. 무엇보다 태화 자신과 그 방법이 맞지 않았다.

‘우리 영화의 주연을 맡을 사람에게 감독인 내가 연기를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결국 진심이 통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잘하고 못하고는 나중 문제야. 자존심 문제도 아니고.’

태화는 이런 생각이 들자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 모습을 본 최수빈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서태화. 지금 웃는 거야? 도대체 왜?’

최수빈의 의문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시점. 태화의 최수빈을 상대로 한 애교가 시전 되었다.

“태화는요.”

태화는 양 볼에 바람을 최대한 불어넣은 상태에 비음을 섞어서 말했다. 그러면서도 태화는 최대한 표정을 귀엽게 하려고 노력했다. 태화는 표정 외에 손을 적극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태화는 엄지와 검지를 펴서 자기의 턱을 받치며 계속 애교를 전개했다.

“음……. 수빈이가 우리 영화의 여주를 맡았으면 좋겠어요.”

태화의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가 고민하면서 말하는 모습 같았다. 하지만 최수빈은 태화의 애교를 무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이 정도 되면 최수빈도 웃음이 터지든지 아니면 다른 반응을 보어야 하는데 최수빈은 전혀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태화는 최수빈의 반응에 당황하지 않았다. 아직 더 보여줄 게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0